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장. 연구소 방문
“우와! 나 맞았어. 첫 번째 맞았다고! B! 내가 B라고 그랬잖아!”
비서실 최선임이자 까칠 대마왕으로 통하는 오무석 선임 비서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럼 나머지는?
“에이.”
“그럼 그렇지. 내가 뭔 복이 있다고.”
“때려치우라고 해!”
다들 손에 들고 있던 복권을 찢어발기며 화풀이를 해 댔다. 그럼 나는. 나는!
“젠장.”
나라고 별수 있나. 시작부터 꽝이다. 내 복권의 첫 번째 글자는 F.
“뻑!”
말 그대로 FUCK!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 내 당첨금 칠백조는 이제 어쩐단 말인가.
첫 번째 알파벳에 환호성을 질렀던 오무석 비서도 어느새 복권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다.
나야 10달러짜리 한 게임이지만, 다른 비서들은 다들 백 달러 이상 질렀던 모양이다.
낙심하는 표정들이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듯 아주 절절하구나.
우리의 좌절과 상관없이 복권 당첨 번호는 연이어 발표됐다.
그렇게 완성된 번호는 ‘BC037AD668’
당첨 번호는 전산 처리된 데이터로 바로 확인할 수 있기에 과연 일등이 어느 나라에서 나왔는가를 두고 다들 관심 있게 지켜봤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당첨자 정보가 건네졌다.
“Unfortunately.”
아쉬워? 뭐가?
“There's no winner.”
왓! 마더 빡커! 쉣! 크레이지!
1등 당첨자가 없다는 사무총장의 발언에 G20 국가 복권 구매자들의 한결같은 비명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상선아. 저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다시 추첨을 하나?”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는데. 상선이 녀석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이 복권은 일회성 이벤트 복권이잖아요.”
“뭐야. 그 말은 유엔에서 홀라당 다 처먹는단 이야기야?”
“결론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되겠네요.”
“와! 뭐 이런 개 사기꾼 같은 새끼들이 다 있냐. 조희팔 같은 놈은 명함도 못 내밀겠구먼!”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다들 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들을 끄덕인다. 하지만 애초에 복권을 발행할 때부터 당첨자가 없는 경우 발행처와 시행처가 사이좋게 나눠 먹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이건 뭐. 애초부터 사기를 처먹으려고 작정을 했네. 아주 글로벌하게 사기를 쳤어.”
“의심하자면 한도 끝도 없죠. 그래도 지구를 위해서 쓰일 돈 아닙니까. 말 그대로 이벤트 놀이에 잠시 참여했다고 생각하면 되죠. 좋잖아요. 지구 환경과 온난화 해결을 위해 성금을 냈다고 생각하면.”
와, 상선이 이 새끼. 하버드급 인성이란 거 취소다. 너 이제 보니 글로벌급 호구였구나.
“그나저나. 그 번호를 맞춘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번호 몇 개 놔두고 그중에 맞추는 것도 아니고. 각 번호당 따로 조합하고 또다시 조합해서 맞춰야 하는 번호라니. 애초부터 맞추게 둘 생각이 없었던 거야.”
내 말이 나름 일리 있게 들렸는지, 다들 공감하는 표정이다. 하기야 지금 이 상황에 뭔든 안 공감하겠냐만.
“괜히 땀나게 뛰어갔다 왔네.”
그래도 큰돈 잃지 않고 이 정도로 끝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
당장 이 방에만 해도 수백 달러는 거뜬히 날려 버린 글로벌 호구들이 득실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저나. 저 번호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뭐가요?”
“BC037AD668.”
“에이. 저런 번호를 어디서 봤다고 그래요.”
“그렇지? 내가 저런 번호를 알 리가 없지. 에라 모르겠다. 일장춘몽이지 뭐. 씻고 자련다.”
“네. 형. 내일 봐요.”
나는 나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다가 방금 그 번호를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해 냈다.
“아. 고구려 건국일과 망국일이구나.”
어려서부터 고구려 관련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B.C 37년과 A.D 668년은 물론이고 고구려 관련 사건 사고를 주민등록번호 외우듯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일상에선 전혀 쓸모없는 정보들이지만 말이다.
“이야. 우연치곤 기발한 우연이네.”
이미 지나간 복권 계속 떠올려봐야 뭐하겠는가.
내일부터 개진상을 모시고 그간 투자했던 실리콘 밸리 회사들을 순회해야 하니 한숨이라도 더 자두는 게 남는 일이다.
* * *
“딱쇠!”
“네. 상무님.”
“또 멍 때리고 있었냐?”
“그럴 리가요. 오늘 모셔야 할 스케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상무님이 투자하신 실리콘밸리 기업들 순회 방문하는 날이다.
“뭐. 그렇다면야. 출발 준비 끝났지?”
“물론입니다. 비서실 인원들은 선발대로 먼저 움직였습니다. 이제 상무님만 출발하시면 됩니다.”
“오케이. 그럼 가자고. 내 투자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시간이야.”
“하하하.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하지 않겠습니까. 대박에 대박이 기다릴 겁니다.”
“역시 딱쇠. 뭘 좀 알아.”
“안전띠 부탁드립니다.”
“에이 답답한데 이거 꼭 메야 해?”
“죄송합니다. 미국 경찰은 손대기가 어려워서.”
“쩝. 확실히 이런 건 한국이 좋아. 안 그래?”
좋겠지. 뭔 짓을 해도 무사통과니. 아니 내가 대신 총대를 메고 들어가야 하니 그다지 반가운 상황은 아니구나.
“첫 방문지가 어디라고 했지?”
“양자물리학 연구소입니다.”
“양자물리학? 그런데도 투자를 했었나?”
투자자가 모르는데 나라고 알 리가 있나.
“상무님이 기초과학 분야에 워낙 관심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맞아. 내가 기초과학에 관심이 많지. 우리나라가 이걸 못해서 노벨상을 못 타는 거잖아.”
오, 머릿속에 온통 여자만 가득 차 있는지 알았는데, 그래도 일반 상식 정도는 들어 있었구나.
“네. 맞습니다. 아쉬운 부분이죠.”
“하여간 정부 것들은 세금만 받아 처먹을지 알지. 일이라곤 개뿔도 못 한다니까.”
이진상 상무의 잔소리를 F.M 라디오 삼아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실리콘 밸리에 들어섰다.
“이곳인 것 같습니다.”
“이곳인 것 같습니까? 맞는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아, 말실수. 또 꼬투리 잡히겠네.
“하여간, 정확한 게 없어. 그렇게 엉성하게 일해서 월급 가치를 하겠어?”
미안하다. 월급 루팡이라서. 마음 같아선 아주 탈탈 털어먹고 싶다만 아직 루팡 2년 차라 실력이 부족한 게 한이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은 개뿔. 빨리 확인이나 해 봐.”
“넵!”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네. 연구소 앞에서 나상선이 손을 흔들고 있다.
이곳 투자처는 상선이가 선발대로 나온 모양이다.
하긴 오늘 들려야 할 곳이 못해도 열 곳은 넘으니 한 사람당 두서너 개는 담당을 해야 할 판이다.
“도착했습니다. 상무님.”
차가 연구소 입구에 멈춰서자 상선이가 후다닥 달려와서 문을 열어줬다.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뭔 소리야. 수행비서가 수행해야지.”
“네? 보통 투자처에 들리실 때는 비서실 식구들이…….”
따라 가봐야 네가 뭘 아냐며 툭하면 개무시하던 양반이 오늘따라 웬일인지 모르겠다.
이걸 반갑게 생각해야 해. 아니면 재수 없게 생각해야 해? 묘하게 헷갈리네.
“네. 수행하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차를 주차하고 연구소 입구로 후다닥 뛰어 왔다. 말로는 수행하라고 해 놓고 그새 상선이와 들어가 버렸다.
“하여간에.”
저 들쑥날쑥한 성질머리 때문에 언제고 감당하지 못할 사고를 치고 말 것이다.
이 상무 뒤를 쫓아 졸졸졸 따라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분위기가 묘하다.
위험을 알리는 워링 표시가 여기저기 심심치 않게 붙어있고, 방사능 위험을 알리는 노란색 원형 테이프 표시도 수시로 등장한다. 그것뿐인가? 위험물 또는 독극물 경고를 알리는 해골표시도 자주 눈에 띈다.
‘아씨. 여기 뭐야? 양자물리학인가 뭔가 연구하는 곳이 맞기는 한 거야?’
앞서가는 이 상무도 경고판 때문에 기분이 찜찜해졌는지 어영부영 걷는 속도가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딱쇠.”
“네. 상무님.”
“앞장서라.”
“제가 어떻게 감히.”
“쓰읍!”
“네. 상무님.”
상전 말씀에 따라 앞장을 서긴 섰는데, 이진상이 계속 나와 거리를 벌리는 게 느껴진다.
‘하여간 겁은 졸라 많아서는.’
그런데 나도 지금 겁이 나거든. 이런 장소,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봤어야 말이지.
상선아. 네가 나의 이 혼란스러움을 다스려줘야 할 것 같다.
“나 비서.”
“네. 고 비서님.”
“여기 뭐 하는 곳인지 설명 좀.”
찝찝한 기분이라도 달래놓으려면 내가 어딜 걸어 들어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 둬야 할 것 같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래도 지방잡대보다는 하버드가 뭐라도 알 것 아니냐.”
내가 스스로를 비하하며 지방잡대까지 들먹이자 상선이 이 녀석도 분위기가 찜찜했는지 대충 아는 대로 설명을 해 줬다.
“그냥 저도 주워들은 정도인데 말입니다. 무슨 입자 물리실험 어쩌고저쩌고하더라고요.”
“여기 양자물리학 연구소 아니었어?”
“양자물리학이나 입자물리학이나 도긴개긴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양자하고 입자하고 단어 자체가 틀리는구먼.
두 개가 도긴개긴이면 뭐하러 나눠서 부르겠냐고!
어제 글로벌 호구 인증샷 찍더니, 이것도 은근히 허당일세.
“상무님이 투자한 연구가 정확히 뭔지는 알아?”
내가 진지하게 또는 걱정되는 표정으로 다시 질문하자 상선이 소곤대는 말로 중얼거렸다.
“형. 나도 그 이상은 몰라요. 일단 안에 들어가면 설명할 사람이 있다고 하니. 궁금해도 좀 참아봅시다.”
“어. 그래. 그렇게 하자.”
모른다는 사람 붙잡고 계속 투덜대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일단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그저 이 불길한 통로를 어서 벗어나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