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장. 내 돈 받는데 왜 숨어서 받아. 떳떳하게 받자고!
내 돈 886조를 받아 내기 위해 씨티은행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와. 저거 다 뭐냐.
이동식 방송 차량은 물론이고 온갖 군상들이 바글바글 개미 떼처럼 붙어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어떻게 하면 조용히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돈을 받아 갈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개미 떼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당첨금 수령은 둘째치고 저 인간들을 헤치고 은행에 들어가는 그것부터가 난관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저길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숨긴다고 숨겨질 일인가?”
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벼락부자의 탄생을 코앞에 두고 있다.
벼락부자도 동네 부자가 아니라 글로벌 벼락부자다.
돈이 한두 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886조의 돈이 일 개인에게 집중되는 이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안전을 보장받고 싶으면 유명인이 되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나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개진상과 사이코패스 상선이다.
내가 이 상무에게 맘 편히 사표를 쓰지 못하는 이유가 뭐던가.
이 상무의 떡 생활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만둔다고 그만둘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설프게 때려치웠다가 입막음이라도 당하면?
나만 병신 되는 거다.
가진 것도 없고 백그라운드도 없는 인생. 목숨줄마저 놔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벗트!
일단 돈만 제대로 수령하면 개진상이 난리 블루스를 쳐도 그때부터는 신경 쓸 것도 없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돈’으로 사 버릴 테니까.
사표? 그까짓 것 문자로 날려주마. 십수 년을 고생한 노동자들도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하던데 사표는 안된다는 법 있나?
내 입을 막는 것보다 내가 돈 지랄하는 걸 더 조심해야 할걸.
또 모르지. 언제 딱쇠라고 불렀냐는 듯 친한 척하며 손바닥을 비벼댈지도.
내가 지문이 닳도록 비벼댔던 것처럼.
후우. 후우.
거칠어지는 숨을 가라앉히고 복장을 바로 했다.
토니 스타크처럼. 내가 아이언맨이라고 떳떳하게 밝혀 버리자.
하지만 멍청이처럼 이대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지.
내가 공부 머리는 부족했어도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 편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 그 잔머리가 능력을 발휘할 때다.
스마트 폰을 꺼내 곧바로 검색 작업에 들어갔다.
“로펌. 로펌…… 여기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중에서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에이스 로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금발에 예쁘장하게 생긴 안내원이 나를 맞이했다.
“에이스 로펌 대표를 만나고 싶습니다.”
“약속이 있으셨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나를 만나고 싶어 할 겁니다.”
“네?”
안내원이 살짝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대표에게 전화 넣으세요. 에이스 로펌 역사상 최고의 고객이 찾아왔다고.”
“…….”
“뭐해요. 어서.”
이런걸 무대포라고 하는 거겠지?
평소 같으면 시도조차 못 해 볼 일이지만 뒷감당할 자신이 있으니 거침이 없어진다.
이래서 남자는 지갑이 빵빵해야 한다는 거구나.
쥐뿔도 없던 자신감이 샘솟듯 솟아난다.
내가 워낙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니 긴가민가 싶으면서도 대표에게 전화를 넣는 안내원이다.
“대표님. 여기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아니요. 약속된 분은 아닙니다.”
“이리 줘봐요.”
내가 손을 내밀자 안내원이 몸을 뒤쪽으로 뺀다.
그런다고 내가 못 뺏을 것 같아? 나 지금 엄청 급하다고!
와락!
힘으로 전화기를 뺏어 들자, 안내원이 곧바로 시큐리티를 외친다.
그래. 외쳐라. 나도 시큐리티 그게 필요한 상황이거든.
― 제미니. 무슨 일이야? 제미니.
“나는 G20. 슈퍼복권 당첨자입니다. 지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헬로우?”
재차 말을 거는데 로펌 안쪽에서 우당탕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뭐라 뭐라 악을 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로펌 보안 도어가 활짝 열리면서 중년 사내 한 명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나를 훅 가리켰다.
“리…… 리얼리?”
진짜냐고? 당연히 진짜지.
“진짜 당신이 슈퍼복권 당첨자 맞습니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와우. 나보다 더 흥분한 얼굴이네. 내가 거짓말했다고 하면 총이라도 쏠 기세야.
“에이스 로펌 대표님?”
“아. 죄송합니다. 에이스 로펌 제이코 코엔입니다. 그런데 정말…….”
“네. 정말 맞습니다. 당첨금 수령을 하고 싶은데, 도저히 은행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서 말입니다.”
나는 씨티은행 쪽을 가리키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왓 더!”
대표는 만세라도 부를 듯 양손을 번쩍 들더니 ‘웰컴! 웰컴!’을 외쳐댔다.
나는 대표 손에 이끌려 곧장 안으로 모셔졌다.
다른 이들도 뒤늦게 소식을 접했는지 로펌 직원들이 구경꾼처럼 대표실 밖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내가 거짓말한다고는 생각지 않는 겁니까?”
확인사살 한번 없이 격하게 환영하는 대표의 태도에 되레 내가 얼떨떨 이다.
“거짓말요?”
“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런 짓을 했다간 우리 로펌에 당장 고소를 당할 텐데 말입니다.”
아…… 미국의 다른 별명을 깜빡했다.
우리나라에 분식 천국이 있다면, 이곳 미국에는 고소 천국이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소송으로 시작해서 소송으로 끝맺는 나라가 아메리카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돈 좀 받게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일단 신분 공개를 피하려면…….”
“아니요. 내가 당첨자라는 것을 감출 생각이 없습니다. 어설프게 숨는 것보다 대놓고 밝히는 게 오히려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당첨 사실을 감추지 않겠다는 내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이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토니 스타크처럼!”
오, 당신도 아이언맨 팬이었어?
“네. 아이언맨처럼. 그래서 말입니다.”
“네. 말씀하시죠.”
“이곳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의 도움을 받고 싶은데 말입니다.”
“네? 사설 경비가 아니라 경찰에게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이 동그래진다.
“전화해서 이렇게 말하세요. 내 안전을 책임져 준다면 경찰국에 천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886조. 여기서 떼어낸 우수리만 3000억이 넘는다.
나는 이 돈을 내 안전에 모조리 쏟아붓기로 결정을 내렸다.
막말로 내가 먹고 마시고 앞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885조를 보안에 털어 넣어도 아깝지 않다. 그래도 무려 1조란 거금이 여전히 나를 먹여 살릴 테니까 말이다.
“천만 달러를…….”
“만약, 내가 미국에서 업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아, 나는 한국인입니다.”
“아. 네.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계속 말씀해주시죠.”
“그때까지 내 안전을 책임져 준다면 기부금액은 총 1억 달러가 될 겁니다. 어떻게. 이 정도면 경찰국에서 직접 나서줄까요?”
사설 경비업체를 고용하는 것보다 공권력을 동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제안한 건데, 솔직히 이게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 아무리 돈이면 다 되는 미국이라도 경찰이지 않은가. 받아주면 좋고 안되면 사설 경호로 우회하면 된다.
“와이 낫!”
제이코는 곧바로 전화기 스피커 폰을 켜고 경찰국에 연락을 넣었다.
라인을 쭉쭉 타고 올라가 최종 책임자까지 연결하더니 앞뒤 설명 다 빼버리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에이스 로펌 대표. 제이코 코엔이요. 우리 고객을 한 달간 책임지고 경호해 준다면 1억 달러를 기부하겠소. 우리와 거래 하겠소?”
― 와이 낫!
제이코가 그랬던 것처럼 안될 이유가 없단다.
와우. 미국 자본주의 만세다.
경찰도 돈 앞에선 망설임이 없구나.
혹시 주 방위군도 동원할 수 있으려나? 개들은 얼마면 움직이려나.
내가 뇌내 망상에 빠져 있는 사이, 제이코 대표는 경찰과 내 신변 안전에 대한 협의를 마쳤다.
“경찰국이 준비하는 동안, 우리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제이코는 돈 냄새 풀풀 풍기는 나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고용계약서부터 내밀었다.
비서가 가져다준 커피를 음미하며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읽어내렸다.
보통 이런 계약을 할 땐 항목도 많고 서로 간에 조율한 부분도 많다.
그래서인지 제이코가 내민 서류는 무척이나 두껍다.
한 장 두 장, 서류를 넘기던 나는 백지 한 장을 달라고 요구했다.
“여기.”
제이코가 펜과 종이를 준비하자 나는 그곳에 딱 한 줄을 적어 넣었다.
― 고주몽 님에게 에이스 로펌은 충성을 맹세합니다.
딱 봐도 병맛 같은 글귀다. 하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이 886조의 사나이라면 전혀 상황이 달라진다.
제이코의 표정이 온갖 변화를 일으킨다.
“750,024,154,020달러. 내가 이걸로 뭘 하면 좋을까요? 아, 질문을 바꾸죠. 내가 뭔가를 할 때마다 변호사를 다시 고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내 말이 틀려? 886조 사나이가 매번 변호사를 찾아다녀야겠냐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제이코를 바라봤다.
“에이스 로펌. 얼마면 팔겠습니까?”
제이코는 내 얼굴과 한 줄 글귀를 번갈아 보더니 고심 어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가격을 적어넣었다.
“콜!”
그깟 푼돈 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써주지.
제이코가 적어 넣은 금액 옆에 거침없이 사인을 해 줬다.
“보스. 잘 부탁드립니다.”
태세전환도 빠르셔라. 곧바로 보스인가?
“보스?”
“에이스 로펌의 사주가 되셨지 않습니까. 당연히 보스라고 불러드려야죠.”
보스라. 이 얼마나 황홀한 호칭인가.
똥 닦기, 딱쇠, 야, 너, 이 새끼. 소개끼. 개새끼.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에 드디어 제대로 된 명칭이 하나 생겼구나.
제이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데, 건물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제이코와 함께 창가로 가서 밑을 내려다보니 경찰차 수십 대와 기동타격대처럼 보이는 무장병력과 장갑차까지 몰려와 있다.
“보스. 내려갈 시간입니다.”
“그래. 가야지. 돈 찾으러.”
나는 제이코와 에이스 로펌 파트너 변호사들을 모조리 대동하고 건물 밑으로 내려갔다.
딱 봐도 대장으로 보이는 경찰 한 명이 나와 제이코 앞에 마주 섰다.
“이분이?”
제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에이스 로펌의 사주이신. 고주몽 님입니다.”
“오, 미스터 고. 반갑습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국장. 로버트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미스터 고 덕분에 경찰국 예산이 아주 넉넉해질 텐데 말입니다. 자, 이쪽으로.”
오, 경찰차를 타고 이동할 줄 알았는데. 이 아저씨 센스있네.
어디서 구해 왔는진 모르겠지만 멋들어진 자태를 자랑하는 마흐바흐 한 대가 대기하고 있다.
“방탄 차량입니다. 로켓탄까지 막아내는 놈이죠.”
나는 마흐바흐를 어루만지다가 제이코와 함께 뒷좌석 VIP석에 탑승했다.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탄 로버트가 무전기로 이동 명령을 내렸다.
마흐바흐를 둘러싼 경찰차들이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경호를 시작했고, 그새 소문을 듣고 몰려온 방송국 차량들이 그 뒤를 따랐다. 머리를 슬쩍 들어 하늘을 보니, CNN 라벨이 붙은 헬기가 보인다. 하늘에서도 이 장면을 찍고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멀지도 않은 거리. 눈 깜짝할 새 씨티은행에 도착했다.
씨티은행 입구에 모여 있던 개미 떼들은 경찰이 설치한 안전펜스 뒤에서 환호성을 질러댔다.
자기들이 당첨된 것도 아닌데 왜들 저리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부자의 탄생에 축하를 해주는 건가.
완전무장한 경찰특공대의 호위를 받아 은행에 들어서자 복권 사업팀은 물론 은행장까지 달려 나와 환영을 해줬다.
“워낙 액수가 크다 보니, 어떻게든 은행에 돈을 묶어두려는 겁니다. 돈만 맡겨 준다면 팬티 벗고 뛰어다니라고 해도 망설일 놈들이 아닙니다. 수작을 걸어와도 적당히 무시하십시오. 굳이 씨티은행이 아니더라도 다른 은행들 역시 제안서를 가지고 올 겁니다.”
오오. 이런 조언 좋아. 아주 좋아. 바로 돈값을 하는구나.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합니다. 저는 은행장 왈버트라고 합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한 명이 악수를 청해왔다.
“주변이 소란스러우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요.”
악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제이코가 먼저 선수를 쳐 줬다.
“아,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돈이 무섭기는 무섭구나.
평생 살아도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구나.
나는 경찰과 은행관계자 그리고 에이스 로펌의 변호군단을 이끌고 당첨금 수령 작업에 들어갔다.
<브레이크 챕터> 빠꼼이들이 벌인 글로벌 이벤트.
G20 슈퍼복권은 주기적으로 발매하는 일반 복권과 달리, 말 그대로 일회성 이벤트 복권이다.
수익금에 대한 유엔의 제안은 이랬다.
판매금액의 절반은 당첨자가. 남은 금액의 절반은 세계기후관리팀에 배정하고 나머지는 G20 국가가 공평하게 나눠 가지면 된다고.
처음엔 이게 얼마나 팔리겠냐는 생각에 말 그대로 이벤트 정도로만 생각한 G20이다.
하지만 각국 경제팀에서 슈퍼복권의 예상 판매량과 수익을 예측해 보니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이 튀어나왔다.
현재 지구 인구수는 약 77억 명.
그중에 G20 국가의 국민 수만 산출해보니 45억8천만 명가량으로 전체 인구의 60%가량을 차지했다.
유엔 이벤트 복권의 구매 제한은 17세 이하. 다시 말해 18세 이상의 성인은 누구나 복권을 구입할 수 있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18세 이상 성인 인구는 전체 인구수의 70~80%를 차지한다.
이들이 10달러짜리(한국 돈으로 만원 정도) 한 게임씩만 구매해도 최소 350억 달러에 이르는 거금이 만들어진다.
거기다 언제나 그렇듯 확률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최소 두 게임, 많게는 열 게임 이상씩 참가를 한다.
로또 복권만 해도 10만 원 이상씩 구매하는 헤비 구매자가 버젓이 존재하니 어쩌면 그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많아야 30억 평균 10억 규모의 복권에도 이렇게 돈을 태우는데 수십조 이상의 당첨금이 예상되는 이벤트 복권엔 과연 얼마를 투자할까.
복불복 좋아하는 인간들은 입이 쩍 벌어지는 돈을 쏟아부을 수도 있는 일이다.
거기다 G20 국가뿐 아니라 다른 국가의 국민도 복권 구매 및 금액에 제한이 없으니 실질적으로 범지구적 이벤트라고 할 것이다.
숫자 계산에 능한 자들은 최소 5,000억 달러에서 7,000억 달러 이상의 판매수익을 예상했다.
눈앞에 금덩이가 굴러다니는데 다들 입 다물고 성인군자처럼 굴 리가 없다.
본격적으로 복권 사업이 추진되자 G20은 물론 유엔과도 이해충돌이 발생했다.
유엔으로서는 야심차게 출발한 세계기후관리팀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자금만 확보하면 그만이었지만, 복권을 직접 발행하고 판매금액을 관리해야 하는 G20 국가들은 전혀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복권 발행과 관련된 첫 번째 이해충돌은 G20 국가의 인구수다.
일반적인 경제를 이야기한다면 인구수와 무관하게 국가의 경제 규모만 따져서 이야기하겠지만, 복권을 놓고 계산을 때려보니 국가 경제 규모만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은 인구수 오천만 가량의 국가이고 일본은 일억이 넘는 국민을 보유한 국가다.
각국에서 복권이 몇 장이나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계산해도 일본의 복권 구매력은 한국의 두 배 가까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걸 중국으로 넓혀서 이야기해 보자.
인구수 15억 가까이 되는 중국은 한국의 서른 배, 일본의 열다섯 배의 구매력을 지니고 있다.
복권 한 장에 백만 원, 천만 원 정도의 고가정책을 쓴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어느 나라 국민이든 밥 한 끼 또는 술 한 잔만 마시지 않으면 누구든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 책정됐다.
18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복권 구매에 대한 허들이 낮아지니 다른 나라들 역시, 자국의 인구수를 들먹이며 판매수익의 분배를 요구했다.
인구수가 많은 나라 입장에선 정당한 요구였지만,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GDP 대비 인구수가 낮은 나라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됐다.
복권 판매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유엔은 긴급히 새로운 제안을 내놨다.
* 유엔의 제안대로 당첨자는 판매수익의 절반을 가져간다.
* 남은 수익에서 절반은 유엔의 세계기후관리팀에 배정한다.
유엔의 세계기후관리 자금을 G20 국가들이 분할해서 내야 할 상황이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일단 그렇게 분배를 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25%의 수익금이 남게 된다.
* 20%는 각국이 1%씩 수익을 보전한다.
* 남은 5%는 당첨자가 나온 국가에서 취득한다.
* 만약 당첨자가 없다면, 유엔과 G20이 공평하게 나눠 갖는다.
복권이라는 특이성을 따져볼 때, G20 역시 각국이 복권을 구매한 것처럼 생각하면 되지 않냐는 유엔의 말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다.
물론 이 부분도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론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인구수가 많은 나라가 당첨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복권 발행을 담당한 수학자들은 슈퍼 복권의 당첨 확률을 다음과 같이 계산했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전 인류가 열 번쯤 사망할 확률.
당첨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 수익금을 자신들끼리 나눠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확률의 조합을 내놓았고, 이는 유엔 및 G20 국가의 만장일치로 통과가 됐다.
그야말로 빠꼼이들의 빠꼼이 짓을 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시작된 글로벌 이벤트.
과연 생각대로 될까 하는 의구심과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다른 결과가 튀어 나왔다.
5~7,000억 달러가 아니라 15,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튀어나온 것이다.
예상보다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당첨금 규모에 지구촌 전체가 활활 불타올랐다.
복권을 구매했던 이들은 더 많은 복권을 구매했고, 관심이 없던 이들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복권을 구입하는 현상이 반복된 것이다.
확률게임에서 승률을 높이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더 많은 확률을 손에 넣을 것.
더 많은 확률을 손에 넣기 위해선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이는 전문 겜블러와 사모펀드들까지 발을 담그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그들이 투자란 명복 하에 본격적으로 구매에 나서자 당첨금은 애초의 계산과 달리 추산할 수 없는 판매액이 달성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다시 없을 행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당첨액.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에서의 대사처럼 지구 전체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주어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드디어 D― day.
세계의 눈이 유엔에 집중됐다. 이 말도 안 되는 당첨금을 손에 움켜쥘 당첨자가 탄생할 것인지. 아니면 유엔과 G20 국가만 박수치는 것으로 이벤트가 마감될 것인지 말이다.
유엔과 G20은 당첨자가 나오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운명의 신은 한 사내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대한민국 소시민이자 재벌 4세의 노비로 전전하고 있던 고주몽에게 그 행운이 돌아간 것이다.
여기까지는 당첨자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필연적으로 벌어질 일이었으니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아니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 당사국인 G20 국가들은 이 상황을 웃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 남은 5%는 당첨자가 나온 국가에서 취득한다.
이 항목 때문에 G20 국가 수익금 배분 항목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당첨자가 나온 국가’라는 문구의 해석이 당첨자의 소속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복권을 구매한 지역 또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5%라는 수치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커 보이지 않겠지만, 그 5%가 삼십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런데 수익 배분 5% 항목에 이런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될까?
소수점까지 계산해대며 자국 이익을 위해 발 벗고 뛰는 이들이?
다들 나름의 꼼수와 계산법을 가지 있었기에 이 항목의 불확실성을 따지고 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속된 말로 말꼬리를 잡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존재하기를 바란 것이다.
펼쳐진 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작위적 해석을 통해 그 판을 틀어버리겠다는 꼼수 아닌 꼼수.
물론 이런 계획도 당첨자와 당첨국가가 같다면 의미 없는 짓이지만…….
또 모르지 않는가. 그들이 원하는 그런 판이 만들어지게 될지도.
그런데 진짜 그런 판이 벌어졌다.
복권은 미국에서 팔렸지만, 당첨자는 미국인이 아닌 상황.
미국으로선 골치 아픈 일이지만, 다른 국가들에겐 호재였다.
이 바닥 빠꼼이라 불리는 정치, 외교, 경제통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첨자 고주몽을 사이에 두고 국가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속된 말로 고주몽의 국적을 움켜쥐는 자가 조금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적 사명을 띠고 주몽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 위해 씨티은행으로 몰려들었다.
(빠꼼이 : 어떤 일이나 사정에 막힘없이 훤하거나 눈치 빠르고 약은 사람을 굳이 속되게 이르는 말)
<브레이크 챕터> 빠꼼이들이 벌인 글로벌 이벤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