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23화 (외전) (323/325)

< 외전. 1. 끝난 줄 알았지? >

이남일녀가 천산의 초입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구성이 조금 신기했다.

젊은 청년을 선두로 두 명의 노인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넌 여기에 천산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

“천년마교에 한이 맺힌 이들은 우리뿐만이 아니거든. 그리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잖냐.”

“여자? 천년마교에 한을 품을 여인이 있나? 비구니는 여자가 아니니 제외하고.”

부상은 회복되었지만 이상하게 주름이 늘은 당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런 곳이 한둘이겠어? 중요한 것은 도움을 받았다는 거지.”

“누님은 안 궁금하오?”

“딱히. 말해줄 거였으면 벽 동생이 진즉에 말해줬겠지. 안 그래?”

왠지 모르게 들뜬 기색의 연진청이 웃으며 벽우진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벽우진이 옅게 웃었다.

“역시 누님이세요.”

“그럼. 꼭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적당히 넘어가주고 그래야지. 근데 신기하다. 내가 천년마교의 본진인 천산에 올 줄이야.”

거대하다 못해 웅장한 천산을 올려다보며 연진청이 눈을 빛냈다.

늘 섬에서만 살았기에 그녀에게는 바다가 더 익숙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앞에 수해(樹海)가 펼쳐져 있었다.

곤륜산도 엄청나게 넓다고 생각했는데 천산은 그보다 더 했다.

“흥분되지 않습니까? 중원무인들 중에 누가 천산까지 와봤겠습니까? 천하에 안 가본 곳이 없다던 개방도들도 여기는 못 와봤을 겁니다.”

당민호가 히죽 웃었다.

그 역시 천산에 왔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곳이 적진 한 가운데임을 그는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우리 꼭 최후의 영웅들 같지 않아? 결사대라던가.”

“어쩌면 역사에는 어리석은 만용꾼들이라고 남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일단 역사에는 남는다는 거잖아.”

“죽을 날도 얼마 안 남기도 했고 말이죠.”

당민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애초에 그는 죽음도 감안하고 왔었다.

객관적으로 단 셋이서 천년마교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태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 죽으러 온 거야?”

“정확하게는 한 방 제대로 먹이려고 온 거죠. 죽으면 어쩔 수 없고요. 본가를 떠날 때 유서도 남기도 왔습니다.”

“난 안 썼는데.”

“주혜도 대충 알지 않을까요. 어쩌면 지금쯤 보타문도들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넌 말을 참 얄밉게 잘 하는 것 같아. 매를 버는 성격이라고나 할까?”

연진청이 눈을 곱게 흘겼다.

그러면서 손을 들어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민호의 등짝을 때릴지 말지에 대해서 말이다.

“산 자체가 거대 마을이니 아래에서부터 쓸고 올라가면 될 거 같습니다.”

“정면돌파?”

“안 쪽의 길은 몰라. 내가 받은 정보는 여기까지라서. 그러니 단순히 부수고 올라가야 해.”

“그거 재미있겠는데.”

당민호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다른 곳도 아닌 천년마교를 정면으로 돌파한다고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늘 천년마교에게 침공을 당하는 쪽이었던 게 바로 중원무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였다.

“아마 천년마교를 습격한 중원무림인은 없었을 거야.”

“있긴 했을 겁니다. 다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겠죠.”

“우린 다르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있으니까요.”

벽우진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십만대군이 달려들어도 모조리 베어버릴 수 있다는 듯한 미소에 연진청이 말갛게 웃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여기에서 죽어도 괜찮아. 이미 살 만큼 살았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무사히 되돌아갈 테니까요.”

“정 불리하다 싶으면 내빼면 되지. 우리 셋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빠져 나올 수 있다.”

당민호가 장비를 확인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개인적으로 챙길 수 있는 장비는 모조리 챙겨왔다.

거기다 사천당가에서도 특별관리 하는 오대극독 역시 최소한의 양만 남겨두고 모두 다 가져온 상태였다.

“전부 다 죽일 생각은 없어. 복수를 하러 왔지만 똑같은 놈들은 될 수 없으니까.”

“일반 양민은 죽이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 물론 천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좀 있겠지만.”

“마인만 죽이자고, 마인만.”

벽우진이 허리춤에 메어져 있는 신마검을 툭툭 건드렸다.

마인이라면, 그것도 천년마교에서 제법 직책이 있는 이라면 이 신마검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전에 벽우진부터 알아보겠지만 말이다.

“어, 어?!”

천산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입질이 왔다.

검과 창을 메고 있고 있던 이들이 벽우진을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던 것이다.

“시작이로구나!”

그 모습에 당민호가 손을 흔들었다.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던 바늘 모양의 작은 암기를 날린 것이었다.

물론 바늘 끝에는 당연히 독이 묻어 있었다.

“끄르륵!”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암기가 목에 박힌 순간 대여섯 명이 동시에 입에서 게거품을 물었다.

누가 봐도 중독당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절명했던 것이다.

“너무 팍팍 쓰는 거 아냐?”

“충분히 챙겨 왔다. 내가 왜 평소에는 메지 않는 가방을 주렁주렁 달고 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죽일 수 있을 때까지는 모조리 죽일 거다.”

당민호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오는 족족, 발견하는 족족 멱을 따겠다는 기세가 완연했다.

“당분간은 내가 나설 일이 없겠는데?”

“가장 연장자이시지 않소이까, 누님은. 그러니 좀 쉬고 계시구려.”

“이 나이에 이런 배려라니. 나 설레는데?”

든든한 당민호의 말에 연진청이 기분 좋다는 듯이 웃었다.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여자라고 이런 배려가 그녀는 싫지 않았다.

“적이다!”

“패선이 쳐들어 왔다!”

뎅뎅뎅뎅!

대놓고 들어와서 그런지 이내 곳곳에서 비상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소리에도 벽우진은 뒷짐을 지고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천산의 정상이었다.

곤륜파가 정복당한 것처럼 그 역시 오늘 천산을 정복할 생각이었다.

“기운은 참 좋은데 말이지.”

“이 좋은 기운을 마기 따위로 치환하다니.”

“늘 사람이 문제지. 산은 죄가 없어.”

“그래도 한 번쯤 불태우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당민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언제나 중원무림만 당하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봐서.”

“해보고 싶지 않아? 우리 신조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냐?”

비상종 소리를 들은 것인지 마인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마인들이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있었다.

정마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대부분이 섭무천과 벽우진의 대결을 멀리서나마 봤었다.

그렇기에 감히 먼저 달려드는 이들은 없었다.

“주, 죽여라!”

“뭣들 하는 것이냐! 적이 쳐들어 왔는데!”

우르르 몰려나오기는 했으나 누구도 선뜻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벽우진이 보여주었던 신위가 너무나 뚜렷하게 남아 있었기에 감히 공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다들 눈치를 살폈다.

숫자를 보고 벽우진이 알아서 물러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놈들! 이곳이 어디라고!”

“어디긴. 마교종자들의 총본영이지.”

“컥!”

호기롭게 나섰던 중년의 마두 하나가 얼굴을 시커멓게 물들인 채로 허물어졌다.

당민호의 암기에 중독되어 즉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스르릉.

“오늘은 지난번에 추지 못한 칼춤을 제대로 출 수 있겠네.”

전대 검후인 연진청이 빙그레 웃으며 검을 뽑았다.

오랫동안 검집 안에서 잠만 자고 있던 애검을 정말 오랜만에 뽑아들었던 것이다.

연무야 비천단을 흡수한 후 쉬지 않고 했지만 실전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렇기에 연진청은 오늘 이곳에서 마음껏 검을 휘두를 작정이었다.

“그동안 못 풀었던 한을 풀면 됩니다, 누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연진청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리고 지옥이 도래했다.

무시무시한 검격이 팔방을 휩쓸었던 것이다.

“끄아악!”

“커헉!”

“왜 여기까지···.”

연진청의 검에서 뿌려지는 검기의 파도에 마인들이 쓸려나갔다.

거대한 해일이 해변을 휩쓰는 것처럼 고수, 하수 할 거 없이 모조리 쓸어버렸던 것이다.

호신강기를 펼쳐도 잠시뿐이었다.

그녀의 검해는 그 어떤 호신강기도 갈가리 찢어버렸다.

“어후. 화끈해라.”

“그동안 쌓인 게 많았을 테니까. 게다가 상대가 상대이기도 하고.”

“마음껏 펼쳐도 상관없는 족속들이긴 하지.”

쩌어어엉!

천년마교의 하급마인들을 도륙하던 연진청의 검이 처음으로 막혔다.

드디어 중진급이라 할 수 있는 상급마인들과 육대마가의 마인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도 얼마가지 못했다.

쿠콰콰쾅!

검기가 검강으로 바뀌자 제아무리 상급마인들도 별 수 없었다.

하급마인들과 마찬가지로 휩쓸려 죽어나갔던 것이다.

반면에 연진청은 검무를 추듯 너울너울 움직였다.

하지만 선녀처럼 아름다운 검무와 달리 주변은 쑥대밭으로 변했다.

“크윽! 저 년이!”

“한 명한테 이리로 밀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 모자란 것들!”

이윽고 육대마가의 수뇌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하들이 모조리 썰려 나간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그 뒤로 오대무력조직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내 차례군. 사천당가의 무서움을 영혼에 새겨주마.”

확연히 늘어난 적들의 숫자에 당민호가 몸을 날렸다.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워낙에 숫자가 많았기에 서서히 지치는 게 보였다.

연진청이 이룩한 경지는 분명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민호는 시기적절하게 합류했다.

“왔어?”

“슬슬 지겨워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겹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땀이 났어.”

“제가 보기에는 식은땀 같은데요?”

파파파팟!

당민호가 씨익 웃으며 양손을 펼쳤다.

예의 사천당가가 자랑하는 암기가 뿌려진 것이었다.

다수를 상대할 것이 분명하기에 당민호는 가벼우면서도 많이 챙길 수 있는 암기 위주로 챙겼는데 대부분이 배심정(背心釘)이나 우모침(牛毛針) 형태였다.

아무래도 두 종류의 암기가 많이 챙기기에 유리해서였다.

투두둑! 투둑!

유려하게 휘둘러지는 손길에 따라 수십 명이 고꾸라졌다.

가느다란 침이라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연진청이 시선을 제대로 끌어주었기에 쉽게 중독 시켜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죽은 거야?”

“독이다! 시신을 만지지 마라!”

“이미 늦었어.”

갑자기 쓰러지는 동료들의 모습이 우왕좌왕하는 마인들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며 당민호가 말 그대로 살풀이를 했다.

사천성에서 당한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었던 것이다.

부상자는 필요 없고 오직 사망자만 필요하다는 듯이 당민호는 살벌하게 암기를 뿌렸다.

“끄윽!”

“켁!”

사정없이 뿌려지는 암기세례에 마인들은 속절없이 절명했다.

따로 독공을 익힌 이가 없기에 피해가 더욱 컸던 것이다.

그나마 수준이 높은 이는 진기를 이용해 독을 밀어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은 그냥 죽어나갔다.

“뭐해! 공격하지 않고!”

“적은 고작 세 명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이는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천산을 침범당한 만큼 죽더라도 영역을 사수하겠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잠시뿐이었다.

저벅저벅.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벽우진이 나서자 인간 벽처럼 세워진 마인들이 한순간에 쓸려나갔다.

무상검을 한 번 휘두르기 무섭게 모조리 양분되었던 것이다.

“어, 어···.”

“미친···.”

< 외전. 1. 끝난 줄 알았지?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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