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9장. 종전(終戰). -01 >
시선을 피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목진자와 개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고 침묵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두 사람 역시 어느 정도는 그 의견에 동조했다.
추격한다고 해서 천년마교의 씨를 말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만큼 차라리 후일을 도모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죄다 여기에서 만족하고 있어. 정작 정마대전을 끝낸 이는 아무런 말도 없는데 말이지. 쯧쯧!”
당민호의 핀잔 아닌 핀잔에 목진자와 개왕이 고개를 숙였다.
여론이 이렇다고 말을 했지만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다들 여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벽 장문인을, 그리고 곤륜파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개왕이 복잡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다른 이들보다 벽우진에 대해 더 많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였다.
하지만 어제 있었던 섭무천과의 대결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벽우진의 신위를 보는 순간 감탄보다는 공포가 먼저 엄습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벽우진 덕분에 천년마교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그 이후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어.’
천년마교와의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하지만 곤륜파는 아니었다.
벽우진이 건재한 이상 앞으로의 중원무림은 곤륜파가 독주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곤륜파가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청해성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곤륜파의 위상과 명성은 앞으로 더욱더 크고 높아질 터였다.
다른 문파들이 소모된 전력을 복구하느라 정신없는 것과는 상반되게 말이다.
때문에 다들 꺼리는 것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이 정도인데 여기서 피해가 더 커졌다가는 복구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더 필요할 테니까.
‘더불어 견제도 해야 하고.’
개왕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견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은 아니었다.
무림맹은, 중원무림은 곤륜파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다.
그런데 견제라니,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치들이 있으니까. 염치없이 말이지.’
정작 싸워야 할 때는 뒤에서 몸을 사린 이들이 이제 와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게 개왕은 참으로 고까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는 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큰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은 소모된 전력을 회복하는데 집중할 것입니다.”
“전리품도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굳이 원정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이들을 추모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리인데 더 싸우고 싶어 하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목진자와 개왕이 물꼬를 틀어서 그런지 곳곳에서 의견이 나왔다.
눈치를 살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벽우진은 그 모습을 보고도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향은 무슨. 개선장군 노릇을 하고 싶은 거겠지. 그러니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논공행상부터 하고 있는 것이고.”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쳐? 네가 지금 나에게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 거냐?”
당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전신을 붕대로 감고 있는 그가, 심지어 얼굴에도 붕대를 감고서 당민호가 노성을 터트렸다.
두 눈을 동그랗고 뜨고 말대꾸하는 종남파의 새 장문인을 노려봤던 것이다.
그러자 그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아니, 제 말은···.”
“까놓고 말해보자. 이번 정마대전에서 종남파가 한 게 뭐야? 전 장문인이 엊그제 권마에게 달려들어서 죽은 것 말고 뭐가 있지?”
“커흠! 큼!”
종남파의 장문인이 시선을 내리 깔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로서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정마대전에서 종남파가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아서였다.
그마저도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쳤고.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년마교의 마인들을 추격하는데 회의적이라는 점입니다. 구대문파만 하더라도 소림사와 아미파, 무당파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황보세가주와 하북팽가주 역시 현재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할 정도이고요.”
“나는?”
“······.”
조심스레 입을 열었던 구양세가주가 당민호의 반문에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가 당민호였기 때문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다른 이의 부축이 없으면 제대로 걷기 힘든 게 바로 당민호였다.
“총군사의 생각은 어떤가?”
좀처럼 결론이 나오지 않는 모습에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던 혜량이 입을 열었다.
왼손에 큼지막한 붕대를 한 채로 제갈현을 쳐다봤던 것이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제갈현에게로 향했다.
“저는 양쪽의 의견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태상가주님의 말씀대로 어쩌면 이번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천년마교의 끝을 낼 수 있는. 적어도 몇 십 년은 회복에만 전념해야 할 정도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내 말이!”
“하지만 현재 무림맹의 상황도 감안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승리하기는 했습니다만 피해가 상당한 건 사실이니까요. 몇몇 문파는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요.”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당민호에 이어 군소방파의 수장들이 맞장구를 쳤다.
특히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무거운 얼굴로 대답하자 당민호도 차마 따지지 못했다.
후방에서 눈치만 보던 이들이라면 모를까 목숨 걸고 싸운 이들에게 닦달할 수는 없어서였다.
“오독문도 생각해야 합니다. 형산파가 저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라도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습니다.”
“맞다.”
“허어. 오독문을 잊고 있었군.”
혁련세가주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
천년마교에 모든 신경이 쏠려 오독문이 다시 중원을 침공했음을 깜빡한 것이었다.
“그래서 양쪽 의견 다 타당하다고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총군사는 중립인가보군.”
“예. 사실 결정권자는 제가 아니기도 하고요.”
당문경을 마주보며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그가 총군사이긴 하지만 결정권은 없었다.
“으음!”
“흠!”
한편 결정권자라는 말에 모두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죽은 법무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법무를 대신해 소림사의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법허가 불호를 외며 두 눈을 감았다.
“결국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여기까지라면 어쩔 수 없지. 무림맹이 천년마교도 아니고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잖아?”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네가 나서면.”
당민호의 대답에 여기저기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말로 벽우진이 강요한다면 면전에서 그걸 거절할 이들은 몇 없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래서 다들 긴장한 얼굴로 벽우진을 힐끔거렸다.
“내가 마교주냐? 나서서 뭘 해? 그리고 싫다는 이들을 데리고는 될 일도 안 된다.”
“에잉!”
당민호가 혀를 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근시안적인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천년마교의 맥을 끊을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우진이가 있을 때가 진짜 기회라는 것을 모르다니. 아니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건가.’
당민호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노회한 강호인답게 그는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아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당민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승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우겨우, 그것도 벽우진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대패했을 게 분명했을 전쟁을 가까스로 이긴 게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하루 만에 정치질을 하는 이들의 모습에 당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있을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난 이만 일어나겠어.”
“같이 가.”
“제가···.”
지휘부의 의견은 충분히 들었기에 벽우진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말이다.
논공행상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제갈현과 따로 의논해도 되었기에 벽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 모습에 제갈현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총군사는 의견조율 해야지. 지금도 개판인데 총군사마저 나가면 어떡하라고.”
“크흠!”
개판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헛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당민호의 부라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는 없었다.
배분으로도, 명분으로도 따질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가자고.”
“그래.”
“답답한 것들.”
벽우진만 아니었다면 죄다 뒤집어버렸을 것이라는 듯이 당민호가 이를 드러냈다.
부상당한 몸임에도 여전히 살벌한 기세를 드러냈던 것이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아버지.
마지막까지 못마땅한 기색을 얼굴 가득 드러내며 나가는 당민호의 귓전으로 아들의 전음이 들렸다.
지금의 상황이 불만스러운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자임에도 승자다운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이곳은 사천성이었다.
-정리해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회의실을 나서는 벽우진을 당민호가 다급히 뒤따랐다.
시종의 부축을 받아 회의실을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벽우진이 등장했을 때만큼이나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에 내려앉았다.
다들 좀 전과는 다른 의미의 눈치를 봤던 것이다.
벽우진을 따라 나선 당민호는 자기 전용의 응접실로 친구를 이끌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응접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두 명의 여인이 벽우진을 찾아왔다.
“누님?”
“이리로 왔다고 들어서. 그런데 당 동생은 그렇게 움직여도 돼? 당장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시비의 안내를 받아 현주혜와 함께 응접실을 찾은 연진청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당민호를 쳐다봤다.
눈빛만 멀쩡하고 나머지는 죄다 심각해 보여서였다.
특히 부들거리는 두 다리가 안쓰럽게 눈에 박혔다.
“허허. 괜찮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내일이면 다 낫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근데 회의가 영 아니었나봐. 둘 다 표정이 썩 좋지 않은데?”
“벌써부터 자기 밥그릇부터 챙기려고 하더라고요. 나 원 참. 지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건 우진인데.”
당민호가 투덜거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던 것이다.
“언제는 안 그랬어?”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우리도 궁금하니까.”
연진청이 당민호를 달래며 시비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시비가 눈치껏 응접실을 문을 열고 다과상을 내왔다.
“으윽!”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의자에 앉기 무섭게 신음을 흘리는 당민호의 모습에 연진청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군데군데에서 흘러나오는 핏자국만 봐도 당민호의 상처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괜찮다니까요. 이 정도는 금방 낫습니다.”
“허세는. 그보다 얘기 좀 해봐. 어떻게 됐어?”
“죄다 온건파, 안전제일주의였습니다. 거기에 견제하려는 심리도 가득하고요. 누구 덕에 이렇게 살아있는 줄 모르고!”
“흐음.”
연진청이 조용히 차를 마시는 벽우진을 쳐다봤다.
잔뜩 흥분한 당민호와 달리 벽우진이 너무나 차분해서였다.
그녀가 아는 벽우진은 결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고. 어제 어느 정도는 짐작했었어. 굳이 더 피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본 파가 신경 쓰이기도 할 테고.”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현주혜를 향해 벽우진이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 짐작했었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동생,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똑똑.
< 제 99장. 종전(終戰).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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