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8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03 >
“으으으···!”
“크허허헉!”
단순히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사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지가 약한 이들은 전투 중인 것을 잊은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괴물의 포효에 다리가 풀린 것이었다.
저벅저벅.
압도적인 존재감을 뿌리는 괴물을 데리고서 섭무천이 걸음을 옮겼다.
벽우진을 똑바로 직시하며 접근했던 것이다.
“대성을 이룬 천마신공인가.”
“···아무렇지도 않나?”
의기양양하게 다가오던 섭무천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십 장 떨어져 있는 무인들조차 그의 존재감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데 지근거리에 있는 벽우진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자 이상했던 것이다.
아무리 상극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곤륜파가 구대문파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나 감히 천년마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데 그럼에도 벽우진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듯이 서 있었다.
“아무렇지 않으니까 이렇게 멀쩡히 서 있겠지?”
“어떻게?”
섭무천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등 뒤를 지키던 사두팔비의 괴물이 다시 한 번 포효했다.
자신의 포효에도 무릎을 꿇지 않는 벽우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거칠게 울부짖었던 것이다.
쿠아아아-!
분노와 살기가 담긴 포효가 사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적아를 구분하지 않는 포효에 무림맹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천년마교의 마인들 역시 주저앉았다.
그 정도로 사두팔비의 괴물이 뿜어대는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말이다.
“시끄럽네.”
하지만 단 한 명, 벽우진에게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괴물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벽우진은 고고히 서서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다.
그게 섭무천은 믿기지 않았다.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일으킨 적이 몇 번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너 뭐냐?”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 얼빠진 표정을 짓던 섭무천이 이내 미간을 좁혔다.
하나의 가설이 그의 뇌리를 관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섭무천은 묻고도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뭘 거 같냐?”
“흥!”
되레 반문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섭무천이 콧방귀를 끼었다.
그와 동시에 천지를 가르는 일검이 펼쳐졌다.
단 일검으로 하늘을 가를 법한 참격이 뿌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펼친 상태에서 뿌린 참격을 가볍게 튕겨냈다.
무상검으로 참격의 궤적만 살짝 비틀었던 것이다.
쩌저저적!
그것도 천년마교의 마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비틀었기에 수백 명이 일시에 썰려 나갔다.
하지만 벽우진의 노림수에도 섭무천은 당황하지 않았다.
죽은 수백 명보다 눈앞에 있는 벽우진이 훨씬 더 중요해서였다.
수백 명을 희생해서 벽우진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게 더 남는 장사였다.
웅웅웅!
섭무천의 주위로 여덟 개의 검이 솟구쳤다.
사두팔비의 괴물이 각각의 손에 마기로 이루어진 검이 쥐어졌던 것이다.
“이번 건 좀 색다른데.”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나!”
괴물의 포효와 함께 여덟 개의 검이 벽우진을 노렸다.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섭무천이 펼쳐 보였던 검공과 똑같은 수준의 검세에 벽우진이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괴물이 들고 있는 검이 기형검(氣形劍)의 묘리를 품고 있음을 그는 단박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물러나라!”
“더 뒤로 물러나!”
그리고 그걸 깨달은 이들은 전투를 중지하며 수하들을 물렸다.
지금의 거리로도 자칫하면 휩쓸릴 수 있음을 파악하고서는 싸우기보다 물러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꽈과과광!
신마검을 포함해 총 아홉 자루의 검이 벽우진에게 쏟아졌다.
무자비한 폭격이 벽우진을 향해 퍼부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공격만큼은 벽우진도 쉽지 않은 모양인지 옷이 금세 만신창이가 되었다.
“크크크!”
순식간에 넝마가 되어버리는 모습에 섭무천이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기대하고 보고 싶었던 광경이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다.
벽우진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광경 말이다.
하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벽우진의 두 눈에는 조금의 당혹감도, 두려움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웅웅웅웅!
섭무천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벽우진의 귓가에 묘한 공명음이 들렸다.
사방에서 폭발과 굉음이 난무하는데도 익숙한 공명음이 그의 귀를 간질거렸던 것이다.
‘이때를 위해서 남겨주신 것이었나.’
양손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진동에 벽우진이 속으로 웃었다.
어째서 일월쌍환(日月雙環)을 남겨준 건지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일월쌍환은 현재에 필요한 무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구나 병기라기보다는 보패에 가까운 물건이 일월쌍환이었기에 늘 의문이 들었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크하하핫! 이대로 갈가리 찢겨 죽거라!”
막기만 하는 벽우진의 모습에서 자신의 승리를 자신한 듯 섭무천이 포효했다.
스스로의 무력에 도취되어 앙천광소를 터트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미세하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우우웅!
파괴의 신 마냥 사방팔방을 짓뭉개고 박살내던 괴물이 갑자기 멈칫거렸다.
미친 듯이 날뛰던 좀 전과 달리 두려움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몸을 떨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두 눈을 검게 물들인 섭무천이 얼굴 가득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놀란 것이었다.
파아아앗!
겁에 질린 것 마냥 사두팔비의 괴물이 움찔거릴 때 벽우진의 양손에서 신비로운 서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벽우진은 느릿하게 무상검을 집어넣었다.
일월쌍환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무상검을 납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광경을 보고도 섭무천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익!”
그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사두팔비의 괴물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겁에 잔뜩 질려 얼어버린 것 같은 괴물의 모습에 섭무천이 이를 드러내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의 마기로 일으킨 괴물인 만큼 강압적으로라도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소용없어.”
“뭐라고?”
“아무리 발악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스르륵!
서광이 가라앉으며 일성검(日星劍)과 월야검(月夜劍)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괴물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어떻게든 두 자루의 검에서 멀어지려고 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 쌍검이 무엇이기에···!”
“천마신공과는 상극인 물건이지. 인세에 남은 마지막 보물이라고나 할까.”
우우웅!
오랜만에 바깥 세상에 모습을 보인 일성검과 월야검이 포효하듯이 울부짖었다.
그러자 사두팔비의 괴물이 몸을 떨었다.
일성검과 월야검의 공명음에 사시나무처럼 사정없이 몸을 떨었던 것이다.
반면에 일성검과 월야검은 기세등등한 공명음을 토해냈다.
“우우욱!”
한데 그 소리를 듣기 무섭게 섭무천이 비틀거렸다.
두 자루의 검이 토해내는 공명음을 듣기 무섭게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 같은 울렁거림에 섭무천이 입을 앙다물었다.
벽우진을 앞에 두고서 추잡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서걱.
그러는 사이 벽우진은 왼손에 들고 있던 월야검을 휘둘렀다.
달의 정기를 품고 있는 월야검은 벽우진의 선기(仙氣)를 잔뜩 머금고서 사두팔비의 팔 중 하나를 잘라버렸다.
“큭!”
섭무천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강기조차도 우습게 튕겨내는 괴물의 팔이 너무나 쉽게 절단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잘린 부위에서 파고든 기이한 기운으로 인해 섭무천이 느끼는 고통은 배가 되었다.
사두팔비의 괴물과는 심령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피만 흘리지 않을 뿐이지 그 역시 고통은 똑같이 받았다.
크르르르!
한순간에 팔 하나를 잃은 사두팔비의 괴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괴물은 위협적으로 일곱 개의 팔을 들어 올렸다.
스슥.
하지만 벽우진은 괴물이 그러거나 말거나 양손에 검을 쥔 채로 천천히 다가갔다.
스스로 패선무(覇仙舞)라 이름 붙인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폭의 아름다운 검무와도 같은 패선무가 공간에 수를 놓자 섭무천은 속절없이 뒷걸음질쳤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검무가 그에게는 그 어떤 공격보다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치이익! 치익!
심지어 벽우진의 쌍검과 부딪칠수록 그의 마기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녹아내렸다.
쌍검과 닿는 족족 천마신공의 마기가 뭉텅이로 소멸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섭무천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천마신공을 대성한 후 그는 적어도 하계에서 자신의 상대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가 이룩한 경지는 대단했다.
초대 천마가 아니라면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한데 그런 자신이 벽우진에게 밀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흐아아압!”
솟구치는 울분을 터트리며 섭무천이 재차 천마삼검을 펼쳤다.
천년마교 최강의 무공이자 초대 천마가 말년에 남긴, 그리고 그 후로 제대로 익힌 이조차 없다는 최강의 검초를 현세에 현현시켰다.
푸스스스···.
그러나 천마삼검 최후의 절초도 천마신공과 마찬가지로 벽우진의 쌍검에 닿기 무섭게 소멸했다.
여명에 닿은 안개가 흩어지듯 너무나 무기력하게 사그라졌던 것이다.
그 모습에 섭무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오래 전, 사부이자 전대 마제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떠올랐다.
지나가듯이 한 말이 갑자기 그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서걱. 슥.
그러는 사이 일곱 개였던 팔은 어느새 두 개로 줄어들어 있었다.
섭무천이 얼어있거나 말거나 벽우진의 패선무는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일성검과 월야검 역시 오랜만의 현현에 신나서 날뛰고 있었고 말이다.
“진짜 선기란 말이더냐! 허나 선기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섭무천이 코피를 줄줄 흘리며 악을 썼다.
괴물의 팔이 잘려나가는 만큼 그 역시 충격이 내부에 축적되고 있었기에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조차 잊은 듯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만약 지금 벽우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전설처럼 회자되는 선기라면 그가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쌓고 다루는 방법이 실전된 것뿐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인세에서 사라졌다면 내가 이렇게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으드득!
섭무천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벽우진이 뿜어대는 저 기운이 진짜 선기라면 그에게 승산은 없었다.
그 막강하다던, 천하를 제 마음대로 주유했던 초대 천마조차도 신선에게는 아이에 불과했었다.
“어떻게 너에게, 너에게 그런 힘이···!”
“선기 때문에 네가 졌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선기가 빠르고 편해서 사용하는 거지 무경이 너보다 낮은 게 절대 아냐.”
“커헉!”
섭무천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느닷없이 파고든 무형강기에 안면에 일격을 맞고는 튕겨졌던 것이다.
퍼퍼퍼퍽!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어느새 괴물의 팔을 모조리 잘라낸 벽우진은 일성검과 월야검을 늘어뜨리고서 무형강기만으로 섭무천을 두들겼다.
웅웅웅!
그러자 일성검과 월야검이 투정부리듯 진동했다.
지금껏 한풀이를 하듯 신나게 잘 놀고 있었는데 멈추자 떼를 쓰듯 공명음을 토해냈던 것이다.
스르릉.
하지만 벽우진의 선택은 기형검(氣形劍)이었다.
사두팔비였던 괴물이 들고 있던 칠흑같이 검은색 검과는 대비되는 순청색의 기형검이 허공에서 생성되더니 그대로 섭무천에게 벼락같이 날아갔다.
< 제 98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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