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장. 네? 기 싸움이요? 그냥, 화면부터 보시죠.
약속 장소 엘로윈 스타에 들어선 박산호 실장과 기조실 직원들은 로비의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여기서 무슨 일이 있나?”
박 실장의 말에 직원 하나가 재깍 앞으로 달려갔다 왔다.
“기자회견이 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
“네. 글로벌 복권 당첨자 기자회견이라고 합니다.”
직원의 대답에 다들 ‘아!’하는 소리를 냈다.
이들도 대박 행운을 노리고 이번 글로벌 복권 판매 수익에 적잖게 이바지했었기 때문이다.
다들 부러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기자들 쪽을 바라봤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운도 좋군. 얼마라고 했지?”
박산호가 당첨금액을 묻자 동행한 변호사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우리 돈으로 800조가 넘는다고 합니다.”
“우후! 800조라. 상상이 안 되는 돈이군.”
박산호는 가늘게 휘파람을 불었다.
“실장님. 약속 시각이 다 되어갑니다. 올라가시죠.”
기자회견장 입구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박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야지. 어차피 저쪽은 우리완 상관없는 세계니.”
방문자 확인을 마친 박 실장과 기조실 직원들은 로비 안내인을 따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몇 층인지 확인은 했나?”
박 실장의 질문에 임성철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로비에 방문자 확인을 하면 안내인이 알아서 알려줄 거라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건방진 작자로군. 감히 대왕 전자 기조실을 뭐로 보고.”
박산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모두 탑승을 했다. 몇 층으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버튼을 확인하는데 이상하게도 표시된 층수가 오직 하나뿐이다.
박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안내인에게 말을 건넸다.
“몇 층으로 가는 겁니까?”
“아, 이 엘리베이터는 펜트하우스 전용입니다.”
“펜트하우스요?”
박산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껌뻑이더니 임 과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도 잘…….”
임 과장은 당황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엘로윈 스타 로비에서 방문자 확인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로비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가 최상층 펜트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박 실장은 물론이고 기조실 직원들 모두 침묵을 유지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박 실장 일행은 안내인을 따라 복도를 이동했다.
말이 복도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휘황찬란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공간이다.
박산호는 굳어진 표정으로 안내인을 따라 움직였지만, 동행자들은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안내인이 벨을 누르자 펜트하우스 입구는 한치의 소음도 없이 스르륵 부드럽게 열렸다.
“저는 이곳까지입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안내인이 인사를 하고 내려가 버리자 펜트하우스 입구엔 박산호 일행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무래도 초장에 기를 죽이려는 작전인 것 같군.”
박산호의 입에서 기 싸움에 대한 말이 흘러나오자 그제야 다른 직원들도 정신을 바로 세웠다.
“얼마나 뜯어내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임 과장이 혀를 내두르며 펜트하우스를 바라봤다.
이런 곳은 하루가 아니라 시간당 임대료만 해도 엄청 날 것이다.
“문도 열렸는데, 일단 들어가시죠.”
임 과장의 말에 박산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기 싸움을 하고 싶어 하는데 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는 없잖아.”
엘로윈 스타 펜트하우스를 미팅 장소로 잡은 것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하는 사이, 정작 안에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들어오고 저러는 거지?”
기 싸움이니 뭐니 하는 것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이라 박산호 일행의 일단정지에 의아함을 보이는 제이코다.
“펜트하우스에 처음 와 봤나 보네. 가서 데리고 와.”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양측의 대화는 이렇게 오해에서부터 시작이 됐다.
경찰국 보안 요원과 펜트하우스 입구로 나간 변호사는 박산호 일행을 맞이했다.
“대왕 그룹에서 오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박산호가 담담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복도와 입구에 불과하지만, 볼거리가 많죠?”
변호사는 이들이 들어오지 않고 있던 이유를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박 실장과 기조실 직원들 얼굴에 미미하게 불만이 드러났다. 사람을 불러놓고 한다는 소리가 ‘볼거리 많죠?’라니.
농담이라면 질 나쁜 농담이고, 협상 전(前), 기 싸움이라면 사람을 잘 못 봤다고 해주고 싶었다.
대왕 그룹에 몸담은 지 어언 20년. 이 정도 일은 싸움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다.
“들어오시죠.”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선 박산호는 다시 한번 눈이 커졌다.
입구 쪽도 만만치 않았지만, 내부는 그야말로 왕궁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 역시 시선을 뺏기자 박산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에이스 로펌 대표분은 어디 계십니까?”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바로 안내를 해주시죠. 서로 간에 시간 낭비는 원치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변호사는 보안 요원을 바라봤다.
박산호가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보안 요원이 금속탐지기를 꺼내 들었다.
“무례하군요.”
박산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변호사와 보안 요원을 노려놨다.
“간단한 절차입니다. 대왕 그룹이 묘한 수를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말입니다. 뭐라더라, 소송 당사자가 종종 증발하는 일이라고 했던가?”
묘한 수? 변호사의 말에 박산호와 기조실 직원들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곧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임 과장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고주몽 대리의 스파이 혐의를 묻고자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더더욱 협조를 해주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만.”
“이것 보세요!”
“소리를 지르실 생각이라면 그냥 돌아가셔도 무방합니다. 우리 쪽은 협의보다 소송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이스 로펌 소속의 변호사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임 과장. 물러나게.”
“하지만 실장님. 이건!”
“그만!”
박 실장은 자신해서 보안 요원 앞에 섰다.
“빨리합시다.”
박 실장의 말에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보안 요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탐지기를 들이댔다.
빨리하자는 박 실장의 요청과 달리 보안 요원은 어떤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듯 세밀함의 극치를 선사했다. 박산호와 그의 직원들은 무려 30분 넘게 탐지기에 시달린 뒤에야 회의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에이스 로펌 대표 제이코 코엔이라고 합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인 양, 제이코는 박 실장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협상 전에 기 싸움을 벌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군요.”
“응?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제이코는 천진한 얼굴로 박산호를 바라봤다. 제이코를 노려보던 박산호는 크큭 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고 대리의 의뢰를 맡은 입장이니 나름 수를 쓰는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고 대리는 스쳐 가는 고객일 뿐이지 않습니까. 차후 대왕 그룹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적정선을 지키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박산호의 말에 제이코가 콧등을 만지작거렸다.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기만 한 게 아니라. 당연히 멀리 보고 일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대왕 그룹과 적이 되어봐야 에이스 로펌에도 좋아질 게 없으니 말입니다.”
제이코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박 실장 일행을 자리에 앉혔다.
“소송하겠다고 하셨던 분들이 협상을 제안해 오셔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제이코는 가져온 게 있으면 빨리 보여달라는 듯 손바닥을 비볐다.
박 실장도 지지부진하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기에 동행한 변호사에게 눈짓했다. 에이스 로펌이 얼마를 뜯어내려고 고주몽을 움켜쥐었는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말했다시피 대왕 그룹과 적이 되는 것보다 적당한 이득을 보는 선에서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협의가 마무리되고 꼭꼭 숨어버린 고주몽을 밖으로 끌어내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고주몽을 흔적도 남지 않게 깔끔하게 묻어 버릴 생각이다.
“고 대리에게 보상금으로 백만 달러. 에이스 로펌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는 대가로 백만 달러입니다. 그 외 앞으로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왕 그룹의 법률자문으로 위촉을 해 드릴 것이며…….”
대왕 그룹 쪽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제이코는 내용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설명하던 변호사가 박 실장 쪽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냐는 눈빛이다.
“내가 직접 이야기를 하지.”
박 실장이 손을 젓자 변호사는 재깍 뒤로 물러났다.
“제이코 대표. 따로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격이 전혀 맞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우리와 적이 되지 않는 조건일 뿐입니다.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 대왕 그룹의 법률자문이 되면…….”
제이코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그쪽에서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시오. 그다음에 협의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
박산호는 한걸음 물러났다. 이쪽의 패만 계속 까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에이스 로펌 쪽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말에 제이코는 반가운 표정이 됐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반가워하나 싶었지만, 박산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포커페이스가 따로 없다.
“지금 재미있는 기자회견이 있어서 말입니다. 같이 보시고 그다음에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죠.”
제이코의 입에서 재미있는 기자회견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다들 ‘로비에서 그 기자회견?’하는 표정들이 됐다.
“아, 올라오면서 보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오늘 글로벌 G20 복권 당첨자가 뭔가 발표를 할 것이 있다지 않습니까.”
제이코가 손짓하자, 회의실에 따라 들어왔던 보안 요원이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거대한 TV에 전원이 들어오며 1층. 회견장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박산호는 협상 중에 이 무슨 뜬금없는 짓인가 싶었지만, 일단 제이코의 요구에 따라줬다. 사실 자신도 복권 당첨자가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왕 보는 것 볼륨을 높이죠.”
화면만 나오고 소리가 나오지 않자, 임 과장이 볼륨 업을 요청했다.
“아, 이런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기자회견은 사진 촬영이나 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은 내부에 설치된 CCTV 화면이라서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네? 지금 촬영이 금지된 회견장을 CCTV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변호사가 불법적으로 영상을 취득했다는 말에 다들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이런, 오해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엄연히 당첨자분에게 허락을 받고 영상을 보는 중이니 말입니다.”
사진도 영상도 금지된 회견장이다. 그런데 이를 개인적으로 허락을 받았다? 이 말은 당첨자와 에이스 로펌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는 뜻이다.
“실장님.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임 과장은 박산호은 얼굴이 창백해지자 걱정스러운 눈빛이 됐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조…… 조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채지 못한 임 과장과 달리 ‘당첨자의 허락’을 받았다는 제이코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벼락이라도 치는 느낌을 받았다.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고주몽. 일개 회사원을 철저히 보호하려 대왕 그룹과 소송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변호사. 협상 자리를 펜트하우스로 잡았는가 하면, 하필이면 그 건물 1층에서 글로벌 복권 당첨자의 기자회견이 있다고?
조각조각 떨어져 있을 땐 아무 연관도 없는 사건들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회견장 영상을 지켜봐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박산호 실장의 고개가 TV 화면에서 제이코 쪽으로 이동을 했다.
씨익―
눈이 마주친 제이코가 섬찟한 미소로 자신을 반겼다.
“이런, 씨…… 씨발!”
평소 감정 표현이 없기로 유명한 박산호 입에서 툭! 하고 욕이 흘러나왔다.
제이코가 보안 요원에게 손짓하자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꺼버렸다.
회견장을 지켜보며 당첨자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기조실 직원들은 ‘어?’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실장님. 왜 갑자기 그러시는지…….”
박 실장의 감정 변화를 옆에서 지켜본 임 과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박산호는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느낌이다.
그런 박 실장에게 제이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스 로펌의 사주이시며 시가 886조짜리 개인 회사인 GO 컴퍼니의 주인이신 고주몽 님을 대신해 대왕 그룹에 선전포고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