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8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04 >
쩌어어엉!
“크아악!”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이었지만 섭무천은 섭무천이었다.
마제라는 별호에 아깝지 않게 섭무천은 벽우진의 공격을 막아냈다.
신마검을 이용해 가까스로 기형검을 튕겨냈던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울컥!
치명상은 피했지만 충격으로 인한 내상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인지 섭무천이 각혈을 했다.
그러나 주저앉지는 않았다.
충격으로 두 다리가 풀려 후들거렸음에도 섭무천은 악착같이 서서 벽우진을 마주했다.
천년마교의 주인으로서 꼴사납게 주저앉을 수는 없어서였다.
“왜 너 같은 존재를···.”
“나를 탓하면 안 되지. 허송세월을 보낸 널 탓해야지.”
벽우진이 딱 잘라 말했다.
스스로의 강함에 도취되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여기며 정체된 게 문제이지 자신의 존재가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탓하려면 스스로의 오만방자함을 탓하는 게 옳았다.
“너 같은 이가 있을 거라고는···.”
“그마저도 염두에 두고 있었어야지. 선기를 알고 있다면 하늘 밖의 하늘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
하나같이 틀린 말이 없는 말에 섭무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얼굴 어디에서도 저항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천마신공은 깨졌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단전이 아직 건재하다고 하나 공력이 아무리 많아 봤자 상황을 반전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패배를 단순히 내 탓으로 돌리지는 말도록. 그럼 내가 보낸 시간이 너무 무의미해지니까.”
망연자실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서 있는 섭무천의 목을 벽우진은 거침없이 베었다.
아직 허공에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기형검으로 목을 베어냈던 것이다.
그러자 무림맹 측의 기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처럼 느껴졌던 섭무천이 죽자 기세가 대번에 상승한 것이었다.
반면에 천년마교 쪽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파파팟!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섭무천이 죽은 순간 몇몇 이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천년마교의 최강자이던 섭무천을 단독으로 쓰러뜨린 벽우진이 멀쩡한 이상 패배는 확실했다.
그러나 패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몰살만은 피해야 한다.’
섭무천의 목이 베어진 것과 동시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장로원의 노마두들이 한결같이 땅을 박찼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끄아악!”
“켁!”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장로들은 모두가 똑같이 한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곤륜파의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모여 들었던 것이다.
벽우진을 통제할 수 있는 목줄은 사제와 제자들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장로들은 앞을 가로 막는 이들은 모조리 쓸어버리며 달려들었다.
“어딜!”
“천하의 천년마교도 별 거 없네.”
순식간에 수십 명을 도륙하며 거리를 좁히던 장로들이 처음으로 튕겨졌다.
적수가 없다는 듯이 날뛰던 그들을 누군가가 막아섰던 것이다.
“크흠!”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은 듯 몇몇 장로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앞을 막아설 정도의 고수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머뭇거림은 짧았다.
벽우진 정도의 고수에게는 찰나의 시간도 주어서는 안 되었기에 장로들은 재차 몸을 날렸다.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터어어엉!
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이 못지않은 우락부락한 체격을 지닌 장로의 거대한 도끼를 튕겨내며 연진청이 히죽 웃었다.
이미 이들에 대한 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어서였다.
카아앙! 까앙!
더구나 이곳에는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대의 검후인 현주혜도 있었고 곤륜파의 호법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다들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한 고수가 어째서!”
“진즉부터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어.”
“이이익!”
단 열 명에 의해 속절없이 튕겨져 나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장로들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열 명이 만들고 있는 진형은 너무나 끈끈했다.
그들조차 쉽사리 뚫고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스윽.
그리고 그들은 장로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애초에 열 명의 목표는 하나였다.
“장문인.”
“······!”
진구의 나지막한 말에 장로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스무 명이 넘는 그들이었지만 긴장하는 쪽은 벽우진이 아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난 내 몫은 한 것 같아, 동생.”
겸허하게 고개를 젓는 진구나 다른 호법들과 달리 연진청은 해맑게 웃었다.
비천단 값을 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반 정도는 한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저 놈도 지쳤을 게 분명해!”
“흐아아압!”
등 뒤에 벽우진이 내려선 것을 느낀 것과 동시에 장로들이 몸을 돌렸다.
도망치기보다는 싸우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등을 보이는 게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는데 그 저의에는 벽우진이 지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섭무천과 싸운 벽우진이었다.
그런 만큼 제아무리 벽우진이라도 내공이나 체력의 소모가 적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모습 자체가 허장성세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콰콰콰쾅!
물론 그 추측이 오판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월쌍환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벽우진은 무상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공간을 가르는 참격에 장로들은 막아내기 급급했다.
몇 명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튕겨져 날아갔다.
“커헉!”
“끅!”
단 일검에 장로들 반수 이상이 전투불능에 빠졌다.
개중에 그나마 멀쩡한 이들은 도망쳤고.
벽우진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그대로 몸을 내뺐던 것이다.
“공격하라!”
“마교의 종자들을 밀어내라!”
“모조리 쓸어버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장로들마저 뭉텅이로 무너지자 제갈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천년마교를 몰아낼 적기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끝났네, 전쟁.”
“아직은 아닙니다.”
“이렇게 기울어졌으면 이미 끝난 거지 뭐. 수장을 잃었는데 반격할 여력이 있겠어? 일단은 천산으로 돌아가서 수습하는 게 먼저지.”
도망치는 마교도들을 따라 우르르 달려가는 무림맹을 쳐다보며 연진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완연했다.
전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였다.
곤륜파와 보타문의 피해도 그리 크지 않았고 말이다.
“그렇겠지요.”
“이왕이면 뿌리를 확실하게 뽑는 게 좋은데, 그리하기는 힘들겠지?”
“아마도요.”
연진청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야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혹은 어제 죽은 가족과 사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달려들지만 당장 내일만 되어도 현실을 생각할 터였다.
“사형.”
“왜?”
그때 서진후가 벽우진에게로 다가왔다.
격전을 치렀다는 사실을 보여주듯 옷 곳곳에 핏자국을 묻히고서 은근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던 것이다.
“지휘부의 눈빛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렇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대놓고 쳐다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느끼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제가 계속 예의주시하겠습니다.”
“큰일은 없을 거야. 일단 본 파는 청해성에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손해를 복구하는 게 먼저이기도 하고.”
벽우진의 시선이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다들 하나같이 피칠갑을 하고 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벽우진은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최소한의 복수도 했고.’
곤마에 이어 섭무천도 처치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청민의 복수는 물론이고 전대의 복수도 어느 정도는 했다고 생각했다.
하나 만족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 주혜도 좀 생각해줘. 애들 많이 챙겨줬어.”
“알고 있습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심각한 대화가 끝나가는 듯하자 연진청이 슬그머니 다가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현주혜를 너무 소홀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였다.
“에이. 여기서 더 어떻게 잘해줘요?”
“계속 신경을 써 달라 이 말이지. 제자들은 매일 같이 둘러보고 대화하면서 확인하잖아. 그만큼만 해달라고, 그만큼만.”
“제자와 주혜는 다르죠.”
“끄응!”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연진청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무엇이 그리 답답한지 가슴을 탕탕 쳐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할 수 없다는 표정에 벽우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부님.”
“다들 괜찮지?”
“예. 자잘하게 다친 사람은 있는데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요.”
“다들 고생했다.”
“고생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일우와 양이추, 심대현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중원무림을 지키는 일에, 거기에 사숙의 복수까지 걸려 있는 일에 고생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아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맙고. 이제 슬슬 정리하자.”
“예!”
전쟁이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벽우진은 시체들로 가득한 평원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뗐다.
똑똑똑.
침상에 누워 졸고 있던 벽우진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일어나 옷을 추슬렀다.
“들어 봐.”
“모시려고 왔습니다.”
“뭘 굳이 그렇게 해. 거리도 얼마 되지 않은데.”
“정마대전을 끝낸 영웅이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 의전은 해드려야지요.”
“의전은 무슨.”
제갈현의 말에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썩 못마땅한 얼굴로 제갈현을 따라 방을 나섰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벽우진은 그게 영 불편했다.
“총군사와 벽 장문인이 도착하셨습니다.”
달칵.
제갈현의 의전 아닌 의전을 받으며 벽우진은 사천당가의 대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곳곳의 빈자리와 함께 부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쟁을 치른 후가 아니랄까봐 멀쩡한 사람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장문인.”
문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고성이 난무했던 대회의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이번 정마대전의 일등공신이자 종결자라 할 수 있는 벽우진의 등장에 모두가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누가 보면 너만 전쟁을 안 치른 줄 알겠어.”
“가장 뼈 빠지게 뛰어다닌 게 바로 나다.”
“농담도 못하냐.”
까칠하게 나오는 벽우진의 모습에 당민호가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승패가 판가름 난 어제의 전투에서 그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앉으시죠.”
“그래.”
한 마디로 당민호의 입을 다물게 만든 벽우진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앞으로의 일정과 논공행상을 논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어제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좀처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벽우진 앞에서 논공행상을 거론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다들 왜 말이 없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장통처럼 떠들더니.”
“흠흠!”
“커험!”
당민호의 시선에 몇몇 수장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이야 벽우진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렇기에 다들 말을 아꼈다.
“듣자하니 이대로 종전하려는 것 같던데. 아닌가?”
“그게 말입니다···.”
“승리하고 쫓아낸 마당에 굳이 추격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 제 98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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