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7장. 천년마교의 지배자. -02 >
휘이이잉-!
팔짱을 낀 채로 섭무천이 전방을 바라봤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하나같이 긴장한 채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동반한 채로 말이다.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지.”
“보고는 진즉에 올라갔을 거예요.”
“시작은 총군사겠지?”
“복수에 눈 먼 놈들이 달려들지도 몰라요. 물론 그런다고 한들 주군의 옥체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림맹 놈들이 워낙에 교활하지 않습니까.”
요마가 매서운 눈으로 무림맹 진형을 살폈다.
어제의 그 격전을 치르고도 무림맹의 숫자는 크게 줄어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땅만 하더라도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는데 말이다.
“궁마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리고 명분을 따지는 녀석들이 비겁한 짓을 하겠어? 제 얼굴에 침 뱉기인데.”
“전쟁이지 않습니까.”
“뭐, 날아온다고 해서 내가 다칠 일도 없지만.”
섭무천이 히죽 웃었다.
사실 그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위에서 지시만 내리는 일은 너무나 따분했다.
구경은 이제 진절머리가 났기에 섭무천은 잔뜩 기대한 얼굴로 무림맹 쪽을 주시했다.
“제가 막을게요.”
“그래도 되고. 오, 이제야 반응이 있군.”
요마는 물론이고 뒤에 시립하듯 서 있던 다섯 명도 날카로운 눈으로 소란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이윽고 진형이 갈라지며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주예요.”
“소림무제라. 수뇌부가 다 나왔군.”
섭무천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이들이 죄다 나와서였다.
“어제 보였던 이들 중 몇몇이 없는 걸 보니 부상이 심각한 모양이에요, 주군.”
“아무래도 나이는 어쩔 수 없으니까.”
“흐흐흐흐!”
뒤에서 통쾌한 기색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마가 주인공이었는데 당민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 보고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많이 부실해졌어요.”
“그럴 수밖에. 다른 곳도 아니고 본교와 싸웠는데.”
저벅저벅.
약간의 소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수뇌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와 구마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던 것이다.
“이렇게 마주보는 건 처음이구려.”
“어제 바람맞힌 게 계속 기억에 남더라고. 그래서 좀 늦긴 했지만 기대에 부응해주려고. 사실 많이 심심하기도 했고.”
“크흠!”
심심하다는 소리에 무림맹 측 수뇌부들이 언짢은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생사가 오고 가는 전쟁에서 심심하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매서운 눈빛에도 섭무천은 오히려 웃었다.
“불만이 있으면 지껄여 봐. 들어는 줄게. 아니, 손을 써도 돼. 내 특별히 어울려주지. 혼자서 무서우면 여럿이서 덤벼도 좋고.”
“이익!”
면전 앞에서 하는 도발에 몇몇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히죽거리는 섭무천을 향해 호기롭게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들썩이지만 정작 두 다리는 땅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쯧쯧!”
그 모습에 섭무천의 옆에 서 있던 요마가 혀를 찼다.
암만 봐도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녀의 조롱에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이렇게 나섰다는 것은 대화를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대화라.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근데 의외로 멀쩡해 보이네. 어제 머리에 구멍이 뚫릴 뻔 했는데.”
섭무천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앞에 두고서 말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갈현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보여도 섭무천은 천년마교의 정점이자 지배자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전장이지 않소이까. 죽음은 늘 염두에 두고 있소이다.”
“오호. 역시 붓을 많이 잡아본 이야. 평범한 말도 그럴 듯하게 잘 말하는데.”
“어인 이유로 이곳까지 왔소?”
“말했잖아. 심심해서 왔다고.”
섭무천의 뒤에 있던 구마들이 킥킥거렸다.
무림맹 측의 표정들이 하나같이 웃겨서였다.
특히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이들의 표정이 가장 웃겼다.
“···진짜 그 이유 때문이오?”
“겸사겸사 얼굴들도 좀 보고 말이지. 어제는 너무 멀리서 봤거든.”
제갈현조차 얼굴을 굳혔으나 섭무천은 천연덕스러웠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그를 비롯해서 수뇌부들을 둘러봤던 것이다.
“그리고 손이 근질근질 거리기도 했고. 어제 애들 싸우는 거 보니까 나도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흠!”
섭무천의 시선이 제갈현을 지나 법무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너무나 분명했다.
“본좌가 여기까지 왔는데 도망치지는 않겠지? 아, 떼거지로 덤벼도 상관은 없어. 그것도 다 감안하고 왔으니까.”
“본 맹은 비겁한 짓은 하지 않소이다.”
“그거야 모르지. 지금이야 괜찮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마음 역시 달라지는 법이니까. 뭐, 떼로 덤비는 게 민망하면 두셋도 괜찮아.”
섭무천이 어느 쪽도 상관없다는 듯이 검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남궁진과 혜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처음부터 내내 하수를 대하듯 말하자 심기가 불편해졌던 것이다.
“혼자서도 충분하외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법무의 표정 역시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불제자라고 하지만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지금 맹주의 자리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맹도들의 자존심 역시 걸려 있었기에 법무는 망설임 없이 승복을 펄럭이며 앞으로 나섰다.
“물러나 있겠습니다. 주군.”
“아아.”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법무를 슬쩍 쳐다보며 요마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표정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나서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법무가 무림맹주라고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섭무천과 같은 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무당권제가 검마 오라버니와 비슷한 수준이니까.’
중원에서는 천하제일을 다툴지 모르나 천년마교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까 말까한 실력이었다.
그렇기에 요마는 입맛을 다셨다.
소림무제 정도는 검마 선에서 해결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나저나 패선은 어디 있지? 혹시 부상을 당했나?’
검마의 곁으로 다가가며 요마가 요사스러운 눈알을 굴렸다.
묘하게 선홍빛을 띠는 눈으로 무림맹의 수뇌부가 모여 있는 곳을 살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벽우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패선이 안 보이는데.”
“저도 그래서 둘러보고 있었어요.”
“어제 부상을 당했나?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는데.”
“복수를 했다고 곤륜산으로 되돌아갔나?”
검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려진 벽우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곤마를 잡았다고 당장 곤륜산으로 되돌아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무림맹 측에서 쉽게 보내주지 않겠지만 벽우진이 고집을 부린다면 또 몰랐다.
“혹시 암습을 준비하는 것은 아닐까요.”
“곤륜파의 도사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할 것 같은데.”
도마가 넌지시 의견을 제시했지만 검마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하는 행동을 보면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라리 제갈현이 따로 병력을 운용하면 모를까 일파의 수장인 벽우진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몇 초나 버틸 것 같아?”
“글쎄. 그래도 명색이 무림맹주이니까 한 십 초식은 견뎌내지 않을까?”
소마가 큰 머리를 흔들며 키득거렸다.
섭무천이 마음먹고 일격을 뿌리면 단번에 죽겠지만 가지고 논다면 십 초는 충분히 버텨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나 길게?”
“형이 보기에는 주군이 금방 끝낼 것 같아?”
“하긴. 정말 오랜만에 나서시는 것이니 쉽게 끝내지는 않으시겠군.”
“게다가 상대가 소림무제라고. 저번에 지나가는 식으로 소림사와 무당파의 무공이 궁금하다고 하셨어.”
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역시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근데 검마와 겨루던 무당권제를 봤을 때 딱히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이 싸운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근데 소림사라고 해서 별 거 있겠어? 무당권제도 별 거 없던데.”
찌릿!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제법 먼 거리이지만 못 들을 것도 없는 거리였기에 혜량이 그의 말을 듣고서 노려봤던 것이다.
그러자 대마 역시 눈을 부라렸다.
“동감. 별 거 없더라고. 근데 저 놈이 형 노려보는데?”
“우리 대화를 들었겠지. 그 정도 실력은 되니까.”
“주군만 안 계셨으면 아가리부터 날렸을 텐데.”
얼굴을 붉히며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혜량을 마주보며 소마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섭무천만 없었다면 당장 주먹이 날아갔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부르르르!
그 모습에 혜량의 볼이 격렬하게 떨렸다.
극도로 분노한 것이었다.
“장문인.”
그때 제갈현이 나지막하게 혜량을 불렀다.
혹시라도 흥분한 혜량이 달려들 것을 저어해 말리기 위해서였다.
“후우. 걱정할 것 없네. 이성은 유지 중이니까.”
“다행입니다.”
“하나 저 치들은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혜량이 평소와 달리 무시무시한 안광을 뿌렸다.
자신은 물론이고 사문까지 싸잡아 무시한 만큼 이대로는 절대 지나칠 수 없었다.
검마와 아직 못 다한 승부가 있었지만 그보다 이쪽이 더 먼저였다.
섭무천의 앞에 선 법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섭무천을 살폈다.
서 있는 자세, 무장, 호흡, 눈빛 등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확인했다.
천년마교주와 무림맹주의 대결인 만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여기지 않은 것이다.
‘무림맹 전체가 날 지켜보고 있다.’
뒤에 있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법무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중원무림의 대표로 이 자리에 선 만큼 패배는 있을 수 없었다.
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달리 생각하면 지금의 대결은 기회였다.
‘여기서 마교주를 쓰러뜨리면 그대로 마인들을 밀어버릴 수 있다.’
초대 천마에 비견되는 무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눈앞의 마교주는 강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의 무공을 본 이들은 드물었다.
검을 뽑은 지도 오래 되었다고 들었고.
“준비하시오.”
“난 아까부터 다 됐는데?”
팔짱 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는 섭무천을 향해 입을 열었던 법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섭무천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으로 향했다.
“그렇소이까.”
“응. 그러니까 얼마든지 들어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무림맹주이자 소림사의 방장을 눈앞에도 두고도 섭무천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팔짱을 낀 상태에서 손만 펼쳐 흔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법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파아앗!
상대가 자신을 경시한다면 그걸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방심을 이용해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우우우웅!
땅을 박찬 법무의 신형이 순식간에 섭무천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극성에 이른 대나이신법(大那移身法)이었다.
거기에 법무는 백보신권(百步神拳)도 더했다.
간격이 좁혀지는 그 찰나의 순간조차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퍼퍼퍼펑!
이윽고 무형의 권강이 섭무천의 전신을 두들겼다.
백보 밖의 바위조차 으스러뜨리는 막강한 권격이 폭우처럼 섭무천의 전신에 쏟아졌던 것이다.
“흐읍!”
전후좌우 할 것 없이 백보신권을 쏟아내던 법무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코앞에 도착하자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로 자연스럽게 바꾸었던 것이다.
쌔애애액!
< 제 97장. 천년마교의 지배자.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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