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장. 주변 관리 좀 잘하세요!
호텔로 돌아온 한국 대표단은 삭은 파김치처럼 뒤엉켜 늘어졌다.
그중에서도 실무진들은 죽다 살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는 보유 외환을 지켜냈다는 데 있었다.
글로벌 복권의 당첨금은 기축통화인 달러로 지급이 된다.
다시 말해 복권을 판매한 각 나라는 UN에 판매금을 입금할 때 달러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복권을 발행할 때 예측했던 최대금액을 세배 이상 초과해 버리자 달러 보유에 민감한 국가들은 비상이 걸렸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이 숫자 전문가들의 예측을 사뿐히 지르밟아 버린 것이다.
특히,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그중에서도 심대한 타격이 예상됐다.
과거 외화보유 부족으로 IMF라는 말도 안 되는 사태를 겪었던 한국이었기에 더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콩고물 좀 만져보려다 곳간을 털게 생겼으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들려온 기사회생의 소식.
당첨자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긴급히 청와대에 소집된 경제자문은 하나 같이 같은 결론을 냈다.
<당첨자의 달러를 국내에 예치하거나, 환차익을 보장해서라도 원화를 지급하고 그가 보유한 달러를 챙길 것!>
경제부총리까지 나서서 이번 일을 진행한 것은 이런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천만다행이랄까.
당첨자 고주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요구, 아니 부탁한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는 것에 동의해준 것이다.
가장 골치 아팠던 부분을 넘기고 나자, 나머지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이미 다른 나라들과 공통된 제안이 협의가 이뤄진 이상 한국만 따로 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만하고 넘어가길 천만다행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법무부 장관이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외교부 장관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다른 나라들도 식은땀을 한 사발씩은 쏟았다고 하니. G20 모두 다시는 이런 복권을 발행하지 않기로 협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야죠. 제 발등 찍은 짓이 되었으니.”
“다행히도 말이 통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요즘 젊은 청년들이 국가에 대한 반감이 워낙 강한 탓에 감정적으로 나오면 어쩌나 했는데 말입니다.”
외교부 장관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 소리 마세요! 김덕영 영사와 나관종 의원처럼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자가 또 나온다면 그땐 고주몽 그 사람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제발 주변 사람들 관리 좀 잘하란 말입니다. 망신도 나름이지, 정말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부총리가 한마디 톡 쏘아붙이자 두 장관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안보수석께서는 하실 말씀이 없습니까?”
부총리의 화살이 이번엔 안보수석 박태완에게 날아갔다.
“제가 따로 할 말이 있겠습니까.”
“대통령님의 의중을 받아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그가 국가에 적대적인 사람인지 아닌지 그걸 확인하고자 온 겁니다. 물론 일이 잘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적대적이요?”
부총리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냐는 듯 다시 물었다.
“그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만약의 사태라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외교부 장관이 박태완을 바라봤다.
“고주몽이 국적을 포기하거나…… 아무튼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박태완의 얼굴에 서늘한 눈빛이 흘렀다.
“그가 받은 당첨금을 가족들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했겠죠.”
박태완의 말에 부총리는 물론이고 다른 다 장관도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안될 게 뭡니까. 그 많은 달러가 일시에 밖으로 나가버리면 나라가 통째로 흔들릴 위기였는데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부총리가 언성을 높였다.
“그런 짓에 동의할 수도 없지만, 당신이 한 짓이 외부에 알려졌을 때 어떤 결과가 생겨날지는 생각을 하고 말하는 겁니까?”
“제가 보기엔 여러분들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단순하게 보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죽으면 그의 유산은 가족들에게 돌아갑니다. 만약 가족들마저 없는 외톨이라면 국가에 귀속이 되는 거고 말입니다. 이건 어느 나라를 가도 공통입니다. 누가 이런 일에 문제로 삼는단 말입니까.”
안보수석 박태완의 발언에 다른 세 사람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인사에서 안보수석 자리를 꿰찬 사람이 안보보다 대통령의 의중을 실행하고 다니는데 집중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안보수석답지 않은 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 정도로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일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법무부 장관 나관형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그러시죠.”
“만약에 말입니다. 수석 말대로 오늘 고주몽 씨가 국적을 포기한다고 말했다면…….”
“계획대로 해야겠죠.”
“그러니까. 무슨 수로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진행하겠다는 건지 그걸 말해보라는 겁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에서 밀착 경호를 하고 있고 주변엔 변호사들이 가득합니다. 거기다 아예 펜트하우스에서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무슨 수로 죽이겠다는 거냔 말입니다.”
“그건 비밀입니다.”
박태완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허허. 이거야 원.”
부총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뭘 준비해 놨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진 모르겠지만, G20의 시선이 집중된 인사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니. 이건 미친 걸 넘어 뇌가 없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언뜻 보면 안보수석의 논리가 맞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는 오히려 국가 안보를 헤치는 결정적 한 수가 될 것이다.
고주몽을 죽여 그의 유산을 가족들에게 상속시키겠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어마어마한 상속비가 발생해 국고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근시안적인 계획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국적을 포기한 고주몽이 목숨을 잃는 순간 시민권을 인정한 G20 각 나라가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유산상속? 웃기는 소리다.
자국민을 이유로 들어 고주몽의 당첨금은 갈기갈기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봐야 했다.
그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데 멍청히 상속과정을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 말이다.
한국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통합시민권자를 인정한 19개 국가들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 뜻대로 모든 걸 마무리 지어 버릴 것이다.
왜 남의 나라 국민에게 이래라저래라하냐며 되레 옆 통수를 갈겨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인간이 청와대 안보수석이라고?’
대통령이 이런 지시를 내렸을 리는 없다.
아무리 임기 말 레임덕이 심하다 해도 암살을 통해 정국을 헤쳐 나간다고?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짓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니 말이다.
레임덕을 헤쳐나가고 싶다면 고주몽을 죽이는 것보다 그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백배는 남는 장사다.
부총리는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라보다 자신들이 먼저인 자들.’
부총리는 문득 생각나는 자들이 있었다.
고인 물보다 썩은 물에 비유되는 자들.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 걸 극도로 꺼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자나 회사는 부러트리거나 잡아먹고 보는 자들.
이들이 구축한 사회가 나라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개천의 용이란 말은 이제 사라진 옛말이 되어버렸다.
부총리는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대통령을 만나 안보수석의 위험성에 관해 설명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보수석의 언행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통령의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하수인인 가능성이 컸다.
만에 하나 이런 생각을 지닌 이들이 안보수석 외에도 더 존재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국정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때로는 밖에서 날아드는 총알보다 안에서 터지는 종기 하나가 생명을 위협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왜 우리 앞에서 공개하는 거지? 성공하든 실패하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일 아닌가?’
부총리는 안보수석의 언행에 더욱 의구심이 짙어졌다.
만약 따로 노리는 바가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다른 위험이기 때문이다.
* * *
엘로윈 스타 건물 로비에 각국 기자단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촬영 불가’ 조건이 붙은 기자회견이라는 말에 몇몇 언론사가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세기의 특종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글로벌 G20 복권 당첨자가 언론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간 다양한 루트를 통해 당첨자의 정보를 얻고자 노력했지만, 정부에서 얼마나 꽁꽁 싸매는지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운 좋게 작은 정보라도 손에 넣었다 싶으면 바로 엠바고가 걸렸다.
알 권리를 앞세워 이를 무시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개인정보와 국가 안보를 앞세워 ‘소송’을 들먹이니 가슴앓이 앓듯 끙끙거린 한 달이다.
“우와. 뭐가 이렇게 많이 모였냐.”
“빌리. 오랜만이야.”
“발바리 존. 뉴욕에 있어야 할 인간이 여긴 웬일이냐? 구역 침범은 달갑지 않은데.”
빌리와 존. 한때 타임스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지만 지금은 뉴욕과 LA에서 기자 활동을 하고 있다.
“구역은 무슨. 인터넷 매체까지 모조리 몰려왔는데.”
존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콧방귀를 날렸다.
“그나저나, 사진 촬영 금지라니. 이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소리 같은데.”
존의 구시렁거림에 빌리가 쯧쯧 혀를 찼다.
“머리는 장식이냐?”
“뭐야?”
“너 같으면 얼굴을 공개하고 싶겠냐고. 온갖 잡것들이 다 달라붙으려 들 텐데.”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당연히 응해야지.”
존의 대답에 빌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의 알 권리.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아무 데나 가져다 붙이면 되는지 안다.
“됐다. 너랑 붙어 있다가 똥물 튀길까 무섭다.”
빌리는 존과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다.
“너야말로 그런 식으로 움직이니까 특종을 못 따내는 거야. 병신 같은 놈.”
존은 키득키득 웃음을 보이더니 상의 포켓에 꽂힌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찍지 말라고 안 찍는다면 언론인이라고 할 수 없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얼굴을 감춰?”
존은 사진은 물론이고 영상까지 촬영해 기사를 낼 생각이다.
개인정보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치겠지만, 이미 공개된 얼굴은 어쩌겠는가.
예전처럼 인쇄 매체가 전부였다면 모를까. 요즘 세상은 클릭 한 번에 전 세계가 같은 기사를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때 로비 안쪽에서 경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여든 기자들 숫자가 많다 보니 경찰까지 출동한 모양이다.
“기자분들 입장하시겠습니다.”
입장 시간이 됐다는 말에 회견장으로 들어가려던 기자들은 떡하니 등장한 검색기 앞에서 ‘허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가 공항도 아니고.”
“응하지 않을 분은 돌아가시면 됩니다. 이곳은 엄연히 사적인 공간입니다.”
몇몇 기자들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좋은 기사는 보장할 수 없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이들 대부분은 타블로이드 같은 삼류 찌라시 전문이었다.
다른 기자들은 경찰의 안내를 받아 순순히 검색대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개인 소지품은 박스에 담아 주십시오. 녹음기와 수첩 필기도구는 우리 쪽에서 제공을 해 드립니다.”
“와. 이거 뭐냐.”
검색대를 지난 기자들은 방송용 녹음기와 깔끔하게 양장 처리된 수첩 그리고 필기구를 받아들더니 놀라는 얼굴이 됐다.
“GO 컴퍼니에서 기자님들을 위해 준비한 기념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개인물품 반입 금지라는 말에 몇몇 기자들이 반발하기도 했지만, 기념품이라고 주어진 물건이 워낙 고가의 물품이었기에 다들 큰 불만 없이 물건을 받아들었다.
어차피 사진 촬영이 금지된 기자회견이니 끽해야 녹음 또는 필기 말고는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처럼 검색대를 지나던 존 앞에 경찰 두 명이 막아섰다.
“뭡니까?”
“금지 물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내가 무슨 금지 물품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
존은 어이없다는 듯 경찰들을 헤치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내에서도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상의 포켓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뺏어 든 경찰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우리가 아니라 변호사를 보게 될 겁니다.”
“제길.”
존은 신경질적으로 펜을 받아들더니 박스에 던져 넣었다.
“됐습니까?”
“스마트 폰, 열쇠고리도 내놓으시죠. 아, 넥타이핀도 장난감이시네요? 그것도 포함입니다.”
개인물품 소지 불가로 인해 여러 곳에서 소란이 일었지만, 협조에 따르지 않은 자는 누구도 회견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몇 명은 알 권리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협조하든 아니면 발길을 돌리던 오직 두 가지 선택만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