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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18화 (19/224)

018장. 펜트하우스라고요?

박산호 실장은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이진상 상무의 짜증을 받아내는 일은 심신을 지치게 한다.

“2년이라.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군.”

박산호는 이진상 옆에서 2년을 버틴 고주몽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진상 상무의 수행비서를 맡았다면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길어야 반년이었을 것이다.

평균으로 따지면 3개월이 채 되지 않는 기간이다.

잠깐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피곤한데, 고주몽은 이 생활을 무려 2년이나 이겨낸 것이다.

처음부터 이진상 상무의 수행비서를 이런 식으로 뽑고 관리했던 것은 아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와 비서실 소속이 된 고급 인재들이 이진상 상무 밑에만 가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쓰거나 정서적, 정신적으로 망가져 버리니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자존감이 높은 엘리트 출신들이라 문제가 생겼을 때 처리하기도 벅차고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쓰다 버릴 적당한 물건을 모아서 기조실 관리하에 둔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해 입사한 물건 중에 현재까지 최장 기록을 세운 녀석이 바로 고주몽이었다.

박산호는 수첩을 꺼내 명단을 확인하더니 컴퓨터를 열어 인사과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한 명 밖에 안 남은 건가.”

고주몽처럼 가진 것 없고, 뒤처리할 때 복잡할 것 없는 시골 출신들.

고주몽이 몇 달 버티지 못하고 그만둘 때를 대비해 추가로 입사시켰던 이들의 명단이다.

이진상 상무 전용 비서 3기 입사자들. 고주몽 포함 총 5명을 뽑았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고주몽을 포함해 단둘뿐이다.

고주몽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격 까칠한 이진상 밑에서 무려 2년이나 버텨냈지만, 다른 이들은 일반 사원으로 근무를 했음에도 텃새와 업무 강도를 버티지 못하고 그만둬 버린 것이다.

“하긴, 출신 학교나 스펙을 놓고 본다면 입사 자체가 불가능했던 이들이니. 다른 이들과 경쟁하기 벅찼을 테지.”

박산호는 임성철 과장에게 손짓했다.

“네. 실장님.”

박산호는 모니터 화면을 돌려 임 과장에게 보여줬다.

“고주몽 대리 후임으로 인사발령 내게.”

임 과장은 모니터에 비친 인사 파일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기조실 임성철 과장입니다.”

― 오랜만입니다. 임 과장님. 저 인사과 박호섭입니다.

“이럴 때만 전화를 드리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이진상 상무님의 새로운 수행비서 인사발령 요청입니다.”

― 하하. 별말씀을. 누굴 보내면 되겠습니까.

“자재과 정은영 사원입니다.”

― 지시해 두겠습니다.

이진성 상무의 수행비서 인사발령이라는 말에 인사과장은 두말하지 않고 업무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해서 인사발령을 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묻고 따지고 할 일이 없다.

“고 대리 위치는 파악했나?”

“죄송합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 추적 어플이 깔려 있는걸 알고 있는 건가?”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변호사까지 고용한 상태니, 직접 통화를 꺼려서 전원을 내렸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에이스 로펌이라는 곳은 조사를 끝냈나?”

“네. 여기.”

임 과장은 프린트된 파일을 박 실장에게 건넸다.

에이스 로펌 관련 자료를 확인한 박 실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LA 한인타운의 한인 변호사도 아니고…….”

“네. 저희도 그 점이 좀 의아합니다. 에이스 로펌 정도로 규모가 있는 곳에 의뢰를 맡기려면 수임료 자체가 감당이 안 될 텐데 말입니다.

임 과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거기다, 일반 변호사도 아니고 대표가 직접 통화를 하지 않았습니까.”

“파트너 레벨을 수임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대표가 직접 통화에 나섰다라.”

박산호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임 과장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가 생각을 끝내길 기다렸다.

“미국은 소송 천국이라고들 하지. 한국과 달리 비용도 엄청나고.”

“상대가 대왕 그룹이니 돈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세탁소 주인에게 바지를 물어내라고 천만 달러를 내놓으라는 나라야. 만약 고 대리가 과도한 업무나 인신공격에 관한 내용을 물고 늘어진다면.”

박산호의 말에 임 과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국이라면 모를까. 미국에서 재판이 걸리게 된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수 있습니다. 회사 측에서도 스파이 혐의를 물어 반격에 나서겠지만, 고주몽이 같이 죽자는 식으로 상무님의 사생활 폭로라도 하는 날엔 치정극으로 변할 겁니다. 무엇보다 이쪽 언론에서 냄새라도 맡고 달려든다면 잠재우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을 쓴다고 해도 미국은 미국이니까요.”

“빌어먹을 인터넷!”

박산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과거엔 미국에서 기사가 나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사 내용이 태평양을 넘어오기도 어려울뿐더러 누군가 한국으로 기사를 송고한다고 해도 국내 언론사들은 알아서 허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이 열린 뒤론 달나라에서 기침해도 다음 날 아침이면 개나 소나 다 알아버리니, 사회적 이슈를 컨트롤하는 게 백배 천배는 어려워졌다.

얼마 전, 운전기사 갑질 사건과 항공사 사모님의 막말이 공개되면서 전 국민이 활활 타올랐다.

아직 잔불이 남아 있는 상태인데 재벌 4세 갑질 사건이 다시 튀어나오면 여러모로 그룹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고 대리가 이번 출장을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로펌을 찾아가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 말은 이번 소송을 위해 나름 재판에 내놓을 수 있는 자료도 준비를 했다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이미 지난 일은 중요치 않아. 저쪽에서 정식으로 소송을 하겠다고 했으니 그 전에 일을 마무리하는 게 핵심이지.”

“에이스 로펌의 대표란 자와 직접 만나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소송으로 가기 전 협의로 끝낼 수 있다면 그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고 대리를 밖으로 끌어내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마음 같아선 그 전에 정리해 버리고 싶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로펌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어쩌면 이미 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박산호의 말에 임 과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무님 대역은?”

“그쪽도 이제 한 명뿐입니다.”

“처음 상무님이 대역 이야기를 꺼냈을 땐 엉뚱한 짓까지 벌인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반론의 여지조차 없게 됐군.”

“저희가 줄을 잘 선거죠.”

“훗. 지금도 우리 쪽 사람을 빼곤 모두 속고 있잖아. 너나 할 것 없이 상무님을 무능하고 여자나 밝히는 호색한 따위로 알고 있으니까.”

박산호의 말에 임 과장이 씩 웃음을 보였다.

“네. 대단하죠. 투자 실패를 핑계로 비자금을 그렇게 많이 모아놨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워낙 탕아처럼 돌아다니니 다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거지.”

“그나저나 성질만 어떻게 하면 딱 좋을 텐데 말입니다.”

웃음을 보이던 임 과장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모든 걸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지. 중요한 건 권력 교체와 함께 벌어질 숙청 작업에서 빠져나왔다는 거야.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고.”

“네. 실장님.”

“새로운 수행비서가 대역에 적응할 수 있게 스케줄 잘 잡아. 괜히 들통나서 일 만들지 말고.”

“물론입니다. 2년을 붙어 다닌 고주몽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고 대리처럼 일 저지르지 못하게 꼼꼼히 관리해. 이런 일이 또 벌어졌다간 무능력하다며 우리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로펌 쪽엔 따로 연락을 넣어서 약속을 잡아봐.”

“네.”

“아, 그리고 고 대리 고향 집 쪽에도 사람을 보내놓고. 협상에 도움이 될 부분이 있다면 다 챙겨놔야지. 아무리 저 살자고 도망을 쳤다고 해도 가족들을 무시하지는 못할 테니까.”

“네. 그 부분은 이미 지시를 내려놨습니다.”

임 과장의 말에 박산호는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깜빡할 뻔했네. 혹시 몰래 출국을 할 수도 있으니, 입국장 쪽에 연락 넣어놓도록 해.”

“미국을 떠나 준다면야, 우리로선 땡큐지 않겠습니까.”

임 과장은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큭큭 웃음을 보였다.

“그나저나 미전사 쪽은 둘째 도련님에게 붙은 게 확실한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룹 계열사들의 업무 지시와 관리를 하는 우리와 달리 미래전략사업부는 말 그대로 그룹의 내일을 준비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후계 작업에 가장 영향을 받지 않는 부서인데 괜히 편들기에 나서서 눈총을 받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흠.”

“제 생각엔 둘째 도련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말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후계가 마무리될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야. 나는 물론이고 상무님도 그럴듯한 판단이나 예측이 아니라 팩트가 필요해.”

“네. 더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아가씨는?”

“그쪽은 후계 전쟁에 낄 짬은 아니죠. 아직 나이도 어리시고. 거기다 결혼을 하면 그룹에서 나갈 사람 아닙니까.”

장녀이자 셋째인 이연아.

이제 스물여섯밖에 안된 데다 맡은 일도 유통 쪽이다. 이사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거야 직계 자식들은 모두가 그 정도 위치에 올라있으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래도 그룹 지배 지분을 가지고 있는 건 변함이 없잖아. 둘째 쪽으로 붙지 않게 잘 지켜봐. 승계 전쟁에 이기고도 계열 분리라는 최악의 사태를 격을 수는 없으니까.”

“네. 사람을 추가로 붙여 놓겠습니다.”

“억지로 버티고 계시지만, 회장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길어야 2년. 빠르면 내년이다. 공신 자리 놓치고 싶지 않으면 정신 바짝 차려. 나이 마흔에 그룹 이사가 된다면 부사장, 사장 자리도 금방이야.”

“물론입니다. 실장님.”

임 과장은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 * *

“새 폰입니다. 로펌 명의로 만들었으니 사용하시는 데 불편은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아무래도 기존에 쓰던 폰은 불안해서.”

“네. 그동안 보스가 했던 업무에 비춰볼 때. 그 폰은 위험성이 많습니다. 개인폰도 아니고 회사에서 나온 거고 말입니다.”

제이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폰은 소송의 증거로 사용하면 딱입니다.”

“하하. 증거.”

“네. 아주 중요한 증거품이죠.”

제이코가 씩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보안상 문제나 업무 효율을 위해서 따로 숙소를 마련 중입니다. 곧 연락이 올 테니 그쪽으로 이동을 할 겁니다.”

“숙소요?”

“네. 여기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우리 공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먹는 것도 그렇고 휴식을 취하기엔 적절치 않죠.”

“네. 그런 부분은 제이코 의견에 따를게요.”

“앞으로 어떻게 하시고 싶습니까.”

“아직은 얼떨떨한 기분이 더 많아서. 차차 고민해 봐야죠.”

“언제든 좋으니.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시면 됩니다. 관련 싱크탱크를 만들어 결정을 내리는데, 최선의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싱크탱크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제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법률적인 부분이나, 일반 사항은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면 각 분야에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흐흐. 싱크탱크라니. 꼭 제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네요.”

내 말에 제이코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과거는 더는 중요치 않습니다. 어제의 보스와 지금의 보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 든 ‘힘’이 실리게 되었으니까요.”

제이코는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고 다시 한번 조언을 했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로펌 변호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동 준비를 끝냈습니다.”

“위치는?”

“엘로윈 펜트하우스가 비어 있어서 그곳으로 잡았습니다. 외부인이 많은 호텔보다 보안성 부분에서도 뛰어나고 말입니다.”

변호사의 대답에 제이코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 비어 있을 줄은 몰랐군.”

“네. 운이 좋았습니다.”

엘로윈이 어딘지는 몰라도 펜트하우스가 뭔지는 나도 안다. 적당한 호텔을 잡아 이동할지 알았던 나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됐다.

“펜트하우스요?”

“네. 아무래도 호텔 쪽은 임의로 드나드는 이들도 많고, 팁 몇 달러에 정보를 파는 녀석들도 많아서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일어나시죠. 숙소에 대해선 가는 동안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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