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장. 그런데 말입니다.
펜트하우스로의 이동은 은밀하게 추진됐다.
왈버트 은행장은 무척 아쉬운 눈빛으로 ‘우리 은행에서도 세이프 하우스를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따듯한 눈빛으로 ‘회의실 잘 썼습니다’라고 말해 준 뒤 미련 없이 은행을 빠져나왔다.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 자리 잡은 마천루 ‘엘로윈 스타’ 그 꼭대기에 자리 잡은 250평의 펜트하우스는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기가 눌렸다.
거대한 공간은 둘째 치더라도 내부 실내장식이 가히 궁전에 비할 정도로 휘황찬란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함께 들어선 에이스 로펌의 변호사들과 금융팀, 가드를 맡은 로버트와 경찰국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는 점이다.
나름 잘나가는 그들이라고 해도 이런 어마어마한 공간은 말 그대로 천외천이었다.
제이코의 지휘에 따라 사무기기가 설치되고 협상장으로 사용될 회의실이 마련됐다.
G20 통합시민권이 허가되었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국 대사와 경제관료를 만나 세부 사항을 합의하고 협정문에 서명하는 단계가 남았기 때문에 지금부터가 진짜 싸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펜트하우스에서 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와 협상을 마무리하는 데까지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체감상으론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간 것이다.
처음엔 어리바리한 면이 많았지만, 협상이 끝날 때쯤이 되어선 나도 한 사람 몫을 할 만큼 성장을 했다.
어떤 성장이었냐고 물어본다면 한 단어로 ‘자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게 되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깨달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G20 국가들과 협상은 마무리됐고 이제 남은 곳은 단 한 곳. 내가 나고 자랐던 나라 대한민국만 남은 상태다.
“보스. 한국 대표단이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한국과의 협상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다.
“네. 준비됐습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대한민국 대표단이 회의실로 발을 들였다. 이미 보름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차례가 되지 않아 지금껏 기다린 것이다.
“반갑습니다. 한국 대표단을 이끄는 함상호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경제부총리 함상호가 손을 내밀었다.
“네. 반갑습니다. 도착한 지 보름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예기치 않게 오래 기다리게 한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하하. 아닙니다. 덕분에 기다리는 동안 관광도 하고 나름 좋았습니다.”
순서가 밀려 대기 상태가 길어져서 내심 속이 탔을 것임에도 함상호는 찡그림 없이 미소를 지었다.
“자, 앉으실까요.”
내가 ‘내 편’들과 함께 자리에 앉자 한국 대표단도 함상호를 시작으로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저희 쪽 참가자들을 잠시 소개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함상호는 앉은 순서에 따라 대표단을 소개했다.
“이쪽은 외교부를 맡은 육성철 장관님. 그리고 맞은편에 앉으신 분은 법무부 수장 나관형 장관이십니다.”
나는 각부 장관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분은 청와대에서 나오신 안보수석 안태완 수석이시고.”
안보수석?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어 잠시 고개가 갸웃해졌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외환은행 박정음 행장님이십니다.”
“네. 반갑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G20 복권 당첨자 고주몽입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한국 대표단들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축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국이 마지막 협상국이라는 점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드셨을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나라와 달리 제가 계속 살아갈 땅이기에 좀 더 심사숙고하다 보니 그리된 것입니다.”
“그 말씀은 미국이나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한국에서 계속 지내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외교부 장관 육성철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물론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한국에 있는데, 제가 다른 나라에서 살 이유가 없죠.”
“하하하. 무척 반가운 소식이군요. 대통령님과 국민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들 기뻐할 것입니다.”
법무부 장관 나관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복권 당첨 수익금이나 투자금과는 별개로 주몽이 어느 나라에 자리를 잡는가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이코가 나섰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어떤…….”
모두의 시선이 제이코 쪽으로 집중됐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구두로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일단 국적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제이코의 입에서 국적 문제란 말이 흘러나오자 다들 표정이 환해졌다.
이미 이 부분에 있어선 다른 G20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우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하. 그 부분은 문제랄 것도 없죠. 우리 대한민국 역시 통합시민권을 인정하기로 했으니 말입니다.”
법무부 장관의 말에 제이코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글쎄라니요?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G20에서 인정한 통합시민권을 대한민국도 똑같이 인정하겠다는데.”
법무부 장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한국 국적은 임의로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거죠.”
“그거야 당연히 한국 출신이니…….”
“그래서 문제라는 겁니다.”
제이코의 입에서 계속 ‘문제’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한국 대표단은 답답한 표정이 됐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때 법무부 장관 뒤쪽에 서 있던 실무자 한 명이 ‘아, 혹시……’ 하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대표단의 시선이 곧바로 그에게 몰렸다.
법무부 장관 나관형이 소리를 낸 실무자에게 시선을 맞추며 눈 끝을 찡그렸다.
정일표는 그 시선이 답변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 그게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선 고주몽 씨…… 를 시민으로 맞이하기 위해 다양한 혜택과 제안을 내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딱히…… 크흠.”
정일표 사무관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각부 장관들이 ‘쓸데없는 소릴!’ 하는 표정으로 정일표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특히 안보수석은 정일표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험악한 얼굴이 됐다.
대표단이 그를 바라본 것은 생각을 말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들이라고 그걸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
이미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정했고 그에 맞춰 협상을 진행하기로 모의 테스트까지 한 상태다.
다른 나라에 비해 불리한 점이 있더라도 최대한 모르는 척 이해를 못 하는 척 뭉그적대기로 입을 맞췄는데 사무관 하나가 대뜸 ‘자수’를 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이유를 아는 분이 계시는군요.”
제이코는 씩 웃는 얼굴로 대표단을 둘러봤다.
“하하. 그게 이유랄게 있습니까. 이미 가지고 있는 국적을 다시 배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법무부 장관 나관형이 재빨리 무마에 나섰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제이코가 아니다.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 이곳의 영사 한 분과 국회의원이라는 분이 찾아왔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외교부 장관은 곧바로 오리발 작전으로 나갔다.
“이런, 다른 분은 몰라도 외교부 소속 공무원의 일이니 장관께서는 알고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 이거야 원. 제가 워낙 일이 많다 보니. 사소한 일은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래요? 그것도 이상하군요. 김덕영 영사. 아, 지금은 직위해제를 당했으니 그냥 보통사람이겠군요. 아무튼, 그분이 당일 찾아와 사과까지 하셨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외교부 장관의 지시가 있었다면서 말입니다.”
“…….”
김덕영의 이름과 당시 정황이 그대로 흘러나오자 외교부 장관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아마 김덕영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뚝배기를 깨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무튼, 영사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말입니다.”
“네…….”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 국민의 국적을 말 몇 마디로 빼앗고 돌려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한국 대표단은 당황한 기색이 높아졌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통합시민권을 인정하니 마니 해 놓고 나중에 가서 그 국회의원처럼 ‘무효!’선언이라도 해 버리면 저희 보스께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이코는 ‘신뢰’할 수 없는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며 정치적, 행정적 모순까지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때 같으면 단박에 자리를 차고 일어나거나 외교적 무례를 지적할 일이지만, 문제는 제이코가 공무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의 정치인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자신의 고객을 위해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걸 가지고 따지거나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다고 받아줄 제이코도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국회의원이나 일개 영사가 국민의 국적을 빼앗고 다시 손에 쥐여줄 수는 없다.
이는 이들의 권한도 아닐뿐더러 애당초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당연하다는 듯 저지른 병신들이 존재하니…….
특히, 그 병신 짓을 한 사람이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의 형임을 잘 알고 있는 법무부 장관은 현기증까지 일었다.
“제이코 대표의 걱정스러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작은 오해를 풀고 가야 할 것 같군요.”
법무부 장관 나관형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일단, 영사와 국회의원은 국적을 박탈할 권한이 없다는 점 먼저 말씀드립니다.”
“네? 그럴 리가요. 그 국회의원 이름이 뭐였더라…… 나 관…….”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입니다. 법무부 장관인 제가 장담 아니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들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점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입니다.”
나관형은 자신의 형제이자 사고뭉치인 나관종의 이름이 튀어나오려 하자 사력을 다해 제이코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뭐. 법무부 장관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신다면야.”
제이코가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런 협상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명분인데 시작부터 까이고 들어가니 다들 속이 바짝 타올랐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이코가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다시 말을 뱉었다.
“당시 그 국회의원 말이…… 대한당인가? 아무튼, 한국의 정당 하나가 법안을 발의해서 보스의 신변에 제약 또는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국회의원이 입법부에 속하니 전혀 없는 말은 아닌 듯싶고.”
제이코의 말에 한국 대표단은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이곳에 나관종 의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면 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싶을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어떻게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그것도 삼선이라는 꼬리표까지 달고 있으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다녔단 말인가.
“아무튼, 그래서 문제라는 겁니다. 그나마 있는 시민권도 박탈한다고 하질 않나,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제한할 법안을 제출한다고 하질 않나. 여러분 같으면 주는 것도 없이 미운 짓만 하는 나라에 투자하고 싶겠습니까?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제이코는 이 부분이 보장되지 않으면 대한민국과는 협상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칼같이 선을 그어버렸다.
한국 대표단은 준비해온 시나리오가 시작부터 작살이 나버리자 누구 한 명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서 다시 말실수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협상’이 시작될 것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단의 시선이 하나둘 경제부총리 쪽으로 모였다. 일단 분위기라도 바꿔보라는 눈빛이다.
‘아니 내가 어떻게요?’
부총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장관들을 바라봤다.
‘외교부가 나서면 김영덕이 튀어나옵니다.’
‘법무부가 나서면 나관…… 종이 튀어나옵니다.’
‘예? 저는 그냥 은행장인데요.’
얼떨결에 눈총을 받게 된 외환은행장은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