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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20화 (21/224)

020장. 언터처블이 금의환향을 준비 중입니다.

나는 협상단의 분위기를 말없이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고주몽 씨.”

“아니 왜 벌써…….”

당황한 목소리로 회의실 곳곳에 울려 퍼졌다.

“다들 목이 타신 듯해서. 음료라도 드릴까 하는데요?”

나는 다른 의미가 있어서 일어난 게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무…… 물로 부탁드립니다.”

“네. 그러죠.”

나는 손수 물잔을 준비해 대표단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일단 목들을 축이시죠.”

“네. 그럼 잠시.”

부총리를 비롯해 각부 장관과 눈 껌뻑 두꺼비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사람들처럼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물잔이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이자 나는 주전자를 기울여 다시 물을 채워줬다.

졸졸졸.

물이 출렁이다 못해 잔을 넘쳐 흘렀지만, 나는 물 따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네 잔의 물을 넘치도록 따른 후에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넘쳐 버린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어딘지 냉담해 보이는 말투가 흘러나오자 외교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은 시선조차 돌리지 못하고 그저 탁자만 바라봤다.

“물론 그걸 핑계 삼아 말도 안 되는 제안이나 요청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첫 번째 말과 달리 이번엔 살짝 희망이 보여서일까. 네 사람의 고개가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이동했다.

“제이코 대표는 한국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원론적으로만 모든 사태를 바라보죠.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쪽 실수입니다.”

“저희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진즉에 사과부터 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외교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이 앞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코 대표가 만들어 온 제안서는 뭐랄까. 제가 보기에도 심하다 싶을 정도더군요.”

꿀꺽.

내가 한 마디씩 말을 늘어놓을 때마다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일단 반려했습니다. 승패는 병가에 자주 있는 일이라죠? 사람 하는 일이 모두 한 마음일 수는 없는 거겠죠.”

“보스! 이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재발 방지에 대한 협정과 차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 그에 합당한 보상 또는 책임을 진다는 계약서라도 받아놔야!”

“제이코. 잠시만요.”

“보스. 이건 감정적으로 해결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에 하나 또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땐 보스가 나서지 않더라도 다른 G20 국가가 대외적 항의를 하게 될 겁니다. 보스야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제이코. 제발요.”

나는 그쯤 해 두라며 연신 제이코를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방금 제이코가 쏟아낸 말은 대충 듣고 흘릴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뒤늦게 경제부총리와 각부 장관들도 실수였다느니 앞으로 조심하겠다느니 등의 약속으로 끝낼 사안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통합시민권!’

세 사람은 주몽이 획득한 시민권이 그저 활동적 제약을 벗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미국 시민이 한국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미국 정부가 나선다. 러시아 국민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당연히 러시아도 나설 것이다.

두 나라만 그런가?

G20 국가 중에는 대한민국이 섣불리 상대할 수 없는 최상위 강대국이 여럿 포진하고 있다.

만약 그 나라들이 입 맞춰 항의하거나 이를 핑계 삼아 보복 조치에 나서게 된다면…….

경제부총리는 심각한 눈빛으로 두 장관과 안보수석을 바라봤다.

협상 테이블에 앉았음에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안보수석은 더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현재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지만, 벼락부자 고주몽의 투자 유치를 통해 남은 기간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얻어내고 다음 정권 창출을 위해 여당 친화적 인사로 만들고자 이곳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부총리가 협상단만 들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이코 대표의 말 모두 들었지요?”

“네. 부총리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협상이 우리가 생각했던 투자, 혜택 정도의 문제가 아님도 아셨겠군요.”

두 사람은 나와 제이코의 설왕설래를 지켜보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협상을 잠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통합시민권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것부터 조사한 뒤, 그다음에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합시다.”

부총리의 말에 두 장관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커험.”

부총리는 티격태격하는 나와 제이코에게 헛기침을 날렸다.

“아, 죄송합니다. 부총리님. 제이코 대표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제가 잘 이야기했으니…….”

“아니. 아닙니다. 아무래도 저희 쪽 준비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정도만 다시 시간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네? 왜 갑자기.”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부총리를 바라봤다.

“혹시, 제이코가 한 말들 때문이라면 그냥 무시해도…….”

그냥 무시해 버리라는 내 말에 부총리는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어찌 무시할 일이란 말인가.

김덕영이나 나관종 같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자가 또 생겨났다간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받게 생겼는데 말이다.

이는 더 이상 고주몽이라는, 일거에 벼락부자가 된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자국민(고주몽)의 안전을 이유로 상대 국가를 압박할 수 있는 기묘한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부총리는 몸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아, 이런…….”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일만, 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부총리의 말에 깐죽 대마왕 제이코가 나섰다.

“보스가 시간당 벌어들이는 돈이 20만 달러가 넘습니다. 3일이면 72시간. 돈으로 환산하면 천사백만 달러가 넘어가는군요. 지금 부총리께서는 보스에게 달러를 허공에 뿌려 달라고 요청하시는 중입니다.”

“…….”

부총리가 그게 말이 되냐는 듯 제이코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일에 백오십억이라니!

“그쪽 분은 은행에서 일하시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한국 돈 886조를 그쪽 은행에 넣어 둔다면 시간당 얼마의 이자가 발생할까요?”

제이코의 질문에 은행장 뒤에 있던 직원이 재빨리 계산을 끝내고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어…… 그러니까. 현재 2% 정도의 이율을 적용한다면.”

미국은 소수점 단위인데 한국은 일반 정수 단위다. 이렇게 되면 방금 제이코가 내밀었던 계산서와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 것이다.

“천오백억?”

은행장은 이게 맞는 계산이냐는 듯 직원을 홱 돌아봤다.

“맞습니다. 은행장님. 3일이면 천오백억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될 겁니다. 돈이 불어날수록 이자도 더 불어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 돈을 다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지만, 현재 고주몽이 가지고 있는 돈을 예치시킨다면 계산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 대표단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886조에 대한 이자를 뱉어내려면 그에 합당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대한민국이 통째로 대출에 나선다고 해도 이 돈을 단기간에 소모 시킬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이 돈이 단번에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손을 들거나 갑자기 풀린 돈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두 시간 드리죠.”

제이코는 세 시간도 아깝다는 듯 그새 한 시간을 줄여버렸다.

한국 대표단은 항의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회의실을 벗어났다.

한동안 소란스럽던 회의실이 조용해지자 제이코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제이코 작전대로 하기는 했는데, 이거 충격요법을 넘어 쇼크를 일으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내가 살짝 걱정스러운 눈빛이 되자, 제이코는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보스. 첫 단추를 잘못 끼면 나중엔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런 일은 애초부터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게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 돈을 모두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잘 알잖아요.”

내 말에 투자팀장 조나단 켈트가 입을 열었다.

“보스.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 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다른 나라들도 그걸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투자 요청은 하지 않는 거고요. 만약 보스가 악독한 마음을 먹고 한국의 경제를 망가트리고자 한다면, 가진 돈 일부만 공매도에 사용해도 난리가 날것입니다. 영국의 파운드화를 폭락시켜 금융권을 무너트렸던 제임스 소로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나단의 말에 협상에 참여했던 팀장들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온난화에 감사해야 할 것 같군요.”

내 행운과 천문학적인 현금 자산에 감사할 곳을 이야기하자 다들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제 생각엔 지구온난화가 아니라 그 와중에 수익금을 먹어보겠다고 복권을 발행한 G20 국가 모두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덕분에 제 발등을 찍은 짓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제이코는 한술 더 떠서 이 모든 게 욕심이 부른 화근, 자가당착의 결과라고 했다.

두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본국에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협상 정책을 받아온 한국 대표팀이 다시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협상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부총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제이코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한국은 통합시민권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셨습니까?”

“네.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차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인식을 하셨겠군요.”

“물론입니다. 만에 하나 또다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자가 있다면, 국가전복, 반역에 따르는 죄를 물을 것입니다.”

법무부 장관이 곧바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가도 될 것 같군요.”

제이코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기하고 있던 변호사들과 금융팀장들이 G20 각국과 합의된 공통 사안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협상은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됐다. 솔직히 협상이라기보단 다른 나라에서 인정한 사항들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나는 모든 협상에 있어 상대가 적으로 돌아서기 전까진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제이코의 조언에 따랐다.

종종 몇 개 국가들이 더 나은 제안, 혜택을 들고 오기도 했지만,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반려했다. 형평성에 가치를 둔 협상임을 재차 강조하면서 말이다.

정치를 이야기하실 때면 할아버지께서 매번 하시는 말씀이지만, 먹은 놈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짠물 들이킨 놈은 물에 목맬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잘한 이득 좀 보겠다고 괜히 다른 나라들 몰래 이면계약을 해 봤자, 종국엔 내가 눈치를 보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협상문에 사인을 마친 부총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금의환향해야죠.”

“하하하. 네. 맞는 말씀입니다. 금의환향이죠. 그럼요.”

부총리는 활짝 웃는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늦어도 다음 주면 한국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정확한 일정을 알려주시면 의전에 나서겠습니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안보수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국가의 녹을 먹는 것도 아닌데 말씀만 받겠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부총리가 나서서 재빨리 분위기를 바꿨다.

안보수석이 동행한다는 말에 처음부터 내키지 않아 했던 부총리다.

화기애애하게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가 되고 있는데 안보수석이 재 뿌리는 짓이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아무래도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 고주몽을 통해 뭔가를 노리는 것 같은데, 부총리가 보기에 고주몽은 쉽게 이용할 수도 이용해서도 안 되는 불가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부총리는 죽을 줄 알면서도 호롱불에 달려드는 멍청한 불나방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하. 젊으신 분이 마음마저 반듯하십니다.”

“별말씀을요. 그저 기본에 충실하자고 마음먹은 것뿐입니다.”

내 말에 외교부 장관이 한마디 보탰다.

“하긴, 의전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고주몽 씨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가서 오히려 움직이기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

외교부 장관의 말에 다른 이들도 ‘그건 그렇네’하는 표정이 됐다.

“한국에 들어오시면 청와대에서 초청장을 보낼까 하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보수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아무래도 부담이 돼서요.”

“부담이랄게 있습니까. 그저 대통령님과 식사 자리 정도입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잘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안보수석은 강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이쯤에서 적당히 물러났다.

한국 협상단이 돌아가고 나자 제이코가 곧바로 대왕 전자 소송 건을 이야기했다.

“저쪽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도 보자고 했겠죠?”

“네.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모든 대화나 협상은 대리인인 제가 나설 거라고 하니 일단 그렇게라도 만나자고 하더군요.”

“내 행적을 확인할 수 없으니 애가 탄 모양이군요.”

제이코는 후후.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일 오후 3시. 이곳 펜트하우스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3시면 제 기자회견이 있는 시간인데요?”

“네. 이곳에서 함께 보려고 합니다. 대왕 전자도 소송 당사자가 누구인지 알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표정들이 볼만하겠군요.”

“무릎 꿇고 싹싹 빌면 봐 줄까요?”

제이코가 은근슬쩍 떠보는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그러면 되나요. 저를 파렴치한 산업스파이로 몰았는데 말입니다. G20 각국 법원에 소장 제출하세요. 대왕 전자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19개 나라에서도 재판해야 할 겁니다.”

“네. 보스!”

제이코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박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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