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장. 개밥에 도토리.
언젠간 이 상무가 감당하지 못할 사고를 쳐서 대신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며 살긴 했지만, 이건 그 수준을 훌쩍 넘어서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왕 전자 4대를 말 한마디 없이 쏴 죽이다니!
평소 멘탈갑이라 자신하던 나도 사람이 죽어 나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때 다정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
상선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잔뜩 녹슨 것처럼 모가지가 삐걱거린다.
히죽.
눈이 마주친 상선이가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미소를…….
젠장. 처음부터 진상이를 잡으려는 함정이었구나! 그런데 왜 상선이 네가……?
내 궁금증을 알아차렸는지 상선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주몽이 형.”
“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왜 떨고 그래.”
“니가 지금 떨게 만들고 있잖아.”
이런 씨발. 지가 카이저 소저도 아니고. 왜 이런 상황에 반전을 일으키고 지랄이야! 그냥 글로벌 호구 상선이로 돌아와 달라고!
“하긴. 그렇긴 하지? 우리 그동안 사이 참 좋았는데 말이야.”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너랑 나랑 베프, 블러드 브라더스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자. 응?”
“브라더가 아니라 브러~더.”
지금 여기서 발음 따질 상황은 아니잖아!
“쏴리. 내가 한국에서 영어를 배워놔서. 블러드 브러~더스!”
“그래. 한국 사람들은 왜 발음이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 브라더라고 하면 여자 속옷을 생각할 수도 있거든. 한국 사람들도 미국 사람이 동쪽을 똥쪽이라고 하면 웃기겠어, 안 웃기겠어.”
이 새꺄. 너도 미국놈은 아니잖아. 그리고 동쪽을 똥쪽이라고 해도 정황상 다 알아듣거든! 누가 거기서 발음 교정을 시키고 있냐. 그냥 동쪽을 알려주고 말지.
“브러더. 살려 줄 거지?”
“미안. 그건 좀 어렵겠다.”
나 오늘 진짜 여기서 죽는 건가? 진짜 그런 거야?
설마, 브러더를 브라더라고 발음해서?
“아니 왜! 브러더라고 교정했잖아.”
“브라더든 브러더든 그건 중요치 않아. 형은 아는 게 너무 많잖아.”
미국 껍데기 같은 놈아. 그러면 내 발음 지적질 따위 하질 말았어야지!
한국 사람은 다 브라더라고 한다고!
“내가 뭘? 끽해야 금요떡식회 멤버들 목록뿐이라고. 막말로 내가 수발 노비였지. 비서실 인재는 아니었잖아.”
“이진상이 여기서 죽었다는 것.”
“잊어버릴게. 모두 잊어버린다고. 애초부터 이 상무가 여기 투자한 적도 없는 거잖아.”
내 말에 상선이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바라본다.
“어? 투자한 거였어?”
“당연하지. 내가 가진 돈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거든. 나도 나름대로 궁리를 해 봤는데, 시간 내에 돈을 못 맞추겠더라고. 그래서 가장 돈 많고 생각 없는 이진상에게 붙은 거야.”
“돈의 규모가 상당했을 텐데 이 상무가 몰랐다고?”
“당연히 이진상은 모르지. 금요떡식회를 즐기던 날에 슬쩍 끼워 넣었으니까. 그리고 자금 집행은 내 책임이기도 했고.”
하, 진상아. 진상아. 진짜 왜 그랬냐. 아무리 떡이 좋아도 그렇지. 이런 무시무시한 연구시설에 돈을 투자하는데 글자 정도는 읽어봤어야지!
“비서실 막내잖아. 니가 무슨 수로 자금 집행을 책임져.”
“에이.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비서실 애들이 줄을 갈아탄 건가.”
진상과 후계자 경쟁을 하는 누군가가 소리소문없이 진상의 비서팀을 흡수해 버린 것이다.
“빙고. 또 한 가지 알아버렸네. 진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나는 절절한 눈빛으로 상선을 바라봤다.
“그러지 말고…… 진짜 다 잊어버린다니까.”
“에이. 그건 아니지.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어떻게 잊어버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지 말자.”
그렇구나. 안되는 거구나. 애초부터 이진상 제거 작전에 나도 덤으로 끼어 있던 거였어.
아니 내가 뭐라고 이렇게 어마 무시한 공간까지 데려와서 죽인단 말인가.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야, 뭘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꾸며. 그냥 교통사고 나서 죽은 거로 깔끔하게 처리하면 더 좋았잖아. 굳이 이런 곳까지 데려와서는…….”
내 질문에 상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교통사고는 좀 식상하지 않나? 이진상이 혼자서 차 끌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평소엔 비서들에 경호원에 덕지덕지 달고 다니는데. 따로 떼 놓을 방법이 없더라고.”
나도 모르게 상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젠장. 정말 안 되는 거냐?”
“응.”
와. 이 새끼 단호한 것 보소. 아주 가차 없이 단호박이네. 그간 함께 지낸 정이 있는데 생각 좀 하고 대답을 하라고.
“후우. 그래. 안 되는 일에 고집 피우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도저히 살아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자 최소한 비굴하게 죽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죽을 거 하나만 물어보자.”
상선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 누구냐?”
질문이 의외였을까? 상선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확실히 이진상 똥 닦기로 지내기엔 아까운 인재라니까. 그놈의 학벌 우선주의만 아니었다면 좋은 인연이 됐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누구냐고. 누구 손을 잡고 있기에 이렇게 살인까지 저지른 거냔 말이다!”
상선은 무척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진선.”
“이진선? 그게 누군데.”
“아니. 내가 이진선이라고.”
응? 지금 뭐라는 거지?
“나상선이 아니라?”
“어.”
이건 또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너는 본래 이진선인데 나상선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다. 뭐 이런 이야기?”
“거참.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만드네. 그래. 나상선이 아니라, 이진선이 내 본명이라고.”
여기서 잠깐! 이진선? 이거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 같은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
“그… 그러니까. 지금…… 네가 대왕 그룹 막내아들이라고?”
“그렇다니까. 이진상도 나랑 같은 진자 돌림이잖아. 대왕 그룹 첫째는 이진상. 막내는 이진선.”
막내 동생이 형을 쏴 죽이고 재산을 강탈하는 스토리라니.
드라마, 소설에서나 봤지. 내가 이런 스토리의 등장인물이 될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내심 다른 형제들을 의심했는데 그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당사자가 5열로 들어와 있었구나.
아니 그런데 이진상 이 멍청한 놈은 제 동생도 못 알아봐?
에라 이 멍청한 새끼. 죽어도 싸다. 싸!
“이진상이 왜 못 알아봤을까? 뭐 이런 궁금증이지?”
“대충 예상해 보건대, 상선이 너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거나, 아니면 어려서 외국에서 자라나 그동안 접점이 없었던 거겠지.”
“푸흡. 어설프긴 하지만, 대충 맞아.”
내 말이 재미있어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만, 이진상처럼 두말없이 쏴 죽이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쩌면 살려줄 마음이 쪼끔은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소소한 희망은 1초도 되지 않아. 파삭 깨져나갔다.
“형.”
“어.”
“저게 뭔지 궁금하지 않아?”
“어. 안 궁금해.”
제기랄. 총 맞아 죽을 판인데 궁금하고 말 것도 많다. 이제 와 알 게 뭐야.
나상선. 아니 이진선은 내 대답은 관심이 없다는 듯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주절거렸다. 이진상이나 이진선이나 이런 건 또 형제라고 똑 닮았네.
“양자물리학은 말이지. 입자물리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어.”
도긴개긴이라며.
“우리는 오늘 여기서 역사적인 실험을 하게 될 거야.”
“무슨 실험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죽기 전에 볼 수는 있는 거냐?”
“당연하지.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이 이 실험의 참가자가 될거거든.”
“내가?”
“응.”
“왜?”
“어차피 죽을 거잖아. 그냥 ‘억’하고 죽어버리면 아쉬우니까. 죽기 전에 인류에게 봉사라도 해 달라는 거지.”
와! 이건 또 무슨 개소리더냐.
그러니까 뭐야. 이진상은 라이벌이니까 깨끗하게 죽여버린 것이고. 나는 그간 쌓인 정이 있으니 실험실 모르모트로 사용해주시겠다?
하버드급 인성에 글로벌 호구 인증샷 찍었다고 고문관 취급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병신이었군.”
“형은 자기 비하만 안 하면 나름 괜찮은 사람이야. 학벌 따위 잊어버리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버드 나온 놈이 그런 소리를 하니 별로 와닿지를 않는구나. 이제 와 자신감은 무슨. 뭔지도 모를 실험에 끌려가 곧 죽을 팔자인데.”
“평소 내가 형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야기해 볼까?”
괜히 듣고 나면 더 비참한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런 거 안 듣고 싶어.”
“개밥에 도토리라고나 할까?”
“개밥에 뭐?”
“이진상에게 붙어서 알랑방귀 뀌는 게 형 일이었잖아. 이진상 별명이 개잖아. 그 개 밥그릇에 붙어서 헐떡이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되더라고. 개밥에 도토리가 바로 저런 걸 수도 있겠구나. 정말 인생 피곤하게 산다. 뭐 이런 생각을 했지.”
비유를 해도. 개밥에 도토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기껏 도토리 취급해 놓고 막판에 위로라도 하겠다는 거냐?”
“나는 위로니 뭐니 이런 거 몰라. 여기가 살짝 고장이 났거든. 그래서 팩트만 이야기해.”
상선이가 자신의 머리 한쪽을 톡톡 건드렸다.
“사이코패스?”
“비슷하기는 한데 사이코패스는 아니고. 감정제어적인격체라는 말로 불러주라.”
감정이 어쩌고 어째? 비슷한데 다르기는 딱 봐도 미친놈이구먼.
그냥 사이코패스 해 인마. 엄한 거 가져다 붙이지 말고.
“그동안 순진한 척 행동하느라 고생깨나 했다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니가 보여준 모든 표정과 말투가 다 연기였다는 말이네.
와. 씨발. 나 지금까지 살인마 사이코패스랑 형, 동생 먹은 거였어?
소름 돋는다. 소름 돋아!
“준비가 끝났나 보네. 저기 소장님 오신다.”
역시나 대머리 바이킹은 소장이 아니었구나.
하긴 온갖 첨단 기기가 가득 찬 곳에서 총질하는 연구원이라니.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상선이와 주절주절 대화를 하다 보니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보디가드 뺨치는 자세로 상선을 호위하고 있다.
상선의 말대로 진짜 연구자 같이 생긴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진상이를 슬쩍 바라보는데 무덤덤하다.
‘이 노인네도 사이코패스야? 사람이 죽어 있는데 꿈쩍도 하질 않네.’
하긴, 생사람을 잡아다 실험체로 쓰는 인간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지.
“입자로 가동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실험 참가는 누가 할 것인지.”
연구소장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실험 준비를 알렸다.
상선이가 내 어깨를 감싸 안더니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연구소장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장을 따라 왔던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나를 격하게 포옹해 준다.
“형. 그동안 즐거웠어.”
“뻑큐다. 시발놈아.”
양손이 잡혀 있어서 손가락을 못 올리는 게 안타깝구나.
나는 그렇게 뭐가 뭔지도 모르는 실험을 위해 질질 끌려갔다.
덜컹.
뼈대만 남은 프레임형 엘리베이터가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울트라 하이테크 슈퍼 스피어에 도착을 했다.
“잠깐만. 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하잖아.”
나의 간절한 바람은 사뿐히 무시됐고 정신병자나 입을 듯한 구속복에 묶인 채 스피어 안으로 던져졌다.
“인생 진짜…… 좆같네. 뭔 실험인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냐?”
죽어가는 마당에 알게 뭐냐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험에 처할 상황이 되니 죽을 땐 죽더라도 왜 죽는지 정도는 알고 싶어졌다.
나의 외침이 컨트롤 룸에 들어가 있는 상선에게 전해졌을까. 웅웅거리는 스피커 음과 함께 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무슨 실험인지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와. 사이코패스랑 나랑 텔레파시가 통하는 거야?”
― 텔레파시는 무슨. 거기서 형이 떠드는 소리 밖에 다 들려.
“…….”
―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오늘의 실험은 양자 역학을 응용해 미시 세계의 시공간을 분리 안착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야. 실험이 성공하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 따위는 장난감 취급할 만큼 대단한 일이라고. 그야말로 노벨상감이지. 기대되지 않아?
응. 기대 안 돼.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지금 드는 생각은 수많은 후회뿐이야.
이렇게 마법사로 죽을지 알았다면 미친놈처럼 연애라도 해 보는 건데. 적금 통장 깨부숴서 여행이라도 실컷 다녀보는 건데 말이야. 정말 후회막심이다.
“재벌 4세 똥 닦기로 전전한 것도 서러운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니들 재산 싸움에 휘말려 죽어야 하는 거냐고.”
― 형. 뭔 개소리야.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라고.
이 와중에도 돈 이야기가 나오니까. 발끈하는 것 보소. 사이코패스도 돈은 사랑하는구나.
상선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 잠깐 말이 헛나갔네. 본론으로 돌아갈게. 스피어 내부의 입자로가 가동되는 순간 형은 일종의 가수분해 상태가 될 거야.
가수분해? 문돌이에게 공돌이 용어는 너무 어렵단다. 그냥 풀어서 설명해주면 안 될까?
― 나도 잘 설명해주고 싶은데. 알잖아. 나도 문돌인 거.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줘.
씨발. 그럴 거면 애초부터 설명하니 마니 설레발을 치지 말든지!
― 수고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상황에 수고는 무슨 놈의 수고!”
나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스피어 내부에 설치된 기괴한 장치들에서 눈이 멀듯 한 강렬한 빛을 쏟아냈다.
“어흐흐흐흐흑!”
살이 타들어 가고 머리가 하얗게 녹아버리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황당한 것이 '아, 이런 게 가수분해인가?' 하는 병신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도 직접 경험해 보는 거로 공돌이의 용어를 이해하는 중이랄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들었다.
밖에 뭔가 사고가 생겼는지 요란 법석을 떠는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아마도 실험에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그런데 그때 실험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소리가 재차 흘러들었다.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분명히 총소리가 분명했다.
탕탕거리는 사이사이 비명도 적절히 믹싱이 됐다.
― 빌어먹을. 이진상!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여기서 진상이가 왜 나와? 총 맞고 죽은 거 아니었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모르겠지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어 내부에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삐― ― ―
내 의식도 그와 함께 종말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