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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16화 (17/224)

016장. 뒤끝 있는 분.

제이코가 법정에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먼저 끊어버리자 박 실장은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뭐야? 뭐라는데?”

이진상이 신경질적으로 박 실장을 바라봤다.

“소송하겠답니다.”

“지금 딱쇠가 나한테 소송을 걸겠다고 했다고?”

이진상은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하는 표정으로 박 실장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고 대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습니다.”

“아 놔. 안 그래도 일진이 사나워서 짜증이 폭발할 지경인데, 별것이 다 사람 신경 쓰이게 하네.”

이진상은 신경질을 내다 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프잖아!”

이진상의 외침에 그의 어깨를 소독하고 있던 직원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하여간 제대로 된 것들이 없어.”

이진상은 반쯤 벗고 있던 상의를 추켜 올렸다.

“진선이는?”

“찾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연구소가 그렇게 됐으니.”

박 실장은 어려울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것들이 총질을 해도 미련하게 해서는. 돈은 돈대로 날리고, 연구 자료는 불에 탄 데다가 진선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안 되고. 어우, 짜증 나!”

이진상은 온더록스 잔에 얼음도 없이 위스키를 한가득 들이붓더니 숨도 안 쉬고 들이켰다.

“그래도 그만하시길 다행입니다. 자칫했으면 총알이 어깨에 박힐 뻔했습니다.”

이진상은 자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만지더니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돈 뽑아다 하려던 실험이 뭔지는 결국 밝혀내지 못한 건가?”

“진선 도련님이 워낙 꼼꼼하게 움직이시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쯧. 이제 와 아쉬워 해 봤자지. 어차피 다 날아가 버렸으니 진선이 놈도 헛발질한 셈이니까.”

이진상은 쌤통이라는 듯 킥킥 웃음을 흘렸다.

“진선이 그 자식. 완전히 개털 된 거 맞지?”

“네. 그 연구소에 모든 자산을 다 쏟아부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궁금하네. 도대체 무슨 실험이었기에 그 많은 돈을.”

“고 대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내 비위 하나는 잘 맞추던 놈이었는데. 어쩌겠어. 살려주고 싶어도 알아서 죽겠다고 나불거리니. 적당히 처리해서 묻어버려. 괜히 일 키우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박 실장은 평소대로 처리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비서실 직원들을 꺼내 들었다.

“뭘 물어봐. 배신자들은 배신자답게 정리하면 될 일인데.”

“연구소 수행 중에 사고를 당한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냥 박 실장이 알아서 하면 안 되나? 꼭 어떻게 죽일지, 어떻게 정리할지 내가 다 들어야 하냐고!”

박 실장은 송구하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론 제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쫌! 그렇게 하라고.”

이진상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자 박 실장과 기조실 직원들 모두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딱쇠 이 새끼는 적당히 여자애들 관리나 하면서 꿀이나 빨 것이지. 뭐 좋은 일 있다고 기어나가서는. 막상 없으니까 아쉽잖아.”

겁대가리 없이 그만둔다는 말에 처리해버리라고 하긴 했지만, 옆에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24시간 몸종처럼 딱 달라붙어서 소소한 것까지 시중을 들던 주몽이 없으니, 당장 술 한잔 마시는 것도 자신의 손으로 따라 마셔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진선이 녀석은 확실히 쳐 낸 것 같으니, 그걸로 남는 장사를 했다고 치지 뭐. 이제 두 녀석만 무릎 꿇리면 되는 건가. 그냥 조용히 알아서들 고갤 숙이면 얼마나 좋아. 꼭 이렇게까지 서로 총질을 해야겠냐고. 노친네가 노망이 나서는 여럿 피곤하네. 어차피 물려 줄 것 속 시원하게 밀어주고 저세상 가주면 얼마나 좋아. 에이, 귀찮아.”

* * *

대통령의 허락도 없이 주몽의 국적 박탈을 운운했던 두 사람은 은행을 나서다 말고 각각 울리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아니, 장관님께서 어쩐 일로.”

전화를 받아든 김덕영은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외교부 장관임을 알게 되자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김덕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네? 누구요? 고주몽이라면…… 그 복권 당첨자 말씀입니까?”

― 당신이 무슨 권리로! 자국민의 국적 박탈을 선언한단 말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그자가 먼저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 닥치시오! 당신은 지금 이 시간부로 직위해제가 되었으니 그리 아시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직위해제라니요.”

― 모든 화의 근원은 입에서 나온다는 걸 지금 그 나이 먹도록 깨우치지 못했다니. 한심할 뿐이오.

“장관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 오해는 무슨. 그리고 경고하는데, 만에 하나 고주몽 씨와 관련된 그 어떤 정보라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아야 할 것이오. 내 경고를 우습게 알고 다시 입을 놀렸다간 직위해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될 것이오. 알았소?

“…….”

― 왜 대답이 없는 거요!

“아…… 알겠습니다.”

― 지금 당장 고주몽 씨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던 바짓가랑이를 잡던 꼭 사과를 청하시오. 그나마 가진 재산이라도 보전하고 싶으면 말이요.

외교부 장관은 잔뜩 성난 목소리로 악을 지르다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게 지금 무슨…….”

김덕영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봤다.

대한당 3선 의원 나관종 역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질 않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당의 중진에게 이래라저래라할 권한은 없어!”

― 물론입니다. 의원님. 그래도 청와대에서 자중을 요청해 왔으니…….

“자중은 무슨. 됐네. 임기 말 레임덕에 그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신경 쓸 것 없으니 그리 알고 들어가게.”

― 의원님.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은 더는 건드리지 말라는…….

나관종은 듣기 싫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관종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김덕영을 바라봤다.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김덕영이 가지고 온 정보 때문이다.

“이게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당첨금이라 봐야 칠백오십억이라고 하지 않았나. 겨우 그 정도 돈 때문에 정부가 나설 일인가 이 말일세!”

나관종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직원 말이 당첨자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씨티은행에 일을 보고 왔던 영사관 직원이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랍시고 헐레벌떡 전해 준 말이다.

말을 전하는 직원도 반쯤 횡설수설 해대는 통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한국인 복권 당첨자가 다른 나라 그것도 여러 곳의 시민권을 얻으려 한다고 했다.

돈 좀 생겼다고 당장 국적을 바꾸려 한다는 말에 내심 괘씸하기도 했고, 이걸 이용해 슬슬 구슬리면 짭짤한 용돈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나관종 의원이 업무차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가 영사관에 들른 상태였기에 혹, 점수라도 딸까 싶어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깟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군. 혹시, 고주몽인가 하는 그자가 재벌가 자식이라도 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덕영은 아무리 그래도 칠백오십억이 그깟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은 아니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서로 바라보는 돈의 규모가 달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말이 없어?”

“그건 아닐 듯합니다. 재벌가 일원이 왜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얻으려 한단 말입니까.”

“내 말이!”

나관종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연신 씩씩댔다.

“저기 의원님.”

“왜?”

“저는 다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덕영의 말에 나관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돌아가? 어딜?”

“장관께서 지금 당장 고주몽 씨에게 사과하라고…….”

“그 버릇없는 놈에게 뭘 해?”

나관종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김덕영을 바라봤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하지만…….”

“하지만 뭐?”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김덕영은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나관종의 눈치를 봤다.

자신을 직위해제 시켜버리고 사과를 명령한 장관도 무섭지만, 차후 정치권에 발가락이라도 들이밀려면 3선 의원이며 대한당 실세로 통하는 나관종의 도움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국적을 유지하며 버텨온 김덕영이다.

“그래서 나보고 같이 들어가 그놈에게 고개라도 숙이자는 건가?”

“의원님까지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됐네. 나는 영사관으로 돌아갈 테니. 영문도 모르는 사과는 자네나 실컷 하게!”

나관종은 기분이 잔뜩 상한 얼굴로 은행을 나가버렸다.

나관종을 따라 영사관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장관의 지시대로 사과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던 김영덕은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엔 고주몽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관이 그렇게 난리를 칠 정도면 이유를 떠나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직위해제를 당했던 말든,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김덕영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 * *

사표 한 장 쓰는데, 소송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상대로 자신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는 걸 확인하니 그간 가지고 있던 우려가 그저 단순한 걱정만은 아니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제이코는 변호사들과 함께 내가 겪었던 2년간의 사건 사고를 꼼꼼히 기록하며 소송 준비를 시작했다.

각국 담당자들에게 제안서 관련 연락이 오기 전까진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다들 내 사표 수리 소송에 참여했다.

“이런 일은 상대가 치고 나오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가서 정신없게 만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이코의 말에 변호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그나저나 보스의 미국 시민권이 하루라도 빨리 나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보스의 시민권이 나오기 전에 저쪽에서 먼저 작업을 하면 한국 법원에서 한국 법으로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불리해집니다.”

“대왕 그룹은 미국에서도 적잖은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에선 거의 왕이나 다름없으니.”

변호사들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일이 없다니요?”

제이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대왕 그룹은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는걸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그 말씀은…….”

“소송 당사자가 없어지면 법정에서 볼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변호사들은 설마 하는 표정이 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겠냐는 눈빛들이다.

이 사람들이 재벌그룹 무서운지를 모르네.

한국의 재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뒤처리 전담을 두고 있다.

내 업무가 진상이 똥 닦는 일이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피를 닦고 다닌다는 소리다.

한국 재벌들이 부리는 조폭 또는 전직 정보요원이나 군인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자 제이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뭐든 조심하는 게 좋겠죠. 로버트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그때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온 로버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왜 실실 웃는 거지? 밖에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로버트를 바라봤다.

“영사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영사라면 아까 그 사람 말입니까?”

“네. 그런데 아까완 달리 표정이 상당히 굳어져 있더군요. 식은땀도 적잖게 흘리는 것 같고.”

“정부에서 연락이라도 받은 모양이군요.”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만나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씩 웃음을 보였다.

“싸우자고 온 것도 아닌데, 굳이 쫓아낼 것까지는 없겠죠. 옆방에서 볼게요.”

“네. 데리고 오겠습니다.”

제이코는 재미난 구경을 하게 생겼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시게요?”

“당연히 그래야죠. 한국말 외에는 절대 쓰지 않겠다는 미스터께서 오셨다는데.”

제이코와 인연을 맺은 게 아직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많은 것을 알진 못하지만, 이거 한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이 아저씨 은근히 뒤끝 넘치는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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