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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322화 (완결) (322/325)

< 제 99장. 종전(終戰). -02(완결) >

연진청이 묻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보면 절묘한 순간에 누군가가 찾아온 것이었다.

“접니다, 태상가주님.”

“총군사?”

“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왜 벌써 나왔어? 아, 일단 들어와.”

생각지도 못한 이가 등장해서일까.

당민호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조금은 지친 기색의 제갈현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도 같이 계셨군요.”

“오랜만이에요.”

꾸벅.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던 제갈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진청과 현주혜가 함께 있는 모습에 조금 당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러한 기색은 사라졌다.

대신 역시나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불편해서 말이지요.”

“이해합니다.”

직설적인 말이지만 이보다 더 명확한 말도 없었다.

그렇기에 제갈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연진청을 쳐다봤다.

“돌아가는 상황도 썩 좋지 않다고 들었고요.”

“썩 좋은 정도가 아니라 개판입니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염치는 있어야 하는데.”

당민호가 다시 씩씩거렸다.

만약 벽우진이 없었다면 지금은 다들 관에 들어가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은근슬쩍 견제하는 모습에 당민호는 그나마 있던 정나미도 모조리 떨어졌다.

“안 그래도 당 가주께서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이건 아니라고 하면서요. 후대에 또 이런 전쟁을 남겨줄 거라면서 말이지요.”

“내 말이!”

“근데 분위기가 묘했습니다.”

“묘하기는. 일단 급한 불을 껐으니 이제 제 안위부터 챙기기 시작하는 거지. 후대의 일은 후대에게 떠넘기고 말이야. 삭초제근을 해도 모자랄 판에.”

열불을 토하는 당민호를 보며 제갈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당민호의 생각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일단 원정만 하더라도 들어가는 자금이 기하급수적일뿐더러 피해 역시 상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요.”

“그걸 몰라? 다만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거야. 조율이 아니라 그냥 싫다는 거잖아. 어쭙잖게 우진이를 견제나 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혜량 장문인께서도 한 마디 하셨습니다. 현재의 승리는 벽 장문인 덕분인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앞으로의 곤륜파가 두려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벌써부터 당대의 천하제일문은 곤륜파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후대 역시 탄탄하지요. 다른 문파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제갈현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외견으로 보면 벽우진의 전성기는 지금부터 적어도 삼십 년은 이어질 터였다.

전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그가 다음 세대까지 아우른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천하제일인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견제가 답은 아니지. 대화가 안 통하는 것도 아니고.’

세간에는 괴팍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벽우진은 의외로 사리분별이 확실한 성격이었다.

또한 대화도 은근히 잘 통했고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림맹의 지휘부는 그 사실을 보지 못했다.

“그건 지들 능력이 부족해서지. 왜 남을 탓해? 게다가 현재의 곤륜파는 폐허 속에서 여기까지 올라왔어.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말이지. 아, 본가도 조금은 지분이 있지.”

“인정.”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천당가의 도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였다.

지금도 든든한 우방이었고.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으니까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걸 신경 쓸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배은망덕한 것들.”

“그래도 모두가 같은 생각인 것은 아닙니다.”

제갈현의 말에도 이미 비틀린 당민호의 입매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모습을 법무와 금강신니가 봤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아마 둘 다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을 추모하지는 못할망정.’

당민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록 어제 전장에 있지는 못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먼저 소식을 전해 들었다.

금강신니와 낭왕, 냉하성이 구마와의 전투 끝에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회의실에서 누구 하나 그들의 죽음에 대해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일단 무림맹은 해산인가?”

“우선은 그 수순을 밟을 것 같습니다. 천년마교를 패퇴시켰으니 존재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지금쯤 한창 논공행상과 전리품에 대해 떠들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갈현이 무거운 어조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어째 날이 갈수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점점 더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인간이 다 그렇지. 욕망과 욕심은 인간의 본능이니까. 다 아니까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 천년마교 놈들은 어디로 가고 있어?”

“천이각을 통해 파악한 바에 의하면 서장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서장을 경로해서 신강으로 돌아갈 듯합니다.”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는 모양이로군.”

“이대로 지켜보기만 할 거냐?”

당민호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벽우진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연진청이 궁금증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안 그래도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럴 수는 없지.”

“역시 내 친구라니까!”

“받은 게 있는데 당연히 돌려줘야지.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당연하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난 너와 함께 간다!”

누가 봐도 중상자인 당민호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어차피 살날도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당민호는 망설이지 않고 합류를 표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친구와 함께 마지막 불꽃을 활활 불태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당씨 혈족은 절대 빚을 잊지 않았다.

“나도 함께 할게.”

“저도요.”

“넌 안 되지. 보타문의 문주인데.”

연진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야 당민호와 마찬가지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벽우진에게는 개인적으로 빚도 있었고.

하지만 현주혜는 아니었다.

“괜찮지 않을까요?”

“안 돼. 후계자도 없잖아.”

단칼에 거절하는 말에 현주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벽우진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연진청의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허락하지 않을 기색이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제갈현의 물음에 벽우진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뜻 모를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표정에 제갈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왠지 자신에게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니, 그게 당연한 건가.’

역지사지라고 그가 벽우진의 입장이었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터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토사구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직접 찾아와서 사과한 것이기도 했고.

‘이미 몇몇은 눈 밖에 났겠지.’

벽우진은 뒤끝이 확실한 남자였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수도 없이 보여줬었다.

그런 만큼 이미 마음속에서는 구분이 되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 곤륜산으로 돌아가는 건 맞아.”

“···바로 가시게요?”

“응. 있어서 뭐해. 뒷정리야 총군사가 할 텐데. 안 그래?”

“그건 그렇습니다만···.”

제갈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벽우진과 곤륜파가 이렇게 빨리 복귀할 줄은 몰라서였다.

“나는 벽 동생과 함께 갈 거야.”

“저도요. 문도들은 올 때처럼 돌아가면 되니까요. 겸사겸사 유람도 하라고 하면 다들 좋아할 걸요? 사부님도 없고, 저도 없으니까요.”

“이게 은근슬쩍 발을 담그려고 하네?”

연진청이 제자를 흘겨봤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흐뭇함이 담겨 있었다.

말리는 척 하면서 흡족한 기색을 띠었던 것이다.

“일단 먼저 가서 볼 일 보고 있어. 나도 곧 출발할 테니까. 얼마 안 걸릴 거다. 좋은 약재로 약을 달이고 있으니.”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 일을 다 봤으니 이제 일행들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한데 그 모습조차 제갈현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문인.”

“총군사도. 아니, 이제는 다시 제갈가주인가. 고생 많았네.”

옅게 섭섭한 기색을 드러내는 제갈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며 벽우진이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갈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고생을 했는지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조율자로서도 누구보다 정신없이 움직인 사람이 바로 제갈현이었다.

“감사합니다.”

주마등처럼 정마대전의 일들이 스쳐지나간 모양인지 제갈현이 살짝 젖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벽우진은 한 번 더 웃어 보인 후 응접실을 나섰다.

부르르르!

책상 위에 놓인 신마검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잘게 떨었다.

마치 뱀 앞에 놓인 개구리처럼, 혹은 맹수 앞에 선 토끼처럼 겁에 잔뜩 질린 듯이 진동했다.

“그만 해라. 그러다가 애 잡을라.”

본체를 떨 뿐만 아니라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는 신마검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도 신마검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일월쌍환이 은연중에 흩뿌리는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름 천하에서 손꼽히는 신검이며 영성을 지니고 있는 신마검이었지만 감히 일월쌍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웅웅웅!

상극이기 전에 격이 달랐기에 신마검은 잔뜩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일월쌍환은 재미있다는 듯이 기운을 방출했다가 회수했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이 말이다.

“사형. 소제 청범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벽우진이 일월쌍환의 기운을 차단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팔찌의 형태를 하고 있던 일월쌍환이 툴툴대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 했다.

놀이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신마검이로군요.”

“다른 곳에 두기에는 좀 위험해서 말이지.”

“신검이자 마검이니까요.”

서진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마검을 보는 것만으로도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신마검이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휙휙!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서진후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신마검이 자신을 유혹하는 것임을 빠르게 깨달은 것이다.

“많이 강해졌어.”

“도맥을 이은 저조차도 이럴 진데 밖에 나가면 피바람이 불겠네요.”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아냐. 사람의 욕망을 건드리는 검이니까. 물론 천마신공이 담겨 있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일단 나한테는 억제기가 있기도 하고.”

우우웅!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월쌍환이 공명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신마검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것 같습니다. 보패라는 물건이 현존할 줄이야.”

“시조께서 남겨주신 물건이지. 나조차도 왜 이걸 남겨주셨는지 처음에는 몰랐으니까. 근데 무슨 일이야?”

“사형께 보고할 일이 있어서요. 어떻게 보면 좀 심각한 문제라고나 할까요. 성세를 되찾으니 이런 문제가 생긴 건가 싶기도 하고.”

서진후가 품속에서 보고서를 꺼냈다.

말보다는 보고서가 더 객관적이고 빠를 것 같아서였다.

“흐음. 호가호위 하는 이들이 늘었구만.”

“예. 속가제자 쪽이 많습니다.”

“감찰사가 필요할 때가 되기는 했지. 안 그래?”

“한 번 쓸까요?”

서진후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벽우진의 생각을 단번에 파악한 것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어. 명문대파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참에 중재하는 법도 배우고 말이지.”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사형.”

“왜?”

서진후가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떠나시는 건 아니죠?”

“말했잖아. 58년은 살다가 갈 거라고. 아직 3년도 채 안 흘렀다. 그러니 너나 걱정해. 어느 날 갑자기 눈 감지 말고.”

“하하하!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진후가 넉살 좋게 웃었다.

빈말을 하지 않는 벽우진인 만큼 갑자기 등선한다고 사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잠시 후 서진후가 나가자 신마검을 챙겨든 벽우진은 창가에 섰다.

그러자 무상검이 저절로 뽑혀져 나와 벽우진이 올라서기 좋은 높이에 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지, 청민아?”

휘이이잉!

무상검을 타고서 곤륜산의 하늘을 노닐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곤륜파의 산문에 향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산문에만 몰려 있지 않았다.

곤륜파 경내 곳곳이 온갖 사람으로 가득했다.

과거 찬란한 성세를 자랑하던 때처럼 말이다.

-完-

< 제 99장. 종전(終戰). -02(완결)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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