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장.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선전포고요?”
임 과장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는데, 박 실장이 임 과장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조용!”
“실장님…….”
“조용히 하라고!”
“네. 죄송합니다.”
임 과장이 놀란 눈빛으로 후다닥 물러서자 박 실장은 제이코를 잡아먹을 듯 매섭게 노려봤다.
“인정하지.”
“뭘 말입니까?”
“고 대리와 에이스 로펌…….”
“말씀을 삼가시죠. 보스는 더는 대왕 그룹의 직원이 아닙니다.”
이번엔 제이코가 매서운 눈빛으로 박산호를 노려봤다.
한 번만 더 자신의 보스를 낮춰 불렀다간 가만있지 않겠다는 표시다.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최선을 다해 따르겠소. 그러니 소송은 없던 것으로…….”
“이런, 어떻게 하죠. 이미 소장이 접수되어버려서.”
“뭐…… 뭐라고?”
협상하자고 해 놓고 이미 소장을 넣어버렸다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여기서 한 마디 더 드리자면, 대왕 그룹에 대한 소송은 미국을 포함 G20 모든 국가에서 펼쳐질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주몽은 한국인이고 대왕 그룹도 한국 기업이다. 미국에서 접수한 소장도 무효화시켜버릴 수가 있다는 말이다.”
박산호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뭐, 일반적으로는 그렇긴 합니다만, 이거 어쩌죠? 보스께서 G20 국가 모두에게 시민권을 받아버리셨네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하. 그렇죠? 저도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 어려운 걸 우리 보스께서 해내셨다는 것 아닙니까. 고로, 미국이든 영국이든 러시아든! 각국 법원에서 전쟁 치를 준비해 두시길 바랍니다.”
제이코가 선언하듯 소송전을 선포하는데, 회의실 안으로 에이스 소속 변호사가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중국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소송까지 갈 이유가 있냐고 합니다.”
“뭐?”
제이코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변호사를 바라봤다.
“내용을 검토한 결과 보스의 억울함이 인정되니 언제든 판결을 내려주겠다고 합니다. 자국민을 노예 취급하고 고혈을 쥐어짠 것에 정부 차원에서 분노하고 있다는 말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변호사의 외침에 제이코가 ‘푸하하하!’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이거야 원. 뭐든 자기들 유리한 대로 판결을 내려서 평소엔 골치 아픈 나라였는데, 우리 편이 되니 이거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제이코는 박산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국이 중국 했다고 하는데, 대왕 그룹에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
“아, 이렇게 되면 G20 법원을 모두 돌아다닐 필요가 없게 되는 건가? 통합시민권을 가진 보스의 법률적용은 어느 나라든 공통적용이 되게 되어있으니. 이걸 판례로 들어 고소하면 그냥 끝나는 싸움이 되겠는데.”
제이코의 중얼거림에 박산호는 물론이고 기조실 직원들은 물론 동석한 변호사까지 다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됐다.
“저쪽에 물 한잔 가져다드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박산호 일행에게 곧바로 물컵이 전해졌다.
“다들 목이 타실 것 같은데. 일단 진정들 하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시죠.”
“실장님.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임 과장이 불안한 눈빛으로 박산호를 바라봤다.
“일단 앉자.”
박산호가 자리에 앉자, 일행도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갔다.
제이코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박산호에게 산뜻하게 말을 건넸다.
“어서 와. 이런 협상은 처음이지?”
* * *
전(前) 재무부 차관이자 현(現) 통합시민권자 전담관리팀의 팀장이 된 알렉스에게 작은 쪽지 하나가 전해졌다.
“이게 뭐지?”
“법원 쪽 직원이 보내왔습니다.”
“정식 서류도 아니고 쪽지를 보내왔다고?”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고주몽 전담부서가 만들어지면서 떠안은 일거리가 산더미인데, 법원까지 숟가락을 얹나 싶어서 짜증이 올라왔다.
돈 냄새가 나면 파리가 끓고 구더기가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라지만 이곳저곳 안 끼는 곳이 없다.
한숨을 내쉰 알렉스는 접혀있는 쪽지를 펼쳐 들었다.
내용을 읽어내리던 알렉스는 당장, 법무부에 연락을 넣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 보내준 직원 다이렉트로 연결해!”
“네. 팀장님.”
알렉스는 쪽지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내렸다.
<통합시민권자 고주몽.
대왕 그룹을 상대로 1억 달러짜리 소송.
각국 법원에 동시 접수된 것으로 확인됨.
보상금 전액
― 한국전쟁 참전용사 지원금으로 사용될 예정.>
이런 쪽지를 받은 사람은 알렉스만이 아니었다.
나라마다 고주몽 전담부서가 만들어졌기에 책임자들에겐 너나 할 것 없이 이 소식이 전해졌다.
재빨리 소장을 확보해 내용을 파악한 담당자들은 고주몽이 소송에서 이길 확률을 70% 이상 점쳤다.
각국 담당자들을 곧바로 상부에 내용을 전달했고 곧바로 답신을 받았다.
<어차피 이길 싸움, 확실히 밀어주도록!>
보상금 전액이 자신들 나라 취약 계층이나 참전용사 지원금으로 책정되었다는데 이걸 못 받아먹으면 병신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 일이니 고민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 * *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는 줄 전혀 알지 못하는 박산호 실장은 어떻게든 이를 무마시켜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이건 소송에 지고 이기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룹 전반에 치명상이 될 수도 있는 글로벌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그룹 이미지 관리를 위해 사용되는 홍보비만 해도 매해 천억이 넘게 들어간다.
이번 일이 매스컴을 타거나 후계자 이미지에 치명상이 되는 날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그랬었군. 그래서 고주몽이 사표를 쓴 거였어.”
박 실장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쪽과 얽히는걸 굉장히 싫어하시던데, 순순히 사표를 수리해줬다면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없습니다.”
제이코는 그런 게 딱히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원하는 게 없는데, 소송한다는 말입니까?”
박산호는 말장난은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냐는 듯 제이코를 바라봤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법원의 판결에 따를 뿐입니다.”
“후우…….”
박산호는 답답한 표정으로 숨을 내뱉었다.
“고 대리를…… 아니, 고주몽 대표를 만나게 해주시오.”
“저는 전권대리인입니다.”
“부탁합니다.”
“흠.”
제이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박산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졌다고 해도 대왕 그룹과 척을 지는 건 고 대표도 원치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지금 협박을 하는 거로 들어도 되는 거겠죠?”
“협박이라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 않습니까.”
박산호가 고개를 흔들며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일단 말씀을 드려보죠.”
제이코는 보안 요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자회견은?”
“거의 끝나갑니다.”
보안 요원은 귀에 꽂혀 있는 리시버를 만지작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10분 뒤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고주몽이 10분 뒤에 도착한다는 말에 박산호는 재차 만남을 요청했다.
“일단 기다려 보시죠.”
기다리라는 말만 남겨놓고 제이코는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제야 꾹 입을 다물고 있던 기조실 직원들이 한마디씩 말을 꺼냈다.
“설마 지금 이거…….”
“고 대리가 복권 당첨자 맞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잖아.”
직원들의 술렁임에 임 과장이 인상을 썼다.
“다들 조용.”
직원들을 진정시킨 임 과장이 박 실장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실장님.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고 대리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지.”
“네? 그렇게 까지요?”
임 과장이 놀란 눈빛으로 박 실장을 바라봤다.
“그러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이미 20개국에 소장이 접수됐고, 곧 그룹 쪽으로도 소식이 전해질 거다. 일이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해.”
“만약 실패하게 되면…….”
임 과장이 불안한 실패를 입에 담았다.
“후계자 싸움이니 뭐니 다 의미가 없어지는 거지. 우린 그 전에 다 숙청당할 테니까.”
“설마 그렇게까지…….”
“고 대리를 입사시켜 상무님 수행비서로 밀어 넣은 게 어디지?”
“기…… 기조실입니다.”
“이번 소송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비화하면 그룹이 입게 될 이미지 비용은?”
“…….”
임 과장은 선뜻 숫자를 내뱉지 못했다. 쉽사리 가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송 비용은 당연하게 들어갈 거고. 소송도 우리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거다. 통합시민권이란 게 정확히 뭘 이야기하는진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피해보상금도 만만치 않게 튀어나오겠지. 그것도 미국 법원뿐 아니라 G20 각 나라에 각각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중복으로 말입니까?”
임 과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고주몽이 20개 국가의 시민권을 얻었다고 하잖아. 그 말은 나라마다 그 나라 법률에 맞춰 우리에게 소송하고 법정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박산호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 그렇게 되면.”
“그룹에서 책임을 질 이유가 없지. 애초에 수행비서직 관리를 위해 일을 벌인 건 기조실이고 책임자는…….”
“실장님과 제가 다 뒤집어쓴다는 말씀이죠?”
임 과장도 뒤늦게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래! 언제 윗사람들이 책임지는 것 봤어? 소송도 그룹이 아니라 우리가 당할 수 있다고. 그게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이니까.”
대왕 그룹에 소송을 걸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일이 벌어진 회사는 대왕 전자다. 그중에서도 이진상 상무 라인!
“그것뿐인 거 같아? 다른 후계자들이 이걸 기회로 삼아 이 상무를 날려버리면 우린 닭 쫓던 개가 되는 거라고. 주인 잃은 개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는 오래도록 봐 왔잖아.”
“고 대리가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무조건 죽는 거군요.”
“그래. 무조건!”
박 실장은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임 과장의 어깨를 꾹 움켜쥐었다.
박산호와 임성철은 고주몽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10분이라는 시간을 1년처럼 흘려보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제이코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박 실장과 기조실 직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고 대표님은…….”
“만나보시겠다고 합니다.”
“후우…… 감사합니다.”
박산호는 제이코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개 로펌이라고 폄하하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회의실 안으로 완전무장한 경찰 특공대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왔다.
흑색의 헬멧에 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고글. 복면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덩치 큰 사내들이 MP4 기관단총을 들고 사방을 에워쌌다.
기가 약한 직원들은 그들의 등장만으로도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는 이가 생겨났다.
“이상 없습니다!”
경찰 특공대가 이상 무를 외치자 이번엔 경찰 정복을 입은 고위급 인사가 회의실에 들어섰다.
에이스 로펌 변호사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로버트의 신분을 알려줬다.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로버트 국장님입니다.”
경찰국 국장. 한국으로 치면 서울지방경찰청장과 맞먹는 경찰 고위 인사다.
“보스. 들어오시죠.”
로버트 국장 뒤로 드디어 고주몽이 모습을 나타냈다.
‘고주몽에게 보스라고? 경찰국장이?’
고주몽이 거액의 당첨자가 됐으며 로펌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정도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놀람이 드리웠다.
“박…… 산호 실장님?”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박 실장의 신분을 확인하자 박산호는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기조실 박산호 실장입니다.”
“임성철 과장입니다.”
두 사람이 재깍 허리를 숙이자, 기조실 직원들은 물론이고 동행했던 변호사까지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아아. 네. 얼굴이 살짝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맞다. 비서실로 발령 나던 날. 그때 한 번 봤었죠?”
“네. 맞습니다.”
박산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죠?”
“대왕 그룹과의 소송전이 시작되면 양측 모두 적잖은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소모적인 싸움을 피하고 양측 모두의 이익을 증진코자, 고주몽 대표님을 뵙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썩어도 준치라 했던가. 반쯤 얼어붙은 임 과장과 달리 박산호 실장은 이 와중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흠.”
내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자, 박산호는 다시 한번 무의미한 싸움이라며 최대한 설득에 나섰다.
“저기요. 박 실장님.”
“네. 고 대표님.”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네.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
“네?”
박산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얼떨떨한 표정이 됐다.
“길어야 6개월. 평균 3개월짜리 수행비서직. 그거 아무리 잘해도 그만둘 때 그만두지도 못하는 자리던데. 나한테 왜 그랬냐고요.”
“…….”
뭐든 대답하겠다던 박산호 실장은 그저 식은땀만 줄줄 쏟아낼 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