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24화 (25/224)

024장. 속삭임.

“내 질문이 어려워요?”

대답을 못 하고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 박 실장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이번에도 답이 없다면 박 실장님은 솥에 삶아진 개가 될 겁니다.”

내 말이 섬뜩하게 들려서일까. 박 실장은 물론이고 임 과장과 다른 기조실 직원들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총기를 들고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특공대 만으로도 이미 기가 눌린 상태다.

칼 든 조폭에 둘러싸여도 아찔한 판인데, 총 든 경찰이라니. 그것도 주몽을 보스라고 부르는 자들이다.

껍데기만 경찰일 뿐, 속을 들여다보면 사조직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오해의 여지가 있군요. 당신들을 솥에 넣고 삶아버릴 사람은 제가 아니라 대왕 그룹입니다. 저는 그렇게 잔인하지도 냉혹하지도 못하니까요.”

제이코가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보스. 보스가 뭐라고 했기에 저런 표정들입니까? 그냥 영어로 대화하시면 모두가 편할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김덕영 영사에겐 ‘헤이, 미스터!’ 거리며 스피크 잉글리쉬를 외쳤던 제이코지만 나에겐 부드러운 남자다. 살포시 웃는 얼굴로 부탁을 했다.

“제이코. 미국이나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재벌들은 술 먹고 운전하다 사람을 죽여도 어지간해선 다 빠져나옵니다.”

“왓?”

제이코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됐다.

“방법은 여러 가지죠. 일단 운전자가 바뀔 것이고. 알리바이 조작이 시작될 것이고. 피해자나 증인 매수에 들어가죠. 그와 더불어 끈끈하게 엮여 있는 사법부에 약을 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작업에 성공하면 어중간한 자리에 있는 직원이 죄를 뒤집어쓰고 한동안 감옥살이를 하죠.”

“실패하면요?”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술 때문에 정상적인 의식과 사고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심신미약을 들어 무죄로 판결하거나, 최대로 쳐도 3년 형에 집행유예 5년이 떨어지죠. 이걸 한국에선 재벌을 위한 사법부의 3.5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아,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비서들은 당연히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어이가 없군요.”

제이코는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냐는 듯 혀를 내둘렀다.

“저도 그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된 사람 중 하나였을 겁니다.”

“왓?”

제이코는 물론이고 로버트와 다른 이들까지 흥분한 기색이 됐다.

“그래서 말해줬습니다. 이젠 당신들이 솥에 들어가 삶아질 시간이라고.”

“아하. 토사구팽!”

“아세요?”

“고전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습니다. 저도 한때 책 좀 읽었거든요.”

제이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송이 시작되면 곧바로 토사구팽이 시작될 겁니다. 자신들은 몰랐던 일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러자면 주인 허락도 없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필요할 테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상금은 누구에게 받아야 합니까? 설마 대왕 그룹이 아니라 저기 서 있는 사람들이?”

제이코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박산호 일행을 바라봤다.

“저도 거기까지는 모르겠네요. 한국에서는 그렇게 될 게 분명하지만,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은 겪어 본 적이 없으니.”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은 알 수 없다라. 저 역시 그쪽은 아는 게 없으니 장담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선 절대 안 될 겁니다.”

제이코는 용납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박산호 실장님.”

“네. 고주몽 대표님.”

“실장님이 직접 이야기해 봐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 그건.”

박산호는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때 임 과장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노모도 살아계시고 마누라에 애들까지. 저는 아직 죽어선 안 됩니다!”

임성철 과장의 외침에 기조실 다른 직원들 당장이라도 임성철을 따라 무릎을 꿇고 싶은 표정들이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법에 호소할 생각이니까요. 그리고 그 대상은 대왕 그룹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라.”

내 말에 임성철이 부러질 듯 고개를 저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뭘 말입니까?”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말입니다. 고 대표님은 대왕 그룹만 상대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한국 재벌은 모두가 혈연관계로 엮여 있습니다. 개중엔 쌤통이라는 표정으로 손뼉 치는 자들도 있겠지만, 태반은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모두가 손을 잡고 저를 공격한다는 말이겠죠.”

“네.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서 어찌하라는 거죠? 소송을 취하하고 없었던 일로 하라는 말인가요?”

“솔직히 그렇게만 된다면 바랄 게 없겠죠. 하지만 고 대표님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으시겠죠?”

“물론입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법 절차에 따를 겁니다.”

나의 단호한 음성에 임 과장은 애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어차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놈 아닙니까. 제발 살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임성철의 외침에 제이코가 앞으로 나섰다.

“헤이! 미스터.”

“네. 네?”

“스피크 잉글리쉬~!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느닷없이 영어로 이야기하라는 제이코의 외침에 다들 멍한 표정이 됐다.

지금 여기서 영어든 한국어든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임성철은 제이코 따위 외면해 버리고 이번 사태의 해결책을 쥐고 있는 고주몽에게 재차 읍소했다.

“부탁입니다.”

“그러면 임 과장님이 대답해 보세요.”

“네!”

“왜 그랬어요? 나한테.”

임 과장은 박산호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헤이! 잉글리쉬! 변호인이 입회한 자리라는 걸 잊지 마. 내가 못 알아듣는 내용은 모두 무효니까!”

제이코의 협박 섞인 발언에 임성철은 ‘오케이. 오케이’를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고 대표님은 대왕 전자에 절대 합격할 수 없는…….”

“임 과장!”

박산호 실장이 임성철에게 눈을 부라렸다.

“뭐요? 그럼 죽을 걸 뻔히 아는데, 그냥 멍청하게 있다가 다 뒤집어쓰고 풍비박산 나자는 말입니까?”

“아니!”

박산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야기할게.”

“에?”

“너보다는 내가 많이 알잖아.”

“…….”

제이코는 두 사람의 외침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산호 실장님.”

“네. 고 대표님.”

“실장님은 저와 따로 이야기하시죠.”

“저…… 혼자 말입니까?”

“네. 그리고 임 과장님.”

“네!”

“과장님은 제이코 대표와 이야기를 하세요.”

“아…… 크로스 체크입니까?”

임 과장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돌아가 솥에 삶아지느니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기로 결심한 상태였기에 더 이상 망설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어요?”

“물론입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제이코가 임 과장을 향해 손짓하자, 재빨리 일어나 뒤 따라나섰다.

“마이크.”

“네. 보스.”

“다 내보내세요. 박산호 실장과 단둘이 이야기를…….”

“안됩니다. 저는 동석하겠습니다.”

마이크는 허리춤의 권총을 툭툭 두들기며 절대 외부인과 따로 둘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뭐 그렇게 하죠. 생각해보니 그게 맞겠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회의실은 곧바로 정리됐다.

“실장님.”

“네. 대표님.”

“이야기. 해 보세요.”

박 실장은 이 상무와 형제들 간의 후계 싸움과 그 안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아니요. 남의 집구석 이야기는 관심 없습니다. 내 이야기만.”

“네네. 그게 그러니까는.”

박 실장은 주몽과 관계된 주몽이 인사 발령받았던 이진상의 수행비서직에 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잠깐만요.”

“네. 대표님.”

“그러면 앞서 수행비서를 했던 사람들은요?”

“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겁니다.”

“그건…….”

“죽였습니까?”

대뜸 죽였냐는 질문이 날아들자 박 실장은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됐다.

“아닙니다. 죽이다니요.”

“그러면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는데…… 하나는 적당한 돈을 쥐여주고 비밀유지계약을 쓰는 것이고. 욕심이 많은 놈은 주먹들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협박했다는 말이군요.”

“네. 가족들을 인질 삼아 이야기하면…….”

“계속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죠?”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진상 상무의 사생활을 약점으로 잡고 계속 돈을 요구하는데…….”

“박 실장님. 내가 정말 궁금한 부분이 있습니다.”

“네.”

“왜 이진상 상무는 그런 일을 반복하는 거죠? 자신의 사생활을 그것도 치부가 외부로 드러날 수도 있는데.”

“그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질 않아서 그럽니다. 결과가 정해진 일을 무한 반복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매우 안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 기회가 된 김에 확인하고 싶었다.

“이진상 상무는 스스로 여자나 밝히고 돈 관리도 못 하는 그런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모르겠는데요. 그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룹 내에서 후계 구도만 놓고 본다면 이진상 상무가 가장 앞서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굳이 그런 짓까지 해가면서 자신을 깎아내릴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이 상무가 전자 사장님의 아들이 아니라…… 회장님의 사생아이기 때문입니다.”

“네에?”

나상선이 이진상의 이복동생이었다는 사실보다 더 황당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 상무님의 진짜 경쟁자는 이광수 대왕 전자 사장님입니다.”

“…….”

“대외적으론 이광수 사장님의 장남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건설 이사로 있는 이진형 이사가 친아들입니다. 때문에 이진상 상무는 알게 모르게 심한 견제를 받는 상태입니다. 이 상무가 상갓집 개 행세를 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사보타주 당했을 겁니다.”

재벌가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다고 하지만 이건 진짜 소름 끼쳤다.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후계자 소리를 듣는 건 어디까지나 대왕 전자 사장님이 그걸 용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자질을 문제 삼아 끌어내릴 생각이시죠.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바로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까. 부자간이 아니라 사실은 형제지간이었다는 말인가요?”

“네. 이 상무 입장에선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경영권 싸움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실패한 투자로 위장한 것도 총알을 쟁여두기 위해서였고 말입니다. 이 상무가 망나니짓을 반복한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본심을 숨기려고, 이광수 사장과 다른 이들을 방심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병신 같은 짓을 반복했다는 겁니까?”

그저 성질 더러운 이진상 때문에 수행비서들이 재난을 당한 게 아니라, 감춰진 목적을 위해 철저히 이용해 왔다는 말에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폐기처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님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진짜 심각한 수준이라고 봐야 했다.

“좋아요. 그 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박 실장은 내 앞에 바짝 엎드렸다.

“죽였어요?”

“벼…… 병원에.”

“병원이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박 실장은 조심스럽게 설명을 했다.

“약을 먹이고 중독자로 만든 뒤에 병원에 넣거나, 마약 범죄에 강력히 대처하는 나라로 데려가 밀고를 했다는 말이군요. 예를 들어 필리핀 같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여긴 한국도 아니고. 그 같은 방법을 쓸 수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박 실장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박 실장님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른 방에서 임 과장님이 열심히 떠들고 있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실종 처리를 하거나…….”

“하거나?”

“손을 쓰기 어려우면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후우.”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욱하는 심정을 잠시 내리눌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

“소송은 멈출 수 없습니다. 이미 몇 곳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연락도 받았고, 말입니다.”

“…….”

박 실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내 말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어떤…….”

“명단을 주세요.”

“명단이라면…….”

“수행비서직을 거쳐 갔던 사람들 말입니다.”

명단을 내놓으라는 내 말에 박 실장은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눈치를 챈 것이다.

“내 변호사가 그러더군요. 이런 일은 혼자서 싸우는 것보다 무리 지어 싸우는 게 더 좋다고.”

“고 대표님.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모두가 고 대표님처럼 억울한 입장은 아닙니다. 그들 중엔 애초부터 협박을 목적으로 자료를 수집한 이들도 있었고.”

“당연히 참고해야죠. 철저히 피해자들 위주로 작업을 할 겁니다. 그리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 실장이 슬쩍 나를 올려다봤다.

“살고 싶다면 증언하세요.”

“안됩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자신이 주몽을 묻으려고 했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묻힐 수도 있는 일이다.

“아니면 솥에 들어가 삶아지던가.”

“……!”

나는 박 실장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소곤소곤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박 실장님. 이번 기회에 이진상 상무 손에서 벗어나는 건 어떨까요. 내가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직장에서 라인을 탄다는 것. 숙청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거잖아요.”

“…….”

“라인을 한 번 바꿔봐요. 이진상이 아니라 내 쪽으로.”

라인을 갈아타라는 내 말에 박 실장은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저와 기조실 직원들을 받아주시겠다는…….”

“에이. 그건 안될 말이죠. 나를 그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이젠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내가 고개를 젓자 박 실장은 억울한 표정이 됐다.

“저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막말로 대한민국에서 재벌 비위를 거스르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웃기지 말라고 해요. 아무리 콧대가 높고 허리가 빳빳해도 그거 다 임시직이고 계약직입니다. 하지만 재벌은 아니에요. 누구 하나 죽는다고 무너지는 집단이 아니란 말입니다!”

박산호는 절규하듯 외쳤다.

“박 실장님. 아니. 박산호 씨. 내가 당신을 받아준다면…….”

꿀꺽.

“만약 그런다면 말입니다.”

“…….”

“당신은 나에게 뭘 해 줄 수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 말입니까?”

“아니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묻는 겁니다.”

말뜻이 다르다며 박산호의 말을 정정해 줬다.

“그걸 생각해 봐요. 들어보고 나쁘지 않다면, 그러면 한 번 고민해 보죠.”

나는 박산호의 어깨를 토닥거려주고 의자에 깊이 몸을 뉘었다.

박산호는 내 마지막 말을 소처럼 씹고 또 씹고 되씹었다.

소송이 진행되면 결국 토사구팽을 당한다.

그렇다고 법정에 나가 증언을 했다간 평생을 쫓기듯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방심하는 순간 실종 처리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라인을 갈아탈 수만 있다면!

박산호는 정리가 끝난 듯 결심이 선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기조실은 그룹 내 교통정리를 하는 부서입니다. 그래서 험한 일 더러운 일에 손을 많이 담그게 됩니다.”

“계속해 보세요.”

“임 과장이 말했듯. 저들은 개천의 용을 아주 싫어합니다. 자신들의 규칙에 크랙이 생기는 걸 용납하지 않는 자들이니까요.”

“네.”

“저는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받아주신다면, 방패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칼을 막아 낼 수 있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이게 전부입니다. 받아주실지 말지는 대표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박 실장님.”

“네.”

“박 실장님이 내 쪽으로 오려면 말입니다.”

“네!”

“이진상 상무가 무너져야 합니다. 그가 멀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나도 그렇고 실장님도 피곤한 나날이 계속될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그 말씀은 제가 즈…… 증언을?”

“아니요. 증언은 실장님이 넘겨준 명단에서 충분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분일초라도 빨리 그 사람들을 모아 오세요. 대왕 그룹이 움직이기 전에요! 그게 실장님이 사는 방법이고 저에게 해 줄 수 있는 첫 번째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증언이 아니라 증인을 모아 오는 일이라면. 네.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이겠습니다.”

지난 한 달간, 제이코와 로버트 그리고 경찰국 범죄 수사팀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이진상 쳐내기 작전의 첫 번째 단추가 실수 없이 끼워졌다.

어설프게 건들어 놓고 돈만 받아 챙기는 방식은 수풀 속에 뱀을 풀어 놓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간 내가 겪었던 이진상은 한 대 맞았다고 고꾸라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맘에 들지 않는 인간은 제 성에 찰 때까지 악착같이 괴롭히고 망가트리는 인간이다.

거기다 성질만 더러운지 알았더니, 자신의 대역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방심시킨 뒤, 자신의 동생을 쳐 내버릴 정도로 머리까지 좋다. 이젠 동생이 아니라 조카였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툭하면 투자를 실패해서 어떻게 저런 실력으로 투자를 반복하나 싶었는데, 그 역시 비자금 조성을 위한 눈가림이었다니. 권력을 잡기 전까지 상가집 개 행세를 했던 흥선 대원군이 따로 없다.

그런 인간이.

먹다 버린 사과도 남이 손대는걸 끔찍이 싫어하는 그런 인간이, 딱쇠라 부르며 노예처럼 부리던 나를 과연 웃으면서 놔 줄까?

제이코도 그렇고 로버트의 범죄 수사팀도 고개를 저었다.

주몽이 유명해지고 자신보다 높은 곳에 올라서는 걸 절대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그것도 머리도 좋고 힘까지 넘치는 소시오패스다.

손을 대지 않는다면 모를까.

한국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려면 내가 절대 만만치 않은 놈임을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언터처블 미스터 고.

내가 앞으로 얻고 싶은, 얻어야 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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