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장.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나사 풀린 방문객 덕분에 머리가 잠시 혼란스러워졌지만, 답도 없는 인간들 신경 쓰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대한민국 정부에 바보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대처가 있을 것이다.
“보스.”
“네. 로버트.”
“부탁하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아, 벌써요.”
“어떻게. 이곳에서 그냥 들으시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이들이 모두 한 식구가 되었다고 하지만, 정보 공개나 공유에 있어서 모든 걸 함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이코와 함께 들을게요.”
나는 두 사람과 함께 회의실 옆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청장치 확인에 들어갔다.
“안전합니다.”
로버트의 말에 제이코가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정리를 해둬야 할 일이 있어요. 일단 제가 하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줄게요. 최소한의 배경 지식은 있어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가게무샤를 두고 여자에 환장한 것처럼 연극하고 있는 놈과 형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이코패스. 그저 직장에 관계된 일이라 생각하고 사표 쓰면 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회귀 사건을 겪게 된 중요관계자다 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그게 좋겠군요. 사실 보스가 역대급 복권 당첨자라는 사실을 제외하곤 딱히 아는 부분이 없어서 살짝 답답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이코는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러게요. 우리 만남이 벼락 치듯 순식간에 이어지다 보니.”
제이코와 로버트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자, 복권 당첨자가 되기 전까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간략히 설명을 해 줬다. 물론, 회귀니 뭐니 하는 믿지 못할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왕 전자 후계자의 내밀한 일을 알고 있다는 점 때문에 차후 입막음이나 보복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서 로버트에게 그쪽 분위기가 어떤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제이코는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상황 설명이 마무리되자 로버트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조사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해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관련 투숙자들이 모두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호텔 쪽은 조용합니다.”
“이진상 상무가 호텔에 없다는 말인가요?”
“호텔 쪽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뭔가 일이 있는 듯 급하게 호텔을 나섰다고 합니다. 차량도 여러 대가 동원됐다는군요. 회사원이라기보단, 경호원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회사원이 아니라. 경호원. 그것도 차량이 여러 대 동원됐다면, 아마 연구소로 향했을 확률이 높다.
호텔을 나서기 전에 이진상이 보였던 표정을 생각해보면, 이미 나상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진상도 나상선이 그랬던 것처럼 동생을 치기 위해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황상, 나상선이 손 쓰기를 기다렸다가 녀석이 움직이자 뒤를 치는 작전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명분을 손에 쥐기 위해, 나상선의 행동을 수수방관했을 수도 있겠구나.’
문제는 그 일들 사이에 자신의 안전이나 죽음 따위의 어떤 고려도 없었다는 점이다.
필요에 따라 잠시 사용되는 일회용 플라스틱. 그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비췄을 것이다.
“실리콘밸리는요?”
“말씀하신 연구소에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부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화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소방차 수십 대가 출동하고 인근 교통이 통제될 정도라고 하니.”
“아!”
연구소에 폭발과 화재가 일어났다는 말에 나는 회귀 전 겪었던 상황이 떠올랐다.
‘내가 있든 없든,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구나.’
함께 이동한 이진상이 가게무샤임을 모르는 나상선은 계획했던 일을 행동에 옮긴 것이 분명했다.
“이진상 상무나 비서실 직원들은?”
“아직 거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좀 더 확인을 해 보라고 했으니,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코가 입을 열었다.
“보스. 신경이 많이 쓰이십니까?”
“신경이 쓰인다기보단, 과거를 어떻게 정리해야 깔끔하게 마무리될까 하는 정도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던 제이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굳이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있습니까?”
“네?”
“보스 입장에선 신경이 쓰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만, 대왕 전자에 계속 다니실 계획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그러면 그냥 사표를 쓰고 무시해 버리십시오.”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내 표정을 바라보던 제이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제 입장에서 본다면, 보스가 해 왔던 업무나 근무조건, 노동시간을 문제 삼아 소송을 걸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말이 비서실 직원이지 노예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낸 게 아닙니까. 혹, 대한민국 노동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죠?”
노동법 문제? 뒤져보면 말도 안 되는 썩은 법들이 여럿 튀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근로 노동에 관련된 기본 사항은 선진국 못지않게 잘 만들어져 있다. 잘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지.
“그건 그렇긴 한데…….”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보스는 과거 겪었던 시간 때문에 정신적으로 억눌려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억눌려 있다고요?”
“네. 일반적인 사회활동. 그러니까. 회사원으로 사는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보스가 보이는 행동은 마치 매 맞는 아내 같아 보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매 맞는 아내라니. 비유가 너무 심한 거 아냐? 아니지, 여기서 매 맞는 아내가 왜 튀어나와. 내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반복적 폭력에 노출되면 말입니다. 저항심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커져서 심적으로 굴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정 폭력에 의한 이혼 케이스는 대부분 초창기에 이뤄집니다.”
“초창기요?”
“네. 상대의 불합리함에 불만을 제기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는 이는 대부분 폭력 초창기입니다. 아직 정신적으로 충분히 싸워나갈 수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죠.”
“그 단계를 넘어 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그 단계가 넘어서 버리면 이혼 시도 자체를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행위라고 단정해 버리고 오히려 꺼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과거 노예를 다루는 방법도 이와 유사한 방식이 사용됐으니까요.”
주인의 말에 거부하지 못하는 절대복종 상태.
말 그대로 뼛속까지 노예!
“아…….”
“이를 두고, 자기합리화 또는 상대의 폭력이 자신의 잘못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부하는 이도 있습니다. 잘못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 자신에게 찾는 경우가 생기죠. 말도 안 되는 일지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거, 매 맞는 아내를 예로 들었을 뿐.
사실은 내가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런 커플의 최후는 한결같습니다. 폭력에 시달린 아내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음의 공포에 이성을 잃어버린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거죠. 선후에 상관없이 비극적 결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불합리한 대우에 저항하기보다 입막음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 굴복해 버린 상태라고?
“이는 가정 폭력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보스처럼 직장 생활에서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죠. 일반적 상하 관계에 발생한 일이라면 그나마 저항할 방법이 많습니다만, 보스의 상사였던 이진상 상무는 그 단계를 훌쩍 넘어선 자라고 해야겠죠. 재벌이라는 특수성을 띠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이코의 설명에 로버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이혼소송이나 심리학적인 부분은 잘 모릅니다만, 우리 쪽에 신고된 사건들을 보면 거의 맞는 말 같습니다. 가정 내 폭력 또는 살인사건을 들여다보면 거의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에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니야. 내가 아무리 굽실거리고 살았다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는 쥐꼬리만 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과
‘아, 나도 모르게 노예근성에 젖어버린 비참한 상태였구나.’
하는 진실의 거울 앞에 선 기분이랄까?
나상선 그 미친 사이코패스가 킥킥거리며 놀려대던 말이 떠올랐다.
― 개밥에 도토리.
‘매 맞는 아내의 또 다른 표현이었구나….’
모두가 아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복잡한 표정에 잠기자, 제이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스가 보통 사람의 삶을 살아왔고, 또 은연중 정신적으로 억눌린 사회생활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계속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네…….”
“그동안 보스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제이코를 바라봤다.
“지금의 당신은 대왕 전자가 아니라, 그룹 전체를 통째로 사 버릴 수 있는 남자입니다. 사표를 쓰는 문제? 상사의 복잡한 여자관계를 알고 있던 과거?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제이코의 말에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나요?”
“물론이죠.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죠. 하지만, 지금 보스가 걱정하는 또는 고민하는 것들은 ‘해결’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기에 너무 소소하고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이 보스의 인생에 작은 흙탕물이라도 튀기려 든다면!”
“…….”
“세탁비를 대가로 인생을 내놔야 할 겁니다. 보스가 가진 힘은 아니 ‘돈’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제이코…… 이 멋쟁이 같으니라고!
매 맞는 아내에서 시작된 나의 평가는 어느새 무지막지한 폭군 후보로 격상이 되었다.
“보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나를 비롯해 로버트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인생까지 뒤틀린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죠.”
제이코의 말에 로버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는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제이코…….”
“네. 보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리고 명쾌한 설명 정말 고마워요.”
복권에 당첨되어 놓고도 이진상이나 나상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자, 답답한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 많은 돈을 위해서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는 나상선을 보며 솔직히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적 기준, 상식을 넘어선 행위가 당연하다는 듯 일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억눌려 있던 내 자존감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까지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문제는 내가 왜 계속 떨어야 하는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원인 모를 불안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제이코는 그런 내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고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보스. 이왕 조언을 드린 김에 한 말씀 더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제이코는 자신의 스마트 폰을 내 손에 쥐여줬다.
“문자부터 날리세요. 더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고. 그렇게 보스 인생을 되찾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푸흣.”
내가 웃음을 흘리자, 제이코는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반론이 됐든, 문제가 됐든. 보스는 그들을 만날 이유도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보스의 변호사인 제 일이니까요. 저 보기보다 굉장히 유능하거든요.”
“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제이코의 스마트 폰으로 곧장 ‘문자 사표’를 작성했다. 몇 번을 치고 고치를 반복하는데, 제이코가 살짝 귀띔했다.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기 전까진, 상대에 예의를 갖추는 게 좋습니다.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 이쪽 세상에선 돈이나 권력보다 무서운 게 때로는 ‘명분’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아, 귀에 콕 박히는 조언이네요.”
나는 감정을 담아 써 내렸던 문자를 모두 삭제하고 간단명료하게 문장을 작성했다.
― 이진상 상무님.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제출합니다. [고주몽]
발송 버튼을 누르자 문자는 빛의 속도로 날아가 버렸다.
나와 제이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로버트가 짝짝짝 손뼉을 쳤다.
“축하드립니다. 보스. 이제 진짜 보스의 인생이 시작되겠군요. 제이코가 보스의 입이라면 저는 보스의 주먹과 방패가 되어드리죠. 그러니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앞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에 올라섰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