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장. 저기여. 사과 좀 받아주세요. 네?
로버트를 따라 방으로 들어오는 김덕영에게 나와 제이코의 시선이 모였다.
거드름 피우며 찾아왔던 전과는 달리,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다.
“다시 오셨네요.”
나는 의자에 앉은 상태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김덕영은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러니까. 아까는…….”
“헤이! 미스터. 스피크 잉글리쉬!”
김덕영이 더듬더듬 입을 여는데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제이코가 목소리를 높였다.
“크흠.”
제이코의 외침에 김덕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느 곳에서든. 다양한 언어를 쓰는 이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는데. 외교부 소속인 미스터는 그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무척! 궁금하군요.”
“그 점은……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
김덕영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실수’를 언급했다.
“제이코. 그래도 일국의 영사 신분이신데. 살살하자고요.”
“뭐, 보스가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면야.”
제이코는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듯 적당히 물러났다.
“김덕영 영사님.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네…….”
김덕영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고 엉덩이를 붙였다.
“자, 그래서 무슨 일로 다시 오셨는지. 제가 보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아까는 제가 실수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실수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김덕영을 바라봤다.
“고주몽 씨의 국적 선택에 관련해서…….”
“관련해서 뭐가 어떻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제가 공산국가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어느 나라 국적을 선택하든 자유라고 봅니다만.”
“하하. 그렇습니다. 누가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셨는지.”
“네. 오해였습니다. 오해.”
김덕영은 자신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했다며 모든 게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했다.
“지금 그러니까. 오해가 있었다는 말을 하려고 내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말입니까?”
김덕영의 말에 살짝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기껏 다시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실수’니 ‘오해’니 하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느긋하게 말장난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설마,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덕영 하는 짓이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딱히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이쯤에서 미팅을 끝내죠.”
“네?”
만남을 정리하자는 내 말에 김덕영이 반문을 했다. 그래서 나도 반문을 해 줬다.
“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왔는데, 바로 가라고 하는 건.”
김덕영의 말에 제이코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미스터. 당신은 보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말이 심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직접 찾아온 사람 앞에서 시간 낭비라니.”
김덕영이 살짝 기분 나쁜 표정으로 제이코를 바라봤다.
“허허. 이것 참.”
제이코는 헛웃음을 보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보스는 당첨자입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복권 당첨자라는 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대충 들어보니 칠천오백만 달러인가? 뭐 아무튼. 그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원화로 칠팔백억 뭐, 그 정도 되나요?”
김덕영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제이코와 로버트까지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칠천오백만 달러? 칠팔백억 원?
이 사람은 숫자도 셀지 모르는 바보인가?
당장 TV만 틀어도 당첨금 이야기에 야단법석인데, 도대체 어디서 칠천오백만 달러라는 금액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다.
김덕영은 내친김에 한마디 해야겠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뭐, 한국 복권에 비하면 확실히 큰돈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바로 국적 변경을 고민했다는 점에 있어선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고주몽 씨는 한국인입니다. 이민을 생각하기보다는 뭐라도 더 발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직 나이도 젊은데 말입니다.”
제이코가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여는데, 내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보스.”
“잠시만요.”
내가 두 사람을 제지하자 김덕영은 마저 이야기하겠다는 듯 입을 움직였다.
“고주몽 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깟 복권 좀 당첨됐다고 해서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도 자국 영사와 국회의원이 직접 찾아와 도움을 주겠다는데 오히려 예의 없이 굴었지 않습니까.”
“내가 예의가 없어요?”
“그뿐입니까? 어디에 줄이 닿아있는진 모르겠지만, 영사 업무를 직위 해제시키다니요. 이거야말로 적폐라고 생각합니다! 적폐!”
우와. 이 사람 볼수록 헷갈리네.
애국심이 넘쳐서 저러는 거야. 아니면 머리가 모자란 거야? 그것도 아니면 그냥 용감한 건가? 그 와중에도 은근히 썩어 보여서 캐릭터 파악이 쉽지 않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덕영을 바라보고 있자, 제이코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봤다.
나는 김덕영이라는 사람에게서 느낀 생각과 감정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해 줬다.
그러자 제이코도 ‘으흠’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 모두 공감하지는 못하겠지만, 일부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는 뜻이다.
“보스.”
“네. 제이코.”
“저런 사람은 말입니다.”
“네.”
“여기저기 흔하게 널렸습니다.”
“네?”
“적당히 충성스럽고, 적당히 탐욕스러우면서 적당히 부패한 공무원. 보스가 왜 복잡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흔한 캐릭터입니다. 쉬운 말로 고만고만한 공무원 유형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냥 보편적인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그렇고 어쩌면 보스도 그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아.”
범주에 속하는 사람. 변호사 제이코든, 딱쇠 고주몽 또는 당첨자 신분이 된 고주몽이든. 김덕영이 보이는 언행은 가장 보편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소리다.
“공무원이 애국을 빼 버리면 반역자가 되니, 당연히 애국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고. 관료주의라는 게 워낙 서열에 민감한 세계다 보니 일단 자신보다 아래다 싶으면 대충 무시를 하려 듭니다. 고위직 공무원일수록 의전에 집착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죠.”
이 부분은 굳이 관료사회가 아니더라도 조직에선 대부분 겪는 일이다.
“네. 그리고요?”
“그리고 보편적으로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끌거나 반대로 급행처리를 하는 이유는 바라는 게 있거나 이미 원하는 걸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건 법원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니 다른 분야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싶군요.”
“그럼 김 영사가 저러는 이유가.”
“보아하니 직위해제를 당한 모양인데. 그걸 어떻게든 되돌려 보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군요. 제가 보기엔 입바른 소리를 앞세워 자신의 실수를 감추는 타입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제이코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뭐랄까.
돈 좀 있다고 나라를 떠나는 게 정상이냐는 말에 왠지 야단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애국을 내세워 놓고 정작 하는 소리가 ‘국회의원’의 손길을 거절한 것에 ‘예의 없다’라고 표현하다니. 그러면 그 국회의원이 말한 대로 입당이라도 해야 했다는 거야 뭐야.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김덕영 씨.”
내가 영사를 빼고 이름을 부르자 김덕영의 입술이 실룩샐룩 불만을 표출했다.
“방금 그러지 않았습니까. 직위해제를 당하셨다고. 그 말은 더 이상 영사가 아니라는 말이니……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찾아온 이유가 김덕영 씨를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놔라. 뭐 이런 겁니까?”
“크흠.”
김덕영은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외교부에 어떤 라인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작은 오해였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되는 일입니다. 서로 얼굴 붉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훗날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명백한 목적을 가지신 분이 왜 사과가 아니라 ‘오해’와 ‘실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궁금하네요.”
“그거야 당연히 오해와 자잘한 실수…….”
“헤이. 미스터.”
제이코가 나와 김덕영 사이에 끼어들었다.
“칠천오백만 달러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요?”
“보스가 받은 당첨금은 칠천오백 ‘억’ 달러라고.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자꾸 여길 들락거리는지 모르겠는데. 금액이나 제대로 알고 이야기했으면 좋겠군.”
김덕영은 ‘응? 뭐라고?’ 하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한국 돈으로 886조 정도 된다더군.”
제이코는 조금이라도 빨리 금액의 크기를 실감하라는 듯 달러가 아니라 원화로 바꿔 이야기 해줬다.
“파…… 파…… 팔.”
“네. 팔백팔십육조. 맞습니다.”
나는 김덕영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그런…….”
김덕영이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어버버거리는데 제이코가 김덕영의 심장에 쐐기를 박아줬다.
“그리고 보스가 시민권을 얻는 나라는 유엔에서 삼십칠억 오천만 달러의 복권 수익금을 추가로 받게 돼.”
“!”
“수익금 분배 조건 중에 당첨자가 나온 국가에 5%의 수익금을 더 제공하게 되어 있거든. 다시 말해 G20 모두가 보스의 시민권을 인정하게 되면 이십 분의 일로 나눈다 해도 한국 돈으로 4조 5천억을 받게 된다는 소리지. 그런데 그걸 당신과 그 이상한 노인은….”
제이코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받게 될 돈을 굳이 찾아와서 단숨에 날려버린 거야. 직위해제? 두 사람이 미국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렸을 일이야.”
제이코의 팩트 폭언에 김덕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게 끝이 아냐. 시민권을 인정한 국가엔 보스가 개인적으로 1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그것도 날아가 버렸네. 그게 끝인 거 같아? 현금 자산 칠천오백억 달러 사나이의 국적 박탈이라니. 진짜 어이가 없군. 대통령이라도 그런 짓을 했다간 당장 목이 날아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데, 미스터는 생각은 어떠신지 진심으로 궁금하군.”
“그… 그게. 그러니까.”
“그런 짓을 해 놓고도 아주 당당하게 여길 찾아와서는 오해니 실수니 하면서 내 보스를 부패한 시민으로 몰아붙이다니. 보스 말대로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위에서 제재를 받을 정도였다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보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김덕영의 얼굴은 창백해지다 못해 푸르탱탱해졌다.
“슈…… 슈퍼볼 복권이 아니라…… 글로벌…….”
“네. G20. 글로벌 복권. 그 당첨자가 바로 접니다.”
“끅!”
김덕영은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제야, 장관이 직접 전화를 해서 노발대발 당장 찾아가 사과를 하라던 말이 이해가 됐다.
슈퍼볼도 당첨금이 굉장한 수준이지만, 그래봤자, 개인의 ‘부(富)’다.
하지만 글로벌 복권은…….
“저….”
김덕영이 곧바로 사과하려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변호사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팩스가 들어왔습니다! 러시아입니다.”
제이코는 팩스를 전해 받더니 곧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보스. 러시아에서 이 시각부터 보스의 러시아 국적을…… 아, 정정하겠습니다. G20 통합 시민권을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제이코의 말에 로버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기. 제가 사과를…….”
김덕영이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재차 사과를 입에 담으려는데 또다시 변호사 한 명이 뛰어들었다.
“보스! 이번엔 미국입니다. 알렉스 차관이 국무장관과 직접 방문을 하겠다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국무장관이 직접?”
제이코가 확인하듯 물어보자 변호사가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렉스 차관과 직접 통화를 했습니다. 국내 투자 관련에 대해서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답니다. 알렉스 차관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넣었던 제안서보다 더 나은 조건도 가능하다는 듯 뉘앙스를 보였습니다.”
김덕영은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직접 찾아온다고? 고주몽을 만나기 위해서?
김덕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돼.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내 인생은…… 끝장이야!’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수익금뿐 아니라 주몽이 받은 당첨금을 자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젠장, 이런 상황이면 제대로 설명이나 해주고 사과를 하라고 하던가!’
만약, 자신 때문에 주몽과 관계가 틀어진다면…… 공무원 생활은 물론이고 정치권에 발을 담가보려던 자신의 모든 계획이 단숨에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계획 따위는 의미가 없다. 그냥 인생이 날아가게 생겼다.
그나마 가진 재산이라도 지키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던 장관의 마지막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정부는 정부대로 나에게 책임을 내 던질 것이고, 고주몽은 고주몽대로 나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해야만, 아니 성공시켜야만 했다.
“고주몽 씨! 제 사과를!”
“보스! 영국입니다.”
“보스! 독일에서도 팩스가 들어왔습니다.”
“고주몽 님! 제가 무릎을 꿇고!”
김덕영이 간절한 목소리로 무릎을 굽히는데, 회의실 쪽에서 ‘와!’하는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어딘데 환호까지 질러?”
제이코는 답답해서 안 되겠다는 듯 나를 끌고 회의실 쪽으로 달려갔다.
“고…… 고주몽 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김덕영은 다급한 얼굴로 용서를 외쳤지만, 재차 터져 나오는 환호 소리에 사뿐히 묻혀버렸다.
“보스. G20. 각국에서 물밀 듯이 팩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 같이 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입니다.”
변호사들의 계속되는 외침에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빠르게, G20 국가 모두가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곳 정도는 문제를 삼거나 반대를 할 줄 알았는데…….”
“그러고 싶어도 못하는 겁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다른 나라에 돈을 밀어주는 꼴이 나니.”
“제이코. 고마워요.”
“하하. 그걸 왜 나에게 고마워합니까. 역제안을 하자고 한 것은 보스였지 않습니까.”
제이코 역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진짜 세계 시민이 자신의 눈앞에서 탄생한 것이다.
“저…… 저기. 저 좀…….”
제이코와 손을 맞잡고 서로 축하를 주고받는데, 누군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누구?”
“접니다. 저 김덕영입니다.”
“아. 아직 안 갔어요? 서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에발! 살려주십시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대한민국은 고주몽 님의 고국 아닙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김덕영은 목이 찢어지라 큰소리로 사과를 했다.
“오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제이코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김덕영을 바라봤다. 마치 그 정도 사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시…… 실수를.”
“아, 맞다. 자잘한 실수였다고도 했던 것 같고.”
이 아저씨가. 사과를 받는 사람은 난데, 왜 자기가 더 신나서 저러는 거야?
“제이코. 그쯤 해 둬요. 저러다 심장마비 오겠어요.”
“크흠. 뭐. 보스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내가 제이코를 말리고 나서자 김덕영의 얼굴에 아주 조금. 보일 듯 말 듯 핏기가 돌아왔다.
“고주몽 님…….”
김덕영이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김덕영 씨.”
“네. 네!”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나요.”
“네? 아!”
내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던 김덕영은 금세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고주몽 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니, 앞으로 고주몽 님을 위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방금 전까지 죽는 소리를 하더니, 얼렁뚱땅 엉겨 붙으려고 하시네.
“아니요. 거기까지는 필요치 않고요. 적당히 내 일 좀 봐주시면 좋겠는데.”
“물론입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김덕영은 기합이 잔뜩 든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제이코.”
“네. 보스!”
“여기 김덕영 씨랑. 외주계약서 하나 작성해주시겠어요.”
“호! 외주계약서입니까?”
“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해두고 싶은 게 있거든요.”
“최상의 계약서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제이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김덕영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