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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26화 (27/224)

026장. 엘리스 R 고든

전날 저녁 미국에서 출발했던 비행기는 이른 아침 인천 상공에 진입했다.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드디어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저곳이 인천 공항이군요. 전경이 굉장합니다.”

로버트는 지상을 내려다보며 적잖게 감탄한 눈빛을 보였다.

“세계 최고 공항 중 하나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나라 같습니다.”

한국이 처음이라더니, 아시아의 고만고만한 나라 정도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에요.”

내 말투에서 살짝 서운함이 느껴져서일까. 로버트가 허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나라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나름 공부도 했으니까요.”

“따로 공부했어요?”

“그럼요. 어쩌면 앞으로 살아야 할 나라일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괜찮겠어요? 미국이 아니라…….”

“지역이 어디인가는 의미가 없죠. 보스가 있는 곳이 제가 있을 곳이니.”

“고마워요.”

“아닙니다. 보스가 경찰국에 도움을 요청해주셔서 제가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니겠습니까. 집사람과 아이들도 오히려 지금이 더 좋다고 합니다. 보스가 워낙 잘해주셔서. 저도 그렇지만 모두가 만족하고 있습니다.”

로버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한때 샌프란시스코 경찰을 진두지휘 하던 사람치곤 부끄럼이 많다.

본래 타고난 성격이 저런 것 같은데 그동안 어떻게 그 험한 경찰 일을 해 왔는지 모르겠다.

로버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게이트를 벗어나자 익숙한 얼굴 하나가 재빨리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 오셨습니다.”

“네. 김덕영 씨도 잘 지냈습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영사 자리에서 쫓겨나 자연인이 된 김덕영. 지금은 GO 컴퍼니 소속 임시 계약직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중이다.

“그동안 일 처리 하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고생은요. 대표님 지시사항인데 무조건 해내야죠. 인원수에 맞춰 차를 준비해 놨습니다. 이쪽으로.”

김덕영의 안내를 받아 게이트를 벗어나는데,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낀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주변을 살피며 경호에 매진하고 있던 로버트와 경호팀이 곧바로 반응에 나섰다.

“고주…… 악!”

대뜸 주몽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던 양복쟁이가 1조장 브라이언의 손에 잡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쿵!

제대로 된 한판!

뒤따라오던 사내들은 ‘이게 무슨!’ 뭐, 이런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경호원들 역시 거침이 없었다.

투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게이트 주변이 난잡해졌다.

게이트를 나서던 다른 승객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메뚜기 떼처럼 흩어졌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이 재빨리 스마트 폰을 꺼내 촬영에 들어가는데, 경호팀이 그걸 또 발견하고 앞을 막아섰다. 씨티은행 앞에서 방송국 카메라도 커버 친 인재들이니 스마트 폰 정도야 일도 아니겠다.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외국인이 촬영자를 노려보자,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히 스마트 폰을 집어넣었다.

뒤늦게 달려온 마흔 초반쯤의 남자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소리를 질렀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로버트 옆으로 비서팀 팀장 대리 엘리스가 발맞춰 섰다.

미국에서 일 처리 때문에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제이코가 능력이 좋은 친구라며 붙여준 변호사다.

에이스 로펌의 다른 변호사들과 달리 최근에서야 소개를 받았는데 뉴욕에서 재판이 있어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다.

엘리스와 처음 만나던 날. 여러모로 놀람을 감추지 못했는데, 처음엔 엄청난 미모에 깜짝 놀랐고 두 번째는 스물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어찌나 냉기가 좔좔 흐르는지 농담 한마디, 장난 한번 건네기 어려운 얼음 땡 캐릭터다.

에이스 로펌 소속 변호사들은 대표인 제이코를 닮아 하나 같이 성격이 쾌활했는데 그런 그들도 엘리스만큼은 선뜻 말을 섞질 않았다.

그만큼 성격이 더럽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엘리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와…… 왓?”

금발의 백인 미녀가 나타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불쑥 영어로 질문을 던지자 상대는 ‘어어……’ 하는 표정으로 입을 얼버무렸다.

“위협을 가한 이유에 대해 명확한 해명이 없다면, 미합중국 대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상대가 계속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그를 뒤 따라 왔던 젊은 남자가 속닥속닥 통역을 해 줬다.

“항의? 미 대사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사내는 당황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내의 말을 옆의 남자가 재빨리 통역했다.

“신분을 밝혀 달라고 했습니다만.”

“아. 미안합니다.”

사내는 양복 속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아마도 명함 정도를 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로버트나 경호팀 눈엔 그 행위가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스톱!”

로버트와 경호팀이 나를 에워싸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

“천천히. 손을 빼시오.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경우, 명백한 위협으로 간주!”

통역이 긴장된 표정으로 재빨리 통역에 나섰다.

“손을 천천히 빼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비서관님이 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 유학파 통역관답게 저들의 발언과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캐치해 냈다.

“총이라니. 그게 무슨.”

“저들은 미국인입니다. 경계 대상의 손이 시야에서 사라지는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상대가 뭘 꺼내 드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한국이라고.”

“네. 하지만 저들은 미국인입니다.”

비서관이 황당하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통역은 따지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줬다.

비서관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느릿하게 손을 빼 들었다. 그의 손엔 메탈 재질의 작은 명함집이 들려 있었다.

“저는 청와대 정무 수석실 소속. 2급 비서관 양상도입니다.”

양상도 비서관이 명함을 꺼내 들자, 엘리스가 뒤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비서팀 직원이 앞으로 나가 명함을 받아들었다.

명함은 엘리스 손에 곧장 넘어갔다.

“용건을 이야기해주십시오.”

엘리스는 명함엔 시선도 주지 않고 진로를 방해한 이유를 물었다.

“잠시 자리를 옮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비서관의 말에 엘리스가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기는. 청와대라잖아. 공항까지 달려와 이야기 좀 하자는데 이걸 까면 어떻게 되겠어.

“그렇게 할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스 역시 비서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가 안내하라고 이야기하자, 통역관이 비서관에게 그 말을 전달했다.

이거 뭐 도미노 게임도 아니고. 줄줄이 왔다 갔다 하네. 그런데 비서관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 영어도 못 해서 통역관까지 대동해? 거기다 나 한국 사람인데.

“이쪽으로.”

우리는 비서관 일행을 따라 공항 내 VIP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쪽 서른 명. 청와대 쪽 스무 명가량의 인원이 대기실에 들어서자 내부가 꽉 차는 느낌이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다과가 차려졌다.

나와 엘리스 그리고 로버트가 줄줄이 자리를 잡고 앉자, 나머지 인원은 병풍처럼 배경을 자처했다.

백인, 흑인, 스페니쉬까지 혼용된 내 경호팀들은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내에서도 에이스 중에서도 엘리트들이다.

다른 직업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 경찰에서 엘리트라는 말은 진짜 무시무시하고 거침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자들이 눈을 부라리며 언제든 달려들 자세로 버티고 서 있으니 그 자체로 위압감을 선사했다.

엘리스가 고저 없는 특유의 서늘한 말투로 먼저 입을 열었다.

“10분 드리겠습니다.”

통역이 곧바로 말을 전했다.

“10분 주겠답니다.”

“10분?”

“네.”

“내가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걸 제대로 이야기 한 거야?”

“네.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통역은 말만 전달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상대의 말에 섞여든 감정까지 잘 찾아내 전달해야 제대로 된 통역이다.

“그리고 뭐?”

“귀찮아 보입니다.”

“허…… 어이가 없군.”

엘리스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에잇 미닛.”

“팔 분…….”

“나도 그 정도는 알아들어.”

“넵.”

통역이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양상도 비서관이 곧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대통령님께서 고주몽 씨를 보고자 하십니다. 청와대 경호팀과 차량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동하시죠.”

“그대로 통역합니까?”

통역이 ‘이건 아닌 것 같은데’하는 표정으로 비서관을 바라봤다.

“뭐,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아닙니다. 통역하겠습니다.”

통역관의 말에 엘리스가 나를 바라봤다.

“김덕영 씨.”

“네. 대표님.”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죠?”

“9시에 제일 로펌과 미팅이 있습니다. 11시에는 외환 은행장 미팅, 점심을 먹고 2시에 주왕시로 출발. 5시 30분 대표님 댁에 도착 예정입니다.”

김덕영이 스케줄을 줄줄 읽어내리자 비서관이 다시 당황한 표정이 됐다.

청와대에서 그것도 대통령이 얼굴 좀 보자는데, 면전에 두고 스케줄을 읊어대다니. 이게 무슨 무례냐고 따지고 싶은 얼굴이다.

“엘리스. 나 엄청 바빠.”

“네. 보스.”

엘리스는 고개를 까딱하고선 비서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와대의 방문 요청엔 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스께서 시간을 빼기 어렵다고 하십니다.”

엘리스의 말을 통역이 전달하려는데 비서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바쁘다 정도는 나도 알아들어.”

“네…….”

“사전 연락 없이 이렇게 찾아온 것에 대해 일단 실례했다는 말 전합니다.”

통역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양상도 비서관이 ‘뭐해? 통역!’하는 눈빛으로 통역을 바라봤다.

통역은 양 비서관의 말투에 짜증이 났지만, 일단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청한 자리입니다. 로펌과의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에 대한 기회비용을 청와대에서 보전해 준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엔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엘리스가 곧바로 답했다.

“어이. 엘리스. 내 의견을 물어야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보스. 이 정도 협상은 제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저들은 절대 보스의 기회비용을 물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간 청와대 일 년 예산이 얼마가 됐든 간에 바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할 테니까요.”

엘리스는 이런 자잘한 것까지 꼭 묻고 확인을 해야 하냐며 맡겨 달라고 했다.

‘제이코. 빨리 와. 나 아무래도 엘리스와는 궁합이 안 맞는 것 같아.’

엘리스는 비서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통역에게 짤막한 경고를 날렸다.

“통역은 양측의 대화만 전달하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대화를 그쪽으로 옮겼다는 게 확인되면 미국 법원에 고소하겠습니다.”

“예스!”

엘리스의 깔끔한 협박에 통역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기회비용을 보전해 준다면 청와대로 이동하겠다고 합니다.”

통역이 내용을 전달하자 양상도 비서관은 또 한 번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회비용?”

“네. 아무래도 스케줄을 바꾸게 되면 저쪽 업무에 지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에 대한 보상 또는 해결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얼만데?”

“기회비용이 얼마냐고 물어보십니다.”

엘리스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자신의 팔목을 내려다봤다.

“타임 오버.”

“에?”

“뭐?”

타임 오버를 선언한 엘리스의 행동에 통역과 비서관이 황당한 아니 당황한 표정이 됐다.

엘리스. 나… 나도 당황했어.

엘리스는 저들의 반응엔 관심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스. 이동할 시간입니다.”

“어…… 그래.”

아주 작두칼을 들고 거침없이 휘두르는구나!

안 되겠다. 제이코에게 전화해서 두 사람 업무를 스위칭시켜야…….

“보스.”

“어.”

“제이코에게 전화라도 하실 표정입니다.”

“내가?”

이젠 독심술까지 하는 건가?

“아닌가요?”

“아닌데.”

“네. 그러실 거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어. 그래. 나야말로…….”

뭐야. 나 지금 낚인 거야? 그런 거야?

엘리스는 또각거리는 힐 소리를 쏟아 내며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쪽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줄리앙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보스. 아무래도 말입니다.”

“어. 뭐가?”

“제이코가 보스에게 떠넘긴 느낌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제이코 한국에 오고 싶어 했잖아!

“로펌에 있을 때도 비슷한 장면이 꽤 많았던 터라. 제 변호사적 감각이 충분히 의심스럽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냥 흘려들으십시오.”

어이. 그게 흘려들을 이야기야? 그런 이야기는 엘리스가 비서팀에 들어오기 전에 이야기했어야지!

찬바람 쌩쌩 부는 여자 옆에서 생활하다가 풍이라도 걸리면 누가 책임질 건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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