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장. 가자, 한국으로!
“비서팀 나상선 말입니다.”
“나상선 말입니까?”
박 실장은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살짝 놀라는 눈빛이 됐다. 그 말은 박 실장 역시 나상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군지 알고 있었군요.”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우연히.”
짧게 끊어치는 대답에 박 실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연구소 일도 알고 있죠?”
“…….”
“대역까지 이용해 움직였을 때는 노리는 것이 있었을 텐데. 그걸 듣고 싶습니다.”
툭툭 치고 들어가는 내 질문에 박 실장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관련자를 빼곤 누구도 모르는 일을 이미 눈치채고 계셨다니.”
“지방 삼류대 출신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동안 저희가 대표님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개밥에 도토리 같은 소리는 절대 사절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나상선 비서는 막내 도련님 이진선이 맞습니다. 본인은 나름대로 신분 세척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대왕 그룹 핏줄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우리가 모를 수가 없죠.”
“연구소는 뭘 하는 곳이던가요?”
“아쉽게도 저희 역시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연구소에 침투했던 용병들이 곧바로 총질해 버리는 바람에.”
서로 총질을 했다는 부분에서 고개가 끄덕여 졌다. 죽기 전에 들었던 총성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던가요?”
이 부분이 진짜 듣고 싶은 핵심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스피어 안에 들어갔다면 시간 역행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실험은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실험이 진행되지 못했다?”
“네. 기기를 작동하기도 전에 용병들이 치고 들어가는 바람에.”
실험이 진행되지 못했다는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겪었던 시간대보다 더 빨리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수행비서에서 빠진 이유로 나비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호텔 복도에서 이진상과 마주친 것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상선이 수행비서로 갔다는 정보를 이진상에게 알려줬으니 말이다.
나상선이 이진상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진상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테고 대역과 함께 나상선이 동행했다는 말에 곧바로 치고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어떤 연구인지는 알아냈습니까?”
“아닙니다.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급히 후퇴했는데, 결국 폭발사고로 이어졌습니다. 실험에 참여한 연구원과 자료도 그 때문에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연구소 쪽 일은 왜…….”
박 실장이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 비서가 자금까지 빼돌리면서 집중하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슨 연구를 하기에 그러나 궁금했습니다.”
“아…….”
상선이 자금을 빼돌린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는 말에 박 실장은 놀랍다는 표정이 됐다.
자신들도 그걸 파악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인력을 투입했었는데 주몽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출신 대학에 가려 가진 바 능력이 심각할 정도로 평가절하되었다고 생각하는 눈빛이다.
“나 비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구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니까요. 이 상무가 직접 마무리를 짓겠다고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되레 총상을 입기까지 했습니다.”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상선의 흔적이 발견되면 곧바로 알려주기 바랍니다.”
죽은 것으로 파악된 나상선의 흔적을 파악해 달라는 말에 박 실장이 의아한 표정이 됐다.
“나상선도 이 상무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소리죠.”
“네. 알겠습니다.”
“방금 나눈 이야기는 둘만 아는 거로 하죠.”
“네. 대표님.”
박 실장과 임 과장, 기조실 직원들 모두 회의실로 다시 재소집됐다.
내가 박 실장에게 그랬듯이, 제이코와 변호사 군단도 임 과장과 기조실 직원들을 하나씩 붙잡고 ‘살고 싶다면 라인을 바꿔 타야지’를 속삭이며 기조실 전체를 해체 분해한 뒤 재조립 해버렸다.
“박 실장님.”
“네. 대표님.”
“제 후속으로 발령받은 사람도 있죠?”
“물론입니다.”
박 실장은 재빨리 수첩을 열었다.
“자재과 정은영 사원입니다. 대표님과 입사 동기입니다.”
“입사 동기요?”
대왕 전자에 들어가긴 했지만, 딱히 동기니 뭐니 하면서 얼굴 익힐 시간도 없이 이진상 밑으로 배속받았다.
거기다 자신과 같은 이유로 입사했다는 말에 ‘동기’란 단어가 묘하게 친밀감을 줬다.
일반 업무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둬 버린 다른 동기들과 달리 악착같이 붙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죠?”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임 과장은 전화기를 꺼내 들더니 인사과장에게 곧바로 연락을 넣었다.
― 네. 임 과장님. 말씀하신 대로 오늘 인사 조처시킬 예정입니다.
임 과장의 전화를 받은 인사과장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진행 상황을 알렸다.
“정은영 사원의 인사 파일을 받아 볼 수 있을까요?”
― 당연히 드려야죠. 이제 기조실에서 관리할 사람이니. 메일로 보내놓겠습니다.
“네. 지금 바로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린 임 과장은 메일이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뜨자 첨부파일을 열어 스마트 폰을 나에게 건넸다.
이름 : 정은영(여) 26
가족사항 : 동생(정일호 21)(정선영 17)(정진호 15)
학력 : 이서대 행정학과
“남자가 아니라 여자 직원이군요.”
인적사항을 확인하던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임 과장을 바라봤다.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입사시켰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거의 매일 24시간 붙어 있다시피 하는 수행비서다.
거기다 하는 일도 일반 업무가 아닌 수발드는 게 핵심인데, 이런 일에 여자를 붙인다?
“저기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정은영 사원은 ‘얼굴’로 뽑았습니다.”
“얼굴요?”
여사원을 얼굴로 뽑았다는 말은 업무 능력 외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쪽입니까?”
“…….”
박 실장과 임 과장은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요.”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빼돌리세요.”
“네?”
“정은영을 빼돌리란 말입니다. 그냥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이는데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언성이 높아지자 임 과장은 재빨리 인사과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인사 과장님. 접니다. 네. 인사 파일은 잘 봤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 네. 무슨 문제라도.
“잠시 보류를 해주십시오.”
― 보류요?
인사과장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한 목소리가 됐다.
“상무님이 아직 미국 출장 중이시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 아아. 네.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아직 발령 전이었으니 일단 묶어 두겠습니다.
임 과장은 통화를 끝내고 다시 내 눈치를 봤다.
“정은영 사원처럼 여자를 수행비서로 붙이는 경우가 잦았습니까?”
“아닙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박 실장과 임 과장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손을 내 저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거짓말해 봤자 금방 들통날 일입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두 사람은 믿어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조사하면 다 나올 일이니 이 상황에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겠죠. 하지만 나중에라도 문제가 튀어나온다면.”
“네. 책임지겠습니다.”
박 실장이 책임까지 입에 담으며 이야기했다.
“박 실장님. 우리가 한 약속 잊지 말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이 상무에게 돌아가 최대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필요한 자료 역시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아 오겠습니다. 전임들 문제도 한국에 들어가는 즉시 손을 쓰겠습니다.”
“좋습니다. 만남은 여기까지 하죠.”
내가 회의실을 나서자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제이코가 세세한 사항을 지적하고 지시 내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 *
미국에서의 업무는 거의 마무리가 됐다. 자잘한 것들은 제이코가 컨트롤하기로 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경호는 절대 물려서는 안 됩니다. 보스가 완전하게 자리를 잡기 전까진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노출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공항까지 쫓아 나온 제이코는 시어머니처럼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놨다.
“그렇게 할게요. 내가 싫다고 해도 로버트가 그걸 받아줄 사람입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좀 하세요.”
“걱정돼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소송이 끝날 때까지라도 미국에 머무는 것이 좋지 않나 싶기도 하고.”
“소송이 언제 끝날 줄 알고요.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면 대왕 그룹은 물론이고 이진상도 정신이 없을 겁니다. 내 쪽으론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경쟁자들 말이군요.”
“네. 기회가 생겼는데 멍청히 지켜볼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상무는 이번 재판 때문에 그룹 내에서 위치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될 겁니다.”
“제가 이쪽에서 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공격을 하겠습니다.”
“네. 제이코만 믿습니다. 출국 시간입니다. 나중에 봐요.”
“하아…… 이거 내가 따라가야 하는데.”
제이코는 연신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그러고 싶으면 제이코처럼 야무지게 일하는 직원들을 더 늘려요.”
“네. 최고의 인재들로 법무팀을 강화하겠습니다.”
“그럼 갈게요. 로버트 출발하죠.”
“네. 보스.”
국장직에서 물러난 로버트는 GO 컴퍼니 경호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과정에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엘리트들이 대거 사표를 내 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난리가 났다고 한다.
로버트와 경호팀 그리고 비서팀까지.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스튜어디스가 티켓을 확인하더니 나와 로버트를 퍼스트 클래스로 안내를 해 줬다.
태평양을 건너든 대서양을 건너든 일반석 붙박이처럼 살았던 나에게 퍼스트 클래스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고객님. 언제든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물 한잔 부탁해도 될까요?”
“아실리수와 에비앙이 준비돼 있습니다.”
에비앙은 대충 들어본 것 같은데, 아실리수는 처음 들어보는 메이커다.
“아실리수로 부탁드립니다.”
무슨 맛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맛이나 보자는 생각에 아실리수를 선택했다.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스튜어디스는 곧바로 아실리수를 내왔다.
내심 기대감으로 가지고 한 모금 들이켰는데, 내 입이 후져서인지 그냥 물은 물맛이다.
잠시 뒤, 안내 방송이 나오자 묵직한 동체가 활주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에 온 지 한 달 보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벌서듯 바다를 건너온 게 얼마 전 같은데, 퍼스트 클래스라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보스. 어제도 회의 때문에 거의 못 주무셨지 않습니까. 피곤하실 텐데 눈 좀 붙이시죠.”
“네. 로버트. 안 그래도 슬슬 잠이 오네요.”
말이 씨가 됐는지, 비행기가 날아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르륵 눈이 감겼다.
무섭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던. 그리고 내 인생 최초로 누군가를 부리며 정신없이 보냈던 잊지 못할 미국 생활이 이렇게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