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7장. 천년마교의 지배자. -04 >
제갈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당권제, 제왕검이라 불리는 그들이 섭무천을 상대로 협공을 할 리 만무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일파와 한 가문의 수장인 그들인 만큼 자존심 역시 높았다.
“빈니도 한 손 보태지. 맹주와는 남이 아니기도 하고.”
“금강신니님.”
영화 사태가 낡은 승복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러자 팔대호법이 놀랐다.
설마 하니 금강신니가 자신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할 줄은 몰라서였다.
“맹주가 갔는데 빈니가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고. 그리고 소림사와는 합이 나름 잘 맞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신니님.”
팔대호법의 수장인 법허가 합장을 하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영화 사태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팔대호법과 나한승들도 그녀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최상은 아니네. 하지만 그렇다고 싸우지 못할 정도도 아니지. 게다가 적이 만만치 않기도 하고.”
영화 사태의 심유한 눈동자가 섭무천에게 닿았다.
그는 어느 쪽도 상관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서 있었는데 그럼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편안히 서 있는 것뿐인데도 딱히 공략할 곳이 안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된 거 아예 다 같이 나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음?”
“이미 모양 빠지게 된 거 그냥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죠.”
한쪽에 조용히 있던 개왕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개방의 신물이라 할 수 있는 타구봉을 꺼냈다.
자신도 지금 나서겠다는 듯이 말이다.
“방주님.”
“거지에게 자존심은 없으니까. 자긍심은 있지만 지금은 중원을 지키는 게 먼저지. 안 그런가?”
개왕이 넉살 좋게 웃었다.
왼쪽 발을 잃은 후 과거의 실력을 상당 부분 잃었지만 여전히 그는 개왕이었고 개방의 방주였다.
오왕의 일인인 것이다.
그가 합세한다면 승률은 확실히 오를 터였다.
“문제는 저 치가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볼까 하는 건데.”
“지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든지 들어오라고.”
“숫자가 많아지면 뒤에 있는 구마가 나설지도 모릅니다.”
제갈현의 시선이 섭무천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건 구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제대로 몰아가야지. 마교주가 빠져나갈 수 없게.”
개왕의 말에 제갈현의 시선이 혜량과 남궁진에게로 향했다.
지금의 전력에 두 사람이 가세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가장 좋은 패는 따로 있지만.’
제갈현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법무마저 당한 이 순간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을 달리 하는 건 어때?”
“장문인!”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제갈현이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퍼뜩 돌렸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축 쳐져 있던 분위기가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달라졌다.
“한 명에게 차륜전과 인해전술을 펼치는 느낌이잖아. 그건 좀 그렇지. 보는 눈이 한둘도 아닌데.”
오늘도 어김없이 뒷짐을 진 자세로 느긋하게 걸어오며 벽우진이 눈짓했다.
그런 그의 시선은 모여 있는 무림맹도들에게로 향했다.
“그렇지만···.”
“이왕 싸울 거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게 맹도들의 사기에도 좋지 않겠어? 그리고 풀어야 할 것들이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벽우진의 시선이 어제 구마와 겨루었던 이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다들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흐지부지 끝났던 대결로 인해 다들 속이 영 개운치가 못했었다.
한데 이렇게 판을 벌여주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투지를 일으켰다.
“음!”
“마무리는 확실하게 지어야지.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인데.”
“태상가주께서는···.”
“빈자리에 다른 사람이 채우면 되는 일이고.”
“아버지의 자리는 내가 채우지.”
벽우진의 뒤로 당문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동이 편치 않은 당민호를 대신해 사천당가주인 그가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사천당가와 곤륜파, 보타문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우리도 있고.”
“시작을 했으니 끝을 맺어야지.”
낭왕과 냉하성, 소소선자도 다가왔다.
어제의 마무리가 못마땅한 건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저 놈은 나에게 맡기고. 과거의 빚도 있으니.”
벽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때마침 섭무천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이왕이면 깔끔한 게 좋으니까. 뒤에 있는 녀석들도 심심한 거 같은데.”
“그러니 애들 먼저 놀게 하자?”
“두들겨 팼는데 힘이 빠진 상태에서 싸운 거였다고 투덜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푸하하핫!”
팔짱을 끼고 있던 섭무천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던 것이다.
반면에 섭무천의 뒤에 있던 구마들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왜? 꼬와? 그럼 덤비던가.”
부르르르!
벽우진이 구마를 한 명 한 명 마주하며 도발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곤마와 권마를 때려잡던 모습이 선명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크크크!”
“어우, 속 시원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무림맹의 무인들에게는 통쾌하게 다가온 모양인지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한없이 내려가던 기세 역시 반등했다.
벽우진의 등장과 거침없는 말에 무림맹의 사기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쫄리는 주제에 눈을 부라리기는. 덤비지도 못할 거면 눈깔아, 이 자식들아.”
으드드득!
일곱 명이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어왔다.
동시에 구마에게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패선의 입담이 대단하다더니. 역시 허명이 아니었어.”
“그쪽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본좌는 이쪽에는 재능이 있어서 말이지.”
섭무천이 키득거렸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벽우진 정도면 그와 어울릴 자격이 있었다.
“그건 좀 더 두고 본 후에 결정하는 걸로.”
스윽.
벽우진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여전히 서 있던 법무의 시신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벽우진은 딱히 어렵지 않게 허공섭물을 펼쳤다.
“가져가. 시체를 모으는 취미는 없으니.”
“막아도 가져가려고 했다.”
“하긴.”
짧은 대화였지만 벽우진의 성격을 파악하기에 모자람은 없었다.
게다가 굳이 시체 가지고 다툴 필요도 없었기에 섭무천은 의외로 순순히 법무를 데려가는 걸 허락했다.
개인적으로 법무가 마음에 들기도 했었고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문인!”
“고마워할 것 없어. 법무는 나에게도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팔대호법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온전히 돌아온 법무의 시신을 껴안으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일단 시신부터 챙겨. 이곳은 곧 전장으로 돌변할지도 모르니까.”
저벅저벅.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량을 필두로 남궁진과 당문경, 금강신니와 정은 사태, 소소선자, 낭왕, 냉하성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숫자를 파악하고는 모두가 눈치를 살폈다.
일곱만 남은 구마와 달리 이쪽은 여덟 명이었던 것이다.
“천패마가주를 부르면 될 것 같은데.”
“불러.”
남궁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인지 섭무천이 명령을 내렸다.
이왕 구경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천패마가주 역시 내심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휘이익!
섭무천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성벽 위에서 한 명이 떨어져 내렸다.
바로 붕대를 감고 있던 천패마가주였다.
그 역시 재대결이 기껍다는 듯이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구마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주마.”
“누가 할 소리!”
모이기 무섭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미 어제 한 번 붙었었기에 각자 상대는 정해져 있었고, 나눌 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열여섯 명은 마주하자마자 달려들었다.
“신명나는구나!”
곳곳에서 터지는 폭발과 귀청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굉음에도 섭무천은 박수를 쳤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온갖 바람과 강기의 파편들이 쏟아졌지만 정작 섭무천의 몸에 닿는 것은 없었다.
그 어떤 여파도 그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던 것이다.
터터터텅!
그리고 그건 무림맹의 수뇌부 측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앞에서 벽우진이 서 있었기에 수뇌부는 안전하게 열여섯 명의 격전을 지켜볼 수 있었다.
꽈아앙! 꽈앙!
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목숨은 물론이고 자존심이 걸려 있는 대결이다 보니 다들 악착같이 상대방을 쓰러뜨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력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았기에 승부는 의외로 빨리 나지 않았다.
불끈!
곳곳에서 벌어지는 혈투에 무림맹의 무인들이 하나같이 손을 움켜쥐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격전에 다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쥐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속으로 응원했다.
정도가 마도를 물리치기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염원했던 것이다.
“컥!”
그런데 그때 한줄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금강신니가 우뚝 멈추더니 피를 토했던 것이다.
“사, 사고!”
그 모습에 아미파의 장문인인 정은 사태가 몸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금강신니와 싸웠던 대마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양쪽 어깨가 뭉개진 채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미타불!”
“대머리 년이 감히!”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불호를 외던 금강신니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대마가 쓰러지자 친동생인 소마가 상대인 소소선자를 버려두고 그녀의 등 뒤에서 단검을 찔러넣었던 것이다.
“언니!”
그 모습에 소소선자가 화들짝 놀라며 옥소(玉簫)를 휘둘렀다.
금강신니를 공격하느라 훤히 드러나 있는 소마의 등을 옥소로 찌른 것이다.
“크윽! 이 년이···!”
등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소마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왼손의 단검을 휘둘렀다.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끝까지 반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힘이 실리지 않았고, 소소선자에게는 훤히 보이는 공격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피해내고는 그대로 소마의 뒷목을 수도로 후려쳤다.
“죽어!”
“꺽!”
진기를 가득 머금은 일격에 소마의 목이 꺾였다.
죽는 순간까지도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문 채로 죽었던 것이다.
“어, 언니!”
“나 좀 아이들에게 데려다주겠니?”
“흑!”
소마를 쓰러뜨렸지만 금강신니를 구해내지는 못했다.
이미 척추를 부수고 내부를 모조리 헤집어 놓았기에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쌍마를 죽이고 네가 살았으면 남는 장사 아닐까?”
“언니···.”
“후후. 난 괜찮으니까 울지 마.”
금강신니가 옅게 웃으며 소소선자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차가워진 손으로 말이다.
그것을 느끼기 무섭게 소소선자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푸푹!
“허!”
“궁마 따위와 양패구상이라니. 이건 자존심이 너무 많이 상하는데.”
“내가 할 소리를 하는군. 쿨럭!”
낭왕이 가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확하게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자신의 심장부위를 말이다.
그런데 마주보고 있는 궁마의 상태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애병인 철궁은 반토낙이 난 상태였고 상반신은 거치도에 베인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늑골은 물론이고 심장과 폐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이기는 건 나다. 나보다는 네놈이 먼저 죽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
낭왕과 궁마가 서로를 노려봤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승부를 가릴려고 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상대방보다 늦게 죽겠다는 듯이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서 흩어져 가는 내공을 부여잡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늦추려고 했던 것이다.
< 제 97장. 천년마교의 지배자.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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