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3. 아직 안 끝났어. >
얼어붙은 대지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릴 정도로 북해는 모든 것이 차가웠다.
바람은 물론이고 대지와 나무, 심지어 호수조차도 얼어 있었다.
“저곳인가.”
사시사철 한풍이 불어서 그런지 마치 거대한 얼음성처럼 보이는 북해빙궁을 올려다보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눈이 쌓이고 녹는 걸 반복해서 그런지 반투명한 성벽은 언뜻 보면 얼음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뭐야 저 사람은?”
“옷차림이 생소한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얇은 옷만 입고도 살아 있는 거지?”
“무인이라서 그런 거 아냐? 한서불침을 이루면 웬만한 추위는 느끼지도 못한다던데.”
드높게 솟은 성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가장 큰 마을이 말이다.
아마도 북해빙궁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듯했다.
저벅저벅.
멀리서 보면 작은 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터운 털옷으로 전신을 꽁꽁 싸맨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서 수군거렸지만 벽우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인이 아니었기에 못 들은 척 지나갔던 것이다.
애초에 목표는 북해빙궁이었기에 벽우진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멈춰라!”
“움직이지 마라!”
대낮임에도 이상하게 닫혀 있는 성문으로 걸어가는데 위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경계심이 가득한 북방 특유의 말투가 벽우진에게 쏘아졌던 것이다.
“시끄러워.”
“어?”
“뭐가 어떻게···.”
누가 봐도 수상한 옷차림이었기에 매서운 눈으로 벽우진을 살피던 두 성문위사가 이내 허물어졌다.
질식사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이 허옇게 뜬 채로 무기력하게 성벽 아래로 떨어졌던 것이다.
쿠웅! 쿵!
절명한 둘은 이내 땅바닥 위로 곤두박질치며 차가운 대지를 피로 적셨다.
그러나 벽우진은 둘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대신 얼음처럼 서늘한 한기를 뿌리는 거대한 성문에 손을 댔다.
그러자 강철로 이루어진 두꺼운 성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수많은 잔금과 함께 성문이 허물어졌다.
순수하게 내공만으로 철문을 박살낸 것이었다.
“적이다!”
“습격이다!”
북해의 패자임에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지 성문이 부서지기 무섭게 안에서 소란이 일었다.
성문이 박살나자 곳곳에서 적의 습격을 알렸던 것이다.
동시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적이라며?”
“한 명이 다야? 나머지는?”
경종소리에 달려 나왔던 북해빙궁의 무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벽우진 하나만 달랑 보이니 당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벽우진을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이들도 있었다.
“서, 설마?”
“왜 그래?”
“아니, 그는 여기에 있을 수가 없는데. 곤륜산에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
갑자기 오한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떠는 동료의 모습에 옆에 있던 무사가 인상을 팍 쓰며 물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지 격렬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벽우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스르릉.
그러는 사이 검집에 얌전히 있던 무상검이 저절로 떠올랐다.
다시 뒷짐을 지고 있는 벽우진을 대신해 알아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설마 이기어검?”
“이기어검을 펼칠 정도의 고수라고?!”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무상검이 번뜩였다.
하늘 높이 솟구친 다음에 검기를 사방에 쏟아냈던 것이다.
마치 장마 기간의 폭우처럼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검기의 폭풍의 멍하니 서 있던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전부 다 쓸려나갔다.
저벅저벅.
벽우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시신들을 지나 북해빙궁의 안으로 묵묵히 걸어가기만 했다.
“막아···!”
계속 해서 그의 앞을 가로 막기 위해 적들이 나왔지만 누구 하나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벽우진을 호위하는 무상검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쿠콰콰쾅!
물론 적진 한 가운데인 만큼 북해빙궁도의 숫자는 많았다.
중원에서 패퇴한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끊임없이 몰려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숫자는 벽우진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무상검이 감당하지 못하는 건 강환으로 터트려 버렸기에 누구도 벽우진의 근처로 다가오지 못했다.
휘이이잉.
느릿하게 외궁을 지나 내궁으로 들어가자 수백 명의 무인들이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북해빙궁의 핵심들이 모두 다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젊은 층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노인이거나 십대의 어린 아이들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어리다고 해서 살기를 띠지 않는 건 아니었다.
“패선.”
“묘하게 눈에 익은 이들이 있는 걸 보니 패잔병들이 용케 잘 돌아간 모양이야.”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수하들 태반이 죽었는데 대화를 하고 싶은가보군.”
벽우진의 시선이 중앙의 젊은 여인에게로 향했다.
곤륜파를 공격했던 북해빙궁주와 똑 닮은 여인이었다.
“···대화는 필요없다, 이건가?”
“우리가 대화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리고 피해자처럼 말하는데 먼저 시작한 쪽은 그쪽이야. 가만히 있는 본 파를 공격한 것 또한 그쪽이고.”
벽우진이 서늘한 눈빛으로 북해빙궁주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움찔거렸다.
눈빛에서 벽우진의 결심을 읽을 수 있어서였다.
“그건···.”
“참 웃겨. 자기들은 침공해도 되지만 반대로 공격받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아니,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을 안 한 건가?”
“······.”
북해빙궁주가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물론이고 장로들 역시 당연하게 생각했다.
본궁이 습격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뭐, 이해는 가. 지금까지 이랬던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나 위험한 짓이지.”
“조, 좋은 방향으로 대화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말도 있듯이···.”
“그러다가 나중에 뒤통수치려고? 한 오십 년 뒤에?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
벽우진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굳이 더 들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북해빙궁주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런 말도 못했던 것이다.
“말이 너무 심하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벽우진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나이 지긋한 노인이 열불을 토하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상검이 벼락같이 날아가 머리를 꿰뚫었던 것이다.
차차창!
그 모습에 북해빙궁주의 호위무사들이 대경하며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이렇게 느닷없이 공격할 줄은 몰라서였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도록. 어쩌면 너희들에게 당한 수천, 수만 명의 원한이 나라는 존재를 탄생하게 한 걸지도 모르니.”
“죽여라!”
“모두 공격해!”
벽우진의 말에서 조금의 여지도 없다는 걸 깨달은 북해빙궁주가 결국 공격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결국 싸움뿐이었다.
벽우진을 죽이거나 자신들이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우우우웅!
다만 안타까운 건 그들의 생각과 달리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년마교도 무너뜨린 벽우진에게 전쟁의 피해도 제대로 복구하지 못한 북해빙궁은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꽈과과광!
벽우진의 주위에서 생성된 강환은 사정없이 적들을 폭격했다.
사람이고 병장기고 건물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파괴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인가 싶었던 것이다.
콰아앙!
하지만 그 생각도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날아온 강환에 그녀의 육신 역시 터져나갔던 것이다.
쿠그그긍!
“이걸로 빚은 다 갚았나.”
허물어지는 거대한 얼음성을 내려다보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무상검에 타고서 서서히 무너지는 북해빙궁을 주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양팔에 있던 일월쌍환이 갑자기 진동했다.
무언가를 경고하려는 듯 벽우진을 향해 애달프게 울었던 것이다.
“아직 안 간다니까. 불러도 안 가.”
벽우진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상소로운 기운이 하늘에 넘실거리는 게 보였지만 벽우진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제 막 빚을 갚았는데 떠나긴 싫었다.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의 도인이라면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가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평범한 도사들과는 격이 다른 이가 벽우진이었다.
등선하는 시기는 자신이 정할 생각이었다.
“토사구팽도 아니고. 다 써먹었으니 이제 회수하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콧방귀를 낀 벽우진이 무상검을 돌렸다.
아직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도, 지켜봐야 할 이들도 많았다.
천명을 끝냈으니 이제는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자꾸나.”
쌔애애액!
손짓하는 무언가를 외면하며 벽우진이 무상검의 검극을 돌렸다.
목적지는 곤륜산이었다.
신강의 천산을 넘어 북해의 빙궁까지 경유한 벽우진은 곤륜산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있어 집이나 마찬가지인 곤륜산에 드디어 복귀했던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벽우진은 곤륜산이 보이자마자 포근함을 느꼈다.
마치 엄마 품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집이 최고지.”
“오셨습니까, 사형.”
“응? 네가 왜 여기 있어?”
“왠지 모르게 지금쯤이면 사형께서 오실 것 같아서요.”
곤륜산만큼이나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서진후가 말했다.
그런데 얼굴은 좋아 보였는데 이상하게 많이 늙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 비천단의 약력이 남아 있을 텐데도 말이다.
“사부님!”
“어?”
“저희 왔어요!”
“저도 왔습니다, 사부님!”
무상검에서 훌쩍 내려오기 무섭게 사 남매와 송찬승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서예지와 양일우, 양이추 형제도 보였다.
이제는 제법 명문제자 같은 티가 나는 모습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서진후에 이어 제자들이 달려오자 정말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눈치를 봐.”
“어, 그게요···.”
마지막으로 가장 어른스러운 도일수가 배혁문을 챙기며 벽우진에게 다가왔다.
쭈뼛거리는 배혁문을 도일수가 나서서 데리고 왔던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지 않느냐. 사백이라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니지.”
“네에.”
“누가 괴롭혀? 누구야? 나한테 말해!”
이제는 처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벽우진 앞에서는 어리광쟁이가 되는 심소혜가 안긴 채로 배혁문에게 말했다.
누군지 말만 하면 귀싸대기를 날릴 기세였다.
“그런 거 아냐.”
“응? 나 내려가 있다고 너무 서먹하게 대하는 거 아냐? 누나 서운하다?”
심소혜가 배혁문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일은 다 보신 겁니까?”
“응. 며칠 뒤에 누님이랑 민호가 올 거야. 짐을 잔뜩 들고서. 귀한 거니까 잘 챙겨둬.”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래주면 좋고.”
벽우진이 흐뭇한 얼굴로 제자들과 시선을 하나하나 맞췄다.
오랜만에 다 모인 것을 보자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무럭무럭, 쑥쑥 자라거라.’
평화로운 강호와 달리 벽우진은 곤륜산에 돌아왔음에도 분주했다.
아직 그는 목표해두었던 일이 하나 남아 있어서였다.
“음. 여기가 좋으려나? 너무 외진 것 같은데. 딱 내가 갇혔던 곳이 적당한데 말이지.”
이른 아침부터 벽우진은 무상검을 타고 곤륜산 곳곳을 날아다녔다.
58년 동안 그가 강제로 갇혀 있던 시공간의 진을 설치할 적당한 곳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너무 드러난 곳이면 호기심 많은 이들이 실수로 들어갈 수도 있기에 벽우진은 신중하게 위치를 고민했다.
자신처럼 재능은 있되 잔머리를 굴리는 이가 숨어서 농땡이를 피울 법한 곳을 찾았던 것이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암!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위치가 절묘했단 말이지. 설마 시조도 나와 비슷한 성격이셨나?”
웅웅웅!
벽우진의 혼잣말에 일월쌍환이 대답하듯 공명음을 토해냈다.
그와 달리 일월쌍환은 곤륜파의 시조도 알고 있어서였다.
“근데 너희 둘 너무 신난 거 아냐? 내가 등선하면 다시 오랜 세월을 갇혀 지내야 할 텐데.”
웅웅!
일월쌍환이 상관없다는 듯이 진동했다.
둘에게 기다림이란 익숙한 일이어서였다.
오히려 기다림이 있기에 둘은 지금의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녀석들.”
신난다는 듯이 공명음을 토해내는 일월쌍환을 쓰다듬으며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일월쌍환과 달리 오른쪽 허리춤에 메어져 있는 신마검은 죽은 듯이 찌그러져 있었다.
매일 일월쌍환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이 작업만 끝내면 강호유람이나 가자.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돌아다녀보겠어? 너희들도 좋지?”
우우우웅!
찬성한다는 듯이 날뛰는 일월쌍환을 느끼며 벽우진은 곤륜산 곳곳을 쏘다녔다.
< 외전. 3. 아직 안 끝났어.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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