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24화 (324/325)

< 외전. 2. 각자의 꿈. >

공간검 일격에 천여 명이 넘는 마인들이 즉사했다.

병기며 육신이며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양분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마인들은 투지를 잃어버렸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벽우진의 모습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수, 수뇌부들은 왜 안 오는 거야!”

“비상종을 친 지가 언제인데!”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여태껏 오지 않은 수뇌부들을 욕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노인과 노파가 날뛴 지 한참이나 지났어도 수뇌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추가되는 인원들로 인한 희생자만 늘어갔다.

투둑. 투두둑.

벽우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체의 산이 쌓였다.

조금의 사정도 없이 무자비하게 마인들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은 손을 쓰기 싫다는 듯이 단 일검에 가로 막는 이들을 쓸어버렸다.

“우리는 그냥 네 뒤만 따르면 될 것 같다.”

“주인공에서 갑자기 들러리가 된 듯한 느낌인데.”

“아쉬우세요?”

“조금. 이제 좀 몸이 풀리나 싶었는데.”

연진청이 벽우진의 뒤를 따르며 자신의 애검을 쓰다듬었다.

주변에서는 단말마와 비명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지만 그녀는 눈 하나 끔뻑이지 않았다.

적에게 인정을 느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어서였다.

더구나 이곳은 마도의 종주라 불리는 천산이었다.

“기회가 또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장로원의 노마두들도 안 보이는데.”

“그냥 싹 다 날려버릴 것 같은데?”

연진청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느릿하게 천산을 오르던 벽우진은 정오가 되기 전에 정상에 올랐던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나약한 중원 놈들에게 당하다니! 원통하도다!”

“천마시여!”

절대 정상만은 침범 당하지 않겠다는 듯이 천년마교는 모든 전력을 끌어 모아 비장의 한 방을 준비했다.

어떻게든 세 사람을 죽이겠다는 듯이 은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천년마교의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로 천년마교가 심리적으로 몰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쿠그그긍!

그러나 그 노력은 끝내 실패로 끝났다.

무지막지한 힘을 앞세운 벽우진이 그들이 준비한 모든 것을 산산조각 냈던 것이다.

더불어 정상에 있던 제단 역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네.”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천년마교를 박살낼 줄이야.”

당민호와 연진청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들이 천산의 정상에 올라와 있는 게 믿겨지지가 않아서였다.

게다가 사방에는 장로들과 마인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다가 모조리 죽은 것이었다.

“이런 역사도 있어야지. 늘 중원만 당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내 복수는 정당해.”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참고로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무상검을 납검하며 말하는 벽우진을 향해 당민호가 콧대를 세웠다.

벽우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역시 천년마교를 정복하는데 일조한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역사서에도 기록이 될 터였다.

“나도 기록에 남는 건가?”

“당연하지요. 저희 셋이 함께 이룩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지분이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 말이지.”

“중요한 건 같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같이.”

당민호가 연진청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귓속말을 하듯 눈치를 보며 작게 말했던 것이다.

“호호호. 그나저나 벽 동생은 기분이 어때? 처음으로 천산을 정복한 남자잖아.”

“남자라기보다는 도사가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그냥 시원합니다. 이제야 좀 남아있던 찝찝함이 가셨다고나 할까요.”

“도사는 뭐 남자 아닌가. 근데 내가 보기에는 도사보다는 그냥 신선 같아. 기물도 가지고 있고. 사실 이런 신위를 보이는 존재를 인간의 범주 안에 넣기가 좀 그렇지 않아?”

“그렇습니까?”

“난 애들 걱정을 충분히 이해해.”

벽우진이 머쓱하게 웃었다.

면전에서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진청과 당민호는 진지했다.

이러다가 훌쩍 우화등선을 할 것만 같아서였다.

“친구가 강해서 좋기는 한데, 너무 빨리 헤어지지는 말자. 우리 다시 만난 지 아직 3년도 안 됐다.”

“58년 채울 거라니까. 그 전에 마교의 무공서고부터 부수고.”

“오, 아직 재미있는 게 남아 있었네.”

“또 있어. 여기까지 왔는데 싹 다 털어봐야 하지 않겠어?”

두 사람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무엇을 털어야 한다고 정확히 말하지 않았건만 둘은 이미 어떤 건지 알아차린 듯했다.

“이거 전리품이 상당하겠는데.”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 있겠어.”

둘 다 안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모습에 벽우진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곤륜파가 과거의 성세를 되찾으면서 사라졌던 마을 역시 다시 일어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금세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하나의 명물이 있었다.

운룡객잔(雲龍客棧).

천하제일문이라 불리는 곤륜파 장문인의 적전제자들이 직접 운영하는 객잔이었다.

“어후. 오늘도 정신없이 지나갔네.”

“장사가 안 되는 것보다는 낫지 뭐.”

“우리는 처음부터 잘 됐잖아?”

지쳤다는 듯이 의자에 널브러지던 심대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른 객잔들과 달리 운룡객잔은 개업 하자마자 장사가 잘 되어서였다.

물론 처음에는 패선의 제자들이 차린 객잔이라는 소문에 온갖 군상들이 모여 들었다.

어떻게든 곤륜파에 줄을 대보려고 별의 별 사람들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반년이 지난 지금은 맛 때문에 운룡객잔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부님 덕분이지 우리가 잘해서는 아니지.”

“배경도 능력이랬어.”

“정후가?”

“응.”

심대혜가 피식 웃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장사로는 석정후가 선배였다.

또한 수완으로 따져도 석정후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 그런 말은 하지 마.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말이니까.”

“내가 애인가? 나도 이제 다 컸어.”

“그런 말 하는 것 자체가 덜 자랐다는 거야.”

“나는 누나 말에 동의.”

“나도나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심소천과 심소혜가 안으로 들어왔다.

둘 다 하루 업무를 정리하고서 회의실로 모인 것이었다.

“뭐야?”

“저 봐. 마음에 안 들면 주먹부터 들잖아. 어른은 절대 저러지 않지.”

부르르르!

심소천의 말에 심대현이 주먹을 떨었다.

하지만 누이가 있기에 차마 휘두르지는 못했다.

대련이라면 모를까 함부로 동생을 때렸다가는 심대혜의 응징이 있을 게 뻔했다.

“아오, 진짜!”

“그쯤 해. 회의하는 중에 뭐 하는 짓들이야?”

“알았어, 누나.”

심소천이 냉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심소혜가 조용히 착석했다.

“매출은 어때?”

“순조롭게 상승 중이야. 일 매출이 떨어질 때도 있기는 한데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오히려 한 달을 기준으로 삼으면 조금씩 오르고 있어.”

“손님들의 반응은 어때?”

“좋아.”

심소혜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음식의 맛은 물론이고 객실 반응 또한 이보다 좋을 수가 없어서였다.

“다행이다. 우리 남매가 운영하는 만큼 사문에 먹칠하면 안 된다는 거 다들 알고 있지?”

“이제는 귀에 딱지가 생길 거 같아, 누나.”

“우리들도 누나랑 같은 마음이라고. 사문은 물론이고 사부님께 누를 끼치기 싫어. 객잔을 운영하는 것도 사실 사부님께서 많이 양보해주신 거니까.”

귀를 후비는 심대현과 달리 심소천이 꽤나 의젓하게 말했다.

어느새 십대 후반이 된 심소천은 제법 어른 티가 났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

“초심을 늘 품고 있어. 객잔을 차리는 건 우리 남매 모두의 꿈이었잖아.”

“이렇게 빨리 이룰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심대혜가 활짝 웃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아갈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객잔주는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도 바쁜 마당에 저축은 언감생심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벽우진을 만나고 모든 게 달라졌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도 우리가 꿀 꿈은 많아.”

“네 장가도 있고 말이지.”

“나는 도사라니까. 그리고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가려면 누나가 먼저 가야지.”

심대현이 얼굴을 붉혔다.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무언가 상상한 모양이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잖아. 언제라도 좋은 인연이 생긴다면 고민하지 말고 가라고 말이야.”

“정작 사부님은 아무런 생각도 없으신 거 같은데.”

심대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예리한 그의 직감은 보타문주가 벽우진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철벽이었다.

“보이는 모습과 달리 나이가 많으시니까.”

“상대는 많잖아. 보타문주님도 계시고 소소선자께서도 얼마 전부터 찾아와 머물고 계시고.”

“젊은 처자들도 많고 말이지?”

심대혜가 싱긋 웃었다.

정작 벽우진은 경내에 머무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많아졌다.

괜히 천하제일문파가 아니라는 듯이 매일 같이 손님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을 운룡객잔 역시 적지 않게 보고 있었고 말이다.

“사저가 고생이 많으시겠어.”

“청혼하는 후기지수가 상당한 모양이야.”

“누나도 제법 되잖아?”

“나는 사저와 비교할 수 없지. 반딧불이 아무리 밝아봤자 달과 비교할 수 있겠어?”

“비유 적당하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하는 심대현의 옆구리를 심대혜가 사정없이 꼬집었다.

그래도 혈육인데 조금은 고민해도 될 법한데 그러지 않아서였다.

근데 재미있는 건 심소천과 심소혜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진짜 막연하기만 했었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주역이 될 때가 되어야 천하제일문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우리 사부님은 대단해.”

끝은 결국 벽우진이었다.

아련한 표정을 지었던 심대현이 벽우진을 찬양하는 막내의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현재 곤륜파는 벽우진이 전부 다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 이어가야지. 이 성세가 백년, 천년 동안 이어지도록.”

“오빠만 주의하면 돼.”

“이게.”

“흥! 이제는 쉽게 안 맞아! 보신경은 내가 오빠보다 훨씬 나으니까!”

심소혜가 심대현을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일은 고단했지만 이렇게 남매가 다함께 모여 떠들 수 있다는 게 네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근데 정말 괜찮은 거겠지.”

“홀연히 떠나실까 봐 걱정이 되기는 해.”

밝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서진후와 마찬가지로, 아니 다른 이들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벽우진이 곤륜파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신 양일우가 대제자로서 대외적으로 나서는 일이 많았다.

“아직 우화등선 하시면 안 되는데.”

“이제 함께 한지 3년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사부님 못 보내.”

심소혜가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벽우진과의 이별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녀에게 있어 벽우진은 사부이자 부모였다.

벽우진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생각 난 김에 내일 올라갈까? 직원들이 있으니 반나절 자리를 비운다고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으니까.”

“그럴까?”

“나는 찬성!”

“나도 찬성이야!”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드는 동생들의 모습에 심대혜가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사문이 그리운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곤륜파는 그녀에게 있어 고향이자 집이었다.

“아, 내일 찬승이 온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장 사제 집에 다녀오는 거지?”

“응. 아무래도 장 사제와 가장 각별했던 사이였으니까.”

다들 장하삼을 떠올리는 모양인지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잠시뿐이었다.

산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었다.

“내일 찬승이 오면 같이 올라가자.”

“그래.”

“일단 전서구부터 보내자. 사부님과 엇갈리면 안 되니까.”

“헤헤! 신난다! 안 그래도 사부님 보고 싶었었는데.”

벽우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심소혜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에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 외전. 2. 각자의 꿈.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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