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장. 네. 소송하세요.
후련하다. 정말 후련해!
생각의 전환이라는 게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내고 인류 역사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걸 직접 해 보는 것은…….
정말, 그냥 알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맛보게 했다.
“쏘 쿨!”
나의 외침에 제이코와 로버트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보스. 솔직히 이야기하면 말이죠.”
제이코가 얼굴 가득히 웃음 주름을 만들며 ‘솔직히’를 들먹였다.
“네. 제이코.”
“저야말로 해 보고 싶었던 문자입니다.”
“제이코가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야 월급쟁이 신세였지만, 제이코는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나에게 로펌을 넘기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 에이스 로펌의 대표이자 결정권자가 이런 소리를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변호사라고 하면 다들, 오오! 와우! 멋지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합니다. 고객들의 처지를 대변하고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승리로 이끌다 보면 정말…….”
제이코는 후우― 숨을 내 뿜으며 말을 이었다.
“성질 같아선, 그냥 감옥에 가라고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직업 병, 윤리적 갈등. 뭐 이런 건가요?”
“비슷합니다만, 제가 정말 힘이 있고 제가 생각하는 바를 스스럼 없이 밀어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꼭 저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벼락 치듯 나타난 보스는 저에게 치트키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뭐든 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죠.”
제이코의 말에 로버트 역시 같은 심정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애들만 아니라면,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그런 고민 없이 일할 수 있으니. 저도 속이 후련합니다. 이것저것 얽히고설킨 관계를 고민할 필요 없이. 오직 보스 입장에서만 고민하면 되니 말입니다.”
제이코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현대의 법 조항은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두 가지요?”
“네. 하나는 가진 자들을 위한 법. 다른 하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반동을 피울 수 없게 달래는 법이죠.”
나는 제이코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국에서 로펌을 운영할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사는 변호사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국민은 개, 돼지라 했던 어떤 이의 발언과 맞먹는 막말이다.
내가 놀라든 말든 제이코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신경질적인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 역시 그 간극을 절묘하게 유지하며 만들어질 수밖에 없죠. 그 절묘한 부분이 바로 공감적 법 조항 또는 법 집행력입니다. 겉보기엔 모두가 평등한 법 적용을 받는 듯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진흙탕이란 말로도 부족하죠.”
속도위반으로 딱지 하나만 날아들어도 한 달 생활비 계산을 다시 하며 끙끙대던 나다.
평범한 구성원으로 살아온 나에게 있어 제이코의 말은 파격 그 이상의 것으로 들렸다.
한 번도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법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기존의 법을 바꾸거나 새로운 법을 만들 힘은 없죠.”
“그건 정치인들이.”
“네. 정치인들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정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 기득권 레벨에 올라선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든 간에 그건 부정할 수 없죠.”
“그렇기는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어떤 법을 만들든 간에. 미국에선 로비를 빼고는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자를 위한 것이든, 아니면 다수의 약자를 위한 것이든 말입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로비가 합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게 심한가 싶어 다시 물었다.
“로비가 차지하는 영역이 그렇게 큰가요?”
“대화 자체를 거부하던 알렉스가 왜 제안을 받아들였겠습니까. 그 역시 로비의 영역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보스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로비를 ‘파워싸움’ 또는 ‘기득권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인, 그중에서 한국인인 나는 로비니 뭐니 하는 단어는 굉장히 부정적으로 들렸다.
정치권에서 로비와 관련된 온갖 비리가 발생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로비’가 사용되는 것 같았다.
제이코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앞으로 나와 내 돈을 지키기 위해 ‘로비’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거 내 삶에 얽매여 이해하려 들지 말자. 모르면 배워야 하고,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써야 할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자.’
로비와 관련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려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제이코의 스마트 폰이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제이코가 폰을 들어 나에게 보여줬다.
“문자를 확인했나 보군요.”
“제가 받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먼저 받을게요. 듣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나는 방긋 웃는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 폰을 켰다. 그러자 제이코가 녹음 버튼을 슬며시 눌렀다.
― 고주몽?
통화가 연결되자 대뜸 내 이름부터 날아든다.
“네. 이진상 상무님.”
― 너 뭐야? 미쳤어?
“제정신입니다.”
― 하, 어이가 없네. 너 지금 어디야?
“알아서 뭐 하시게요.”
― 알아서 뭘 해? 야!
이진상 전매특허 ‘야!’가 날아든다.
제이코가 말했던 것처럼 적이 되기 전까진 예의를 지키는 게 기본이라는 생각에 어지간하면 좋게 마무리를 짓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
“왜!”
― 왜…? 너 이 새끼. 미쳤어? 뒤지기 싫으면 당장 튀어와라.
“됐다. 일 그만둘 거니까. 다시는 보지 말자.”
― 죽고 싶냐?
“죽고 싶냐고?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 너 이 새끼!
“욕 좀 그만해라. 어떻게 뱉는 말의 절반이 욕이냐.”
― 박산호 실장 불러와!
박산호 실장? 설마 기획조정실 박산호 실장을 말하는 건가? 그 사람이 왜 미국에 있는 거지?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진상이 대왕 전자 후계자 소리를 듣고 있지만, 기획조정실은 엄연히 대왕 그룹 회장 직속 조직이다.
이진상이 임의로 부르고 말고 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란 소리다.
― 네. 상무님. 무슨 일이십니까.
스피커 폰에서 박산호 실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고주몽이라고 내 구두 닦던 놈이 있는데. 그 자식이 허락도 없이 일을 그만두겠다네.
하여간 말을 해도. 내가 아무리 비서실 잉여였다고 해도 구두 닦기로 소개하는 건 좀 그렇잖아. 그리고 솔직히 말해 구두가 아니라, 네 뒤를 닦아줬잖아. 얼렁뚱땅 말을 돌리면 안 되지.
― 고주몽 대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박 실장이 나를 알아? 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업무나, 직위를 생각할 때 기획조정실 실장님이나 되시는 분이 알만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산호 실장이 있는 위치에서 내가 있는 위치까지 대왕 사람을 끼워 넣는다면 최소 십만 명은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간극이 크다.
다시 말해 내가 박산호 실장의 이름을 알 수는 있어도 박 실장이 나를 알 경우는 로또에 당첨될 확률 정도랄까.
― 그 새끼 말고 또 누가 있어.
― 지금 통화 중이신 겁니까?
― 그래.
―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박산호 실장이 전화를 넘겨받는 소리가 났다.
― 고주몽 대리?
“아. 네.”
― 만나서 이야기하지.
“실장님과 제가 만날 이유가 있습니까?”
― 그만둘 때는 두더라도 마무리 지을 일이 있지 않나. 업무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말이지.
마무리 지을 일이라. 내가 딱히 일이라는 걸 했어야 마무리를 짓지. 인수인계? 여자들 목록 말인가?
“상무님의 금요미팅 목록은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인수인계랄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 그런 이야기가 아닌지 알 텐데.
“아니요. 그게 전부입니다. 상무님이든 실장님이든 다시는 보고 싶지 않군요.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통화를 끝내겠습니다.”
설설 기어도 부족할 놈이 뻣뻣하게 이야기를 해서일까? 박 실장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생각이 부족한 건가?
“겁을 낼 이유도 없고, 딱히 부족한 것도… 이젠 없군요. 끊겠습니다. 사표 수리나 잘 해주십시오.”
― 전화를 끊는다면, 후회하게 될 거네.
“후회라.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 후회를 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일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 후환이라고 해 두지.
그래. 이 말을 기다렸다. 제이코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면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말조심을 했겠지만,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면 당연히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지.
“실장님.”
― …….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러니…….”
― 조용히 사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네. 지금처럼 상무님 비서로 살아가던가. 아니면 서로 간에 불편한 만남이 이뤄지는 것뿐이지.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 협박이라. 자네 정도에 협박까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군.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이쪽으로 오게.
“저를 죽이기라도 하시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 못할 것도 없지.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더는 제가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 변호사와 이야기하시죠.”
― 변…… 호사?
박 실장이 잠시 멈칫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사표 한 장 쓰기가 이렇게 어려울까 싶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도움 주실 분을 모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혹, 전화를 끊는다면 후회하실 일이 발생할 거라고 분명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통화가 연결된 상태로 제이코에게 방금 나눴던 대화 내용을 알려줬다.
한국말을 모르기에 담담한 표정으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제이코는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을 협박 중인 박산호 실장에게 곧바로 경고성 멘트를 날리는 제이코다.
“나는 에이스 로펌의 대표 제이코 코엔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는 변호인 입회하에 녹음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
“당사자 간의 대화이기에 이는 합법적인 녹음이었음을 말씀드리며, 의뢰인과 의뢰인 가족을 대상으로 살해 협박을 한 점에 대해서…….”
― 에이스 로펌이라고 했습니까?
“네.”
―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잠시 뒤, 다시 박 실장의 말이 들려왔다.
― 네. 확인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로펌이 맞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말씀하시죠.”
―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의뢰를 맡은 겁니까?
“아, 물론입니다.”
― 알면서도 의뢰를 맡았다는 말입니까?
“문제라도 있습니까?”
― 지금이라도 수임을 포기하시길 바랍니다. 대왕 전자, 아니 대왕 그룹과 싸우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지금 당신이 의뢰를 받은 그 사람은 대왕 전자의 기밀을 유출한 자이며 그를 빌미로 거액을 요구하는 중입니다. 의뢰를 계속 맡게 된다면 에이스 로펌에 치명적 피해가 갈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나와 제이코는 박 실장의 대답에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기밀을 유출하고 돈을 요구해?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그렇습니까? 우리가 받은 의뢰는 노동법 위반과 그에 대한 피해 보상이었는데 말입니다.”
제이코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의뢰 내용을 읊어줬다.
― 에이스 로펌이 어떤 의뢰를 맡았는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회사 기밀을 유출, 협박한 고주몽을 고소할 예정이며 지금부터 벌어지는 모든 책임은 그쪽에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고소하세요. 기쁜 마음으로 소송에 임하겠습니다.”
― 네?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아, 우리 쪽도 고소장을 제출할 생각입니다. 의뢰인의 물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피해 보상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그와 관련해 지금부터 벌어지는 모든 법적 문제는 그쪽에 있음을 저 역시 통보하는 바입니다.”
― 대왕 그룹이라고 했습니다만.
“네. 에이스 로펌 제이코 코엔이었습니다. 조만간 법정에서 보도록 하죠.”
제이코는 그 말을 끝으로 상큼하게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정말 고소를 하려고요?”
“당연하죠.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남자를 또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지 않았습니까. 녹음까지 깔끔하게 된 상황이니 당연히 고소해야죠.”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적이 되기 전까지입니다. 상대가 먼저 도발을 해 왔습니다. 이럴 땐 다시는 고개도 들지 못하도록 확실히 밟아줘야죠. 이제부터는 저를 믿고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소송이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는 보스를 보고 싶지 않게 만들어 드리죠.”
“하하.”
내가 짤막하게 웃음을 보이자, 제이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보유재산이 칠천오백억 달러가 넘는 남자의 물적, 정신적 보상금은 어느 정도 책정을 해야 적당하려나. 이거 질질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올라가겠는데요.”
“푸훗. 얼마나 책정을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숨만 쉬어도 돈이 벌리는 중 아닙니까. 저쪽에서 곧바로 항복을 하면 모를까. 소송에 들어간 시간 만큼 돈을 지불해야죠. 한 시간에 이십만 달러 정도였죠?”
“네. 대충 그 정도 됩니다.”
“뭐, 그것도 계속 늘어날 예정이지만, 일단 그걸 기본으로 준비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선 보스의 2년을 통째로 보상받고 싶지만, 근무하시는 동안 책정된 연봉이 워낙 부실해서 말입니다.”
“하하…….”
제이코 입에서 내 연봉 이야기가 나오자 쓴웃음이 나왔다.
“네. 대왕 전자 쪽은 제이코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세요. 나는 사표가 수리되고 그쪽 사람들과 다시는 얽히지 않으면 충분하니까요.”
내 말에 제이코가 코끝을 찡그리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걸로는 절대 부족하죠. 아주 최대한 질질 끌어서 저들을 미치게 만들어 줄 생각입니다. 저쪽은 보스와 달리 숨만 쉬어도 돈이 날아갈 것이니. 어쩌면 소송을 이어가느니 그냥 죽고 싶을 수도 있겠군요.”
제이코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로버트마저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