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8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01 >
상황은 다른 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완벽하게 승리를 차지한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으음!”
검마를 쓰러뜨렸으나 대신 손가락 세 개를 잃은 혜량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는 검마로 인해 결국 왼손의 손가락 세 개를 잃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주먹을 쥘 수 없게 되었으니 왼손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장문인.”
그때 제법 떨어진 곳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진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던 것이다.
“남궁가주!”
씁쓸한 기색을 숨긴 혜량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날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땅바닥에 누워 있는 남궁진의 모습에 식겁해서 달려간 것이다.
“지혈을 부탁···.”
힘겹게 입을 연 남궁진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결국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 모습에 혜량이 다급히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금창약을 뿌렸다.
“우아아아!”
“이겼다!”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도마가 당문경의 암기에 맞고 중독되어 절명하자 무림맹 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껏 쌓아두기만 했던 울분을 한순간에 모조리 터트렸던 것이다.
수천 명이 일시에 터트리는 함성에 대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에는 우리가 이긴 것 같은데.”
“흠.”
만신창이가 되었고 몇몇이 죽었지만 중요한 건 무림맹 측이 이겼다는 점이었다.
여덟 명 중 세 명이 죽은 무림맹과 달리 구마와 천패마가주는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비겁하거나 치졸한 수 없이 정면대결로 말이다.
“뭐, 따질 게 있다면 들어는 주지.”
“없다.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이겨야 하는 게 진정한 강자의 덕목이니까. 불리한 상황이었던 것은 맞으나 그걸 넘지 못했다면 죽어도 할 말은 없지.”
친위대나 마찬가지인 구마가 모두 죽었음에도 섭무천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씁쓸함도, 아쉬움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냉정한 수장이로군.”
“약해서 죽은 거니까. 네 말대로 정정당당한 대결이기도 했고.”
섭무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따질 게 전혀 없는 승부였기에 그는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수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구마인 만큼 섭무천은 복수는 확실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 전에 이 녀석부터 쓰러뜨려야겠지만.’
섭무천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도복을 입고 있었지만 도사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뺀질거리게 생긴 게 뒷골목이나 돌아다닐 것 같은 파락호처럼 보였다.
하지만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도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인정이 빠른데.”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지. 다만 문제는 나만 그렇다는 것이지.”
쿠그그긍.
섭무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문이 활짝 열리며 천년마교의 마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흉흉한 살기를 흩뿌리며 평원으로 달려 나왔던 것이다.
“전군-!그 모습을 보기 무섭게 제갈현이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승패가 갈릴 때부터 그는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그그긍!
제갈현의 외침에 무림맹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특히 오단의 움직임이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제갈현의 지시를 완벽하게 이행했던 것이다.
동시에 제갈현은 부상자들을 황급히 복귀시켰다.
이기기는 했으나 세 명이 죽고 나머지도 부상이 심각한 상태였다.
다시 싸우기는 힘들어 보였기에 제갈현은 망설이지 않고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보냈다.
‘왜 저렇게 냉정하지?’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취하면서도 제갈현은 미간을 좁혔다.
흥분해서 발작해도 모자랄 상황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섭무천이 이상했던 것이다.
특히나 요마는 알려지기로 섭무천의 정부라 했었다.
그런 그녀가 죽었음에도 섭무천은 딱히 슬퍼하지도, 애석해하지도 않았다.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어제부터 아니었나?”
“어제는 전초전이었을 뿐이고. 내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살기등등한 기세로 성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교도들을 슬쩍 쳐다보며 섭무천이 말했다.
구마와 천패마가주의 죽음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나선 것 때문에 그런 건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어제보다 더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기에 섭무천은 웃었다.
“아래 있는 것들이 힘들었겠어. 자뻑이 심한 상관을 모셔야 했으니.”
“자뻑이라니. 엄연히 실력인데. 난 늘 증명해 오기도 했었고. 강자들을 군말 없이 다루기 위해서는 윗사람 역시 강해야 하는 법이니까.”
꽈아아앙!
그때 한 곳에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갑작스레 터져 나왔다.
더불어 처절한 단말마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무지막지한 강자들의 등장에 무림맹 쪽의 무인들이 말 그대로 쓸려나갔던 것이다.
“허!”
그 광경에 벽우진이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마와 천패마가주가 죽었기에 이제는 나름 균형추가 맞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천년마교는 천년마교였다.
구마가 죽자 구마보다 더한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왜 그래? 알고 있지 않았어? 본교에는 장로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저런 놈들이 남아 있었단 말이지.”
“정마대전에 사활을 건 것은 너희뿐만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 오히려 실패하면 타격이 더 큰 것은 우리 쪽이야.”
“끄아아악!”
전성기는 한참 전에 지나간 육신이었지만 대신 막대한 공력이 있었다.
그걸 천년마교의 장로들은 십분 활용했다.
육체를 직접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공력 위주의 공격을 펼쳤던 것이다.
그 결과 장로들의 주변은 삽시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으음!”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재앙이라는 듯이 무자비하게 전장을 휩쓰는 장로들의 모습에 제갈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수뇌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지막지한 공력을 앞세워 전장을 쓸어버리는 장로들의 모습에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숫자 역시 스무 명을 훌쩍 넘었기에 그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어마어마했다.
“···준비한 수로도 막아내기 힘들 것 같은데.”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다들 걸었어. 다만 문제는 목숨을 걸고도 막을 수 있느냐이지.”
개왕이 암담한 얼굴로 말했다.
구마와 천패마가주가 죽고 그는 내심 기대했었다.
어쩌면 역대 정마대전 중 가장 빨리, 그리고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었다.
“그래도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지요. 준비한 것을 최대한 활용하면서요.”
“후우! 그래. 해보는 데까지 해봐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설 수도 없고. 순순히 보내줄 리도 없으니.”
개왕이 타구봉을 움켜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막지 못하면 다 죽는 것이니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방주님.”
“그래도 기세가 나쁘지 않아. 적어도 어제보다는 훨씬 나으니.”
어제의 격전 이후 무림맹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많은 위기를 견뎌내고 이겨냈지만 천년마교의 막강함을 직접 경험해보자 다들 기가 질렸던 것이다.
그런데 무림맹주의 죽음과 구마와의 승패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 기세를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지. 얘들아 가자!”
“예이!”
개왕이 짐짓 패기 있게 소리쳤다.
기죽은 채로 싸우면 이길 싸움도 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그는 일파의 수장이었다.
그런 만큼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내지 않고 힘을 내야 했다.
파파파팟!
개왕의 뒤로 지금껏 보조만 하던 개방도들이 모조리 튀어 나왔다.
지금까지는 개개인의 실력이 뒤떨어졌기에 자질구레한 일들만 맡았었는데 이번은 달랐다.
하나같이 투지 넘치는 눈빛을 뿌리며 개왕의 뒤를 따랐다.
특이하게도 모두 방망이나 몽둥이를 든 채로 말이다.
“타구진(打狗陣) 개진이다아-!”
“예이-!”
천여 명에 가까운 개방도들이 개왕의 포효에 특유의 추임새를 넣었다.
개왕과 마찬가지로 개방도들 역시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산불처럼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개진!”
“매화검진(梅花劍陣) 개진!”
“오행검진(五行劍陣) 개진!”
개방에서 시작된 투혼이 소림사, 화산파, 무당파로 번져갔다.
특히 소림사의 기세가 유독 폭발적이었다.
법우에 이어 법무까지도 전쟁에서 잃게 되자 모든 제자가 살계를 열겠다는 듯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뿌려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투명했던 눈동자가 혈안으로 변하며 소림사의 모든 제자들이 죽기 살기로 천년마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미타불!”
“가만 두지 않으리라!”
“복호진(伏虎陣)을 펼쳐라!”
거기에 금강신니를 잃은 아미파까지 합세하자 기세만으로는 천년마교에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기세는 무림맹이 좀 더 강했다.
인원 역시 배에 가깝게 많았고 말이다.
콰콰콰쾅!
다만 문제는 역시나 고수층이었다.
장로원의 등장으로 인해 소실되었던 고수들을 대번에 회복한 천년마교는 파죽지세의 기세로 무림맹을 밀어붙었다.
단순히 힘만으로 무림맹을 출렁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아압!”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제갈현은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군졸처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천년마교에는 없는 독인(毒人)들을 모조리 활용했다.
사천당가의 독인들을 이용해 전투 중에 하독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온갖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전력 차를 메우기란 쉽지 않았다.
“걱정되는 모양이지?”
“뭐가?”
“제자 사랑이 끔찍하다고 하던데.”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을 모두 다 사랑하는 것뿐이다.”
치열하다 못해 지옥도를 방불케 할 정도의 격전이 치러지는 중이지만 딱 한 곳만큼은 평온했다.
격전지에서 오직 한 곳만큼은 누구도 감히 발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이라. 재미있군.”
“천년마교에는 없는 거겠지.”
“있다. 다만 방식이 다를 뿐이지.”
“제자가 둘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셋째가 너에게 죽었지.”
섭무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자가 세 명이었지만 그는 딱히 아끼거나 애지중지 하지 않았다.
결국 경쟁 끝에 한 명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본교가 강한 것이었고 말이다.
“곧 보겠군.”
“내 생각은 좀 틀린데. 내가 셋째를 보는 것보다 네가 사제를 보는 게 더 빠를 것 같거든.”
“그리 생각하고 싶겠지.”
키이이잉!
두 사람의 사이에서 기이한 소성이 들려왔다.
검을 맞대고서 긁는 듯한, 듣기 불편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눈 하나 껌뻑이지 않고서 상대방을 응시하기만 했다.
각자 팔짱과 뒷짐을 지고서 말이다.
쩌저적! 쩌저저적!
그런데 그저 응시하고 있을 뿐인데도 땅이 갈라졌다.
두 사람이 뿌리는 무형지기에 대기는 물론이고 대지가 찢어발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시에 섭무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의 실력이어서였다.
“재미있군. 중원에 이만한 강자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우물 안에만 있으니 딱 우물만큼의 하늘만 보였겠지.”
“크하하핫!”
섭무천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말인데 상대가 상대라서 그런지 화가 나기보다는 흥분되었다.
적수가 없어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던 그에게 있어 벽우진은 너무나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그것도 어제 처음 본 장난감 말이다.
“자만은 결국 스스로를 잡아먹게 되는 법이지.”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다른 이라면 머리부터 터트렸겠지만 너는 그래도 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 제 98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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