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장. 니가 거기서 왜 나와?
비몽사몽.
잠든 듯 잠들지 않은, 기기묘묘한 시간이 흘러갔다.
온갖 잡생각과 거금 700조의 압박감에 눌려 전전긍긍했다.
로또 일등, 일이십 억 정도면 뭔가 현실적이고 빛나는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당최 가늠되질 않으니 막상 돈이 들어온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조만간 세계에서 손꼽는 부자가 될 예정인데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한 지.
일평생 서민 마인드로 살아왔기 때문인가.
갑작스레 불어닥친 일생일대의 행운.
으…… 좀 더 격하고 딱 어울리는 표현이 없을까. 일생일대 정도로는 지금, 이 감정이 설명되질 않는다.
새벽 어름 푸르스름하게 날이 밝아올 때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형.”
누구…….
“형. 일어나야지.”
“으…….”
어지러워. 흔들지 좀 마…….
“형. 괜찮아?”
“으으으…….”
“형! 정신 좀 차려!”
이 새꺄. 머리 울린다고…… 조용히 좀!
“쯧. 어제부터 상태가 이상하다 싶더니. 결국, 탈이 났네. 이러면 곤란한데.”
곤란해?
그래…… 곤란하시겠지. 그런데 뭐 어쩌라고.
이 몸으로 움직였다간 진상이가 내 수행비서를 해야 할 건데.
“오무석 과장님. 과장님.”
“왜?”
“고주몽 비서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아무래도 시차 적응도 못 한 상태에서 상무님 수행하다 보니 결국 몸살이 난 것 같습니다.”
“하, 이거야 원. 주몽이 상태가 이러면 상무님 수발은 누가 드냐.”
제기랄. 남은 아파죽겠는데, 이 상무 똥 닦을 걱정부터 하는 거냐?
정말 해도 너무한다. 너무해.
적당히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비서실에서 내 값어치는 딱 이 정도구나.
내가 아프든 말든, 이러다 억하고 죽어 나자빠져도. 이 인간들 걱정은 이 상무 똥 닦을 휴지가 떨어졌다는 게 전부인 거다.
아무리 내가 진상이 똥 닦기 비서라고 해도. 화장실 휴지 취급하는 건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아무튼, 적당히 꾀병을 부려서 오늘 일정에서 빠져나가는 게 목표였는데, 꾀병이 아니라 진짜 병이 나 버렸다.
그것도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악질 몸살이다.
“열도 심하고. 땀도 많이 흘리는 게, 아무래도 오늘 수행은 어려울 것 같네요.”
그래. 사이코패스. 나 오늘 죽어도 못 움직여. 그러니까 너희끼리 가주라.
“짜증 나네. 주몽이가 못 움직이면…… 상선아. 오늘은 네가 수행비서 좀 해야겠다.”
와, 이거 돌아가는 판 봐라.
안 그래도 진상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애한테 아주 씹어 삼키라고 통째로 넘겨주는구나.
아, 깜빡했다.
이놈들 다 한통속이었지. 오히려 잘됐다고 박수치고 있는 거 아냐?
“네? 제가요?”
“그래. 어쩌겠냐. 막내인 네가 희생해야지.”
크허허. 내 일을 대신하는 게 희생 운운할 정도인 거야?
“네. 별수 없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별수 없기는 아주 좋아서 죽네. 죽어.
“형. 이거 몸살 상비약인데 챙겨 먹어요. 다녀올게요.”
그냥 쫌, 그냥 가! 친한 척하지 말고!
그리고 니가 준 것은 천고의 보약이라고 해도 먹을 생각이 없거든!
사이코패스가 뭘 처먹일지 알고 넙죽 받아먹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비서들이 우르르 나가는 게 느껴진다.
슬그머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방안 어디에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드디어 홀로 남겨진 것이다.
“후우…….”
찐득한 한숨 소리가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끙.”
목이라도 축일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전신 구타라도 당한 것처럼 온갖 통증이 밀려든다.
아무리 몸살이 났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물잔을 움켜쥐었다.
벌컥. 벌컥.
수분이 보충되니 어질어질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느낌이다.
“개새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이렇게 아픈데, 병원 가보라는 놈이 하나도 없냐. 고주몽이 진짜 인생 엿 같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2년을 몸담은 비서실이다.
아무리 자기들만의 리그가 있다고 해도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두고 봐라. 내가 당첨금만 수령하고 나면. 너희들은 콧물도 없다.”
나는 저릿거리는 몸을 이끌고 노트북을 펼쳐 들었다.
내가 산 복권이 일등 복권임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사살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다.
뉴스란에 들어가니 온통 G20 복권 이야기 뿐이다.
― 세계기후 보호를 위한 글로벌 로또 1등 당첨자는 누구?
― 인류 역사상 최대 당첨금! 750,024,154,020$!
― 역대급 럭키맨은 과연 누구?
― 당첨국가는 미국! 글로벌 벼락부자는 미국인?
― 유엔 사무총장. G20 국가 국민을 향해 감사를 표한다!
타이틀만 확인해도 지구촌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게 팍팍 느껴진다.
나는 환율계산기를 꺼내 당첨금을 원화로 바꿔봤다.
한국인인 나는 달러보다 원화가 더 실감 나니까 말이다.
“886,378,545,220,836?”
이야, 숫자 길이가 너무 길다 보니 이게 얼마인지 단박에 확인이 안 된다.
“일십백천만십만…… 백만…… 조!”
끄아아악!
886조 3,785억 4,522만 836원!
우수리 팍팍 떼고 또 떼어버려도 886조!
덜덜덜. 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떨린다.
“팔백팔십육조. 팔백팔십육조!”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려다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행여 누가 자신의 행운을 알아차리면 어쩌나 싶었다.
수백, 수천조의 돈이라 할지라도 이걸 받아 챙기기 전까지는 아직 내 돈이라고 할 수 없다.
겨우 몇십조 때문에 형제간에도 총질하는 세상이다.
자신에게 886조짜리 복권이 있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총질이 뭔가! 이 돈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미사일이라도 쏴 재낄 것이다.
정신 차리자. 고주몽! 정신 차려. 이제부터가 진짜야!
나는 당첨금 수령 형태를 알아보고자 재빨리 검색에 들어갔다.
“호오. 씨티은행이라.”
유엔 본사에라도 가야 하나 싶었는데, 슈퍼볼 당첨금 지급기관인 씨티은행에서 이번 복권도 관리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복권 영수증과 신분증뿐!
몸 상태가 엉망이지만, 여기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
곧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때쯤 진상이와 연구실에 도착했었으니. 현재 호텔엔 아무도 없다. 나를 방해하거나 막아설 자가 없다는 말이지.”
찐득거리는 땀을 씻어내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양말에 끼워 놓았던 복권 영수증을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호텔 방문을 열었다.
지금 이대로 씨티은행으로 달려가 886조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런데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어?”
내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상대가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찬다.
아니, 니가…… 진상이 니가 거기서 왜 나와?
지금쯤이면 상선이랑 연구소로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그 복장은 또 뭐고?
외출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나이트가운을 걸친 모습이다.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는데, 이 상무 뒤에서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튀어 나왔다.
최아라? 여지껏 같이 있었던 거야?
이 상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머리를 쓸러 올렸다.
아마도 나처럼 누구와도 마주칠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과 딱 마주쳤으니 기분이 잡치는 거겠지.
진상아. 그 심정 백퍼 이해한다. 지금 내 마음이 딱 니 마음 같거든.
그런데 여기서 뭐라고 해야 하지?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 뭐든 반응을 하지!
진상아, 뭐라도 말 좀 해 봐.
“딱쇠야.”
“네?”
“니가 거기 왜 있냐?”
이 상무. 그건 내가 할 질문이야.
너야말로 왜 거기서 나와. 사이코패스 새끼랑 연구소에 있어야 하잖아!
내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이 상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니가 거기 있으면 지금 나를 수행하는 건 누구지?”
왓? 너 지금 여기 있잖아. 그런데 누가 널 수행한다고 그래!
“제가. 몸살이 나서 말입니다. 상선이가 오늘 대신…….”
“나상선이?”
“아. 네.”
“풋.”
저 웃음.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표정이다.
그때 문득. 스피어 내부 스피커에 울려 퍼졌던 상선이의 외침이 기억났다.
‘아마도…… ‘빌어먹을 이진상’이라고 했었지?’
죽어가는 와중이었지만, 총 맞아 죽었던 이 상무가 다시 튀어나오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당시에 대입해 본다면…….
가게무샤? 그림자 무사라 불리는?
씨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거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사무라이 칼침 놓는 전국시대도 아니고, 완전히 놀랄 노자다.
만약 어제 내가 만난 사람이 진짜 이 상무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대리출석하는 놈이었다면…….
이 상무 저 인간도 상선이 못지않게 미친놈이라는 소리잖아.
숟가락 말고는 개뿔도 없는 놈이라고 졸라 까댔는데.
재벌가의 권력 쟁투라는 게 이렇게 무섭고 살벌하게 진행될 줄이야.
정말 나 같은 소시민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내 손에 복권이 없는 상태라 해도 이 미친 집구석엔 더는 있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놈의 집구석에 더 붙어있다간 언제 어떻게 죽어 나갈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그래서 몸은?”
“에?”
“몸은 어떻냐고.”
“아. 약이라도 사 먹을까 하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잘했다. 고주몽. 아픈 건 사실이잖아. 그럼 약 먹어야지.
내 대답에 이 상무가 아라를 바라본다.
“어떻게 할래? 딱쇠 붙여줘?”
“그럼 나야 좋지. 혼자 돌아가라고 해서 살짝 실망했었거든.”
아라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양을 떤다.
“딱쇠.”
“네. 상무님.”
“약 사 먹으러 나온 김에. 아라 좀 데려다줘.”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하니, 못하니 하면서 시간 끌 이유가 없다.
일단 씨티은행까지만 가면 퍼팩트하게 굿바이 해 줄 테니까. 이쪽으론 오줌도 안 쌀게. 진짜야.
“서울에서 보자.”
“네. 오빠.”
아라는 이 상무의 목을 붙들고 찐하게 키스를 날려주더니 나를 향해 손짓했다. 이 상무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뭘 멍하니 있어요? 안 가요?”
“아. 네. 가야죠.”
잠깐. 그런데 차가 없는데. 뭘 어떻게 데려다주라는 거야.
자신이 운행하는 차량은 상선이가 몰고 가 버렸다. 그것도 그림자인지 뭔지 모를 놈을 태우고 말이다.
아, 몰라. 일단 호텔을 벗어나는 게 중요해. 내가 알 게 뭐야.
병신인지 알았던 이 상무가 사실은 졸라 똑똑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림자 무사까지 데리고 다니든 말든, 그게 형이라 찰떡같이 믿고 총질을 하든 말든.
콩가루 집안에 불이 나든, 물난리가 나던 지금부터 나완 완전 상관없다고!
886조! 기다려라. 고주몽이 간다!
호텔 밖으로 나온 최아라가 새침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서 빨리 차를 가져와서 자신을 태워달라는 의미겠지?
뽕이다. 이년아.
“아라야.”
“?”
그런 표정 짓지 마. 방금 네가 들은 게 내 목소리 맞아.
헤어지는 마당에 쿨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한소리하고 헤어져야겠다.
절대 내가 찌질해서는 아니야.
그냥 나도 화낼지 알고 감정 상할지 아는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뭐?”
“떡장수 그거 다 한때다.”
“떠… 떡장수?”
“내가 이 생활 2년 동안 금요떡식회 애들 여럿 봐왔는데. 길어야 3개월이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연기 연습에 매진 좀 해. 니가 아이돌도 아니고 명색이 배우라는 게 발연기 소리는 그만 들어야지 않겠냐?”
아우! 속 시원해.
해 놓고 나니 별것도 아닌데, 내가 이 말을 하지 못해서 화병에 시달렸다니.
“너 지금 뭐라고…….”
이거 왜 이래. 다 들었잖아.
“떽! 나이도 어린 년이. 어디서 오빠한테 말을 놔?”
“야! 너 미쳤어?”
“아니. 네가 미친 거지. 감히 나 주몽님을 몰라봤으니.”
아라야. 오빠 886조 가진 남자야. 왜 그걸 몰라보니.
“니가 나에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누군지 몰라?”
알지. 떡장수. 금요 떡식회 2개월 차.
“나 최아라야! 톱스타 최아라!”
“아, 네. 계속 그렇게 사세요. 톱스타 최아라 씨.”
나는 쿨하게 중지를 세워 올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애새끼도 아닌데 집은 잘 찾아가길 바란다.
“야! 너 진상이 오빠에게 이야기해서 당장 잘라버리고 할 거야!”
오예! 그래 주면 나야말로 땡큐지.
사표를 어떻게 낼까 고민할 필요도 없어질 테니까.
“톱스타 최아라 씨. 꼭 좀 그래 주세요.”
“…….”
자, 떡장사 아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씨티은행으로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