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13화 (313/325)

< 제 97장. 천년마교의 지배자. -01 >

온갖 서류들로 한 가득인 책상에 앉아서 제갈현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격전에서 저격당해 죽을 뻔했지만 정작 그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벽우진의 말마따나 전장에서 죽음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총군사라고 해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피해가 너무 커.”

이제 고작 첫 번째 전투를 치렀을 뿐인데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가 막심했다.

종남파의 장문인인 곽자량이 죽었고 황보세가주와 하북팽가주는 당장 전투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명문세가라 할 수 있는 하후세가와 산동악가는 가주를 잃었고 말이다.

물론 천년마교 역시 야수마가주, 권마, 곤마가 죽고 천패마가주가 중상을 입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림맹의 피해가 더 컸다.

“인해전술까지 펼쳤는데도 승기를 잡지 못하다니.”

제갈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천년마교 역시 상당한 출혈이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무림맹보다는 피해가 적었다.

핵심 전력 역시 크게 잃지 않았고 말이다.

“구마가 그 정도로 강할 줄이야.”

제갈현이 책상을 두드렸다.

강할 거라고 예상을 하기는 했었다.

역사적으로 봐도 교주의 친위대는 늘 강했으니까.

숫자는 늘 달랐지만 한 가지만은 동일했다.

“권제와 독황께서 그렇게 고전하실 줄이야.”

곤마와 권마도 벽우진이 아니었다면 처치하지 못했을 터였다.

종남파의 장문인인 곽자량조차도 권마와 십 합을 채 겨루지 못했다.

오대세가의 수장인 황보강, 팽무광이 악진광, 하후건과 협공을 했음에도 권마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마인인 구마가 아직도 일곱이나 남아 있다는 사실에 제갈현은 가슴이 무거웠다.

절대고수에게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질로만 승부를 보던 천년마교가 이제는 숫자로도 밀어 붙이니.”

구마도 구마였지만 더 큰 문제는 숫자로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이라 불리는 곳이 천년마교인데 이번 정마대전에는 중원과 새외의 마인들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과거처럼 인해전술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거기다 북해빙궁, 오독문, 대막과의 전쟁으로 인해 축적된 피해도 상당했기에 제갈현은 머리가 아파왔다.

“오독문도 신경 써야 하고.”

모든 이들이 눈앞의 천년마교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늘 오독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언제든지 독이 잔뜩 묻은 비수가 턱밑으로 파고들 수 있었기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똑똑.

“나야, 총군사.”

“아, 들어오시지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제갈현이 헐레벌떡 일어났다.

총군사직에 있는 그였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로서도 예를 다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이번 정마대전에서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이였고.

달칵.

다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제갈현이 허리를 곧추세울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벽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그렇듯 뒷짐을 지고서 여유롭게 걸어오는 모습에 제갈현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어제 전장을 가로 지를 때도 벽우진은 저 자세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감히 벽우진의 앞을 가로 막지 못했다.

“이거 차 한 잔 얻어 마시기 미안할 정도인데?”

“다른 자리가 있습니다. 이 책상은 업무용입니다. 다탁은 따로 있지요.”

“아, 그래?”

“예. 이리 오시죠.”

제갈현이 창가 쪽으로 벽우진을 이끌었다.

그러자 과연 그의 말대로 창문 앞에 작은 다탁과 두 개의 의자가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정신없지?”

“아무래도 피해가 피해이다 보니까요. 하후세가와 산동악가 뿐만 아니라 죽은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종남파도 난리더만.”

“장문인이 죽었으니까요. 그것도 불명예스럽게 돌아가셨으니.”

제갈현이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멋지게 전사했다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곽자량은 호기롭게 달려든 것과 너무나 비교되게 허망하게 죽었다.

권마에게 별다른 상처도 입히지 못한 채로 말이다.

“상대가 너무 강했어. 만만하게 보기도 했고.”

“그래도 다행히 장문인께서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아직까지는 큰 탈이 없습니다.”

“분위기만 안 좋을 뿐이지.”

“예. 보통은 가족이 죽으면 분기탱천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지금은 다들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전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자기 목숨이니까. 근데 그건 어쩔 수 없어.”

벽우진이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목숨이 한 개인 만큼 몸을 사리는 것은 당연했다.

정의의 기치 아래 모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가 협의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저도 이해는 하지만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사기가 많이 좋지 않지?”

“예. 아무래도 다들 충격이 큰 모양입니다.”

“그걸 이겨내야 하는데 말이지.”

강대한 적을 마주했을 때 맞서 싸우는 이는 의외로 드물었다.

투쟁심은 모두에게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앞장서는 이들이 중요했다.

사기를 진작시키고 투지를 끓게 만들 이가 현재 무림맹에는 필요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해볼 만 하다는 것입니다. 피해가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병력은 계속 증원되고 있으니까요.”

“이대로 시간을 끌면 유리한 건 확실히 우리 쪽이지. 천년마교는 원정군이니까.”

“하지만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테지. 정복하려고 온 이들인데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장기전을 좋아하는 성향도 아니고.”

“문제는 구마입니다. 다치신 분들보다 구마의 회복이 빠르다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제갈현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그 역시 야수마가주의 경우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골치 좀 썩이겠어.”

“후우. 쪽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 푹 자기는 했어?”

“그렇긴 합니다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제갈현이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늙어서 회복이 더딘 당민호와 금강신니와 달리 벽우진은 지금이 전성기였다.

아니, 어쩌면 이번 전쟁을 계기로 더욱더 성장할지도 몰랐다.

지금만 하더라도 괴물이라 불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끝을 본 적이 있나? 전력을 다한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제갈현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껏 벽우진과 이래저래 얽혀서 만나왔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전력을 다한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하다못해 힘겨워 했던 모습도 보지 못했다.

“젊고 쌩쌩한 애들 아직 많이 있잖아. 갑자기 고수가 떡 하니 튀어나올 수도 있고.”

“검후와 보타문이 있어 참 든든합니다. 그만한 전력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말고는 없으니까요. 특히나 세력이 약해진 지금은 더더욱 말이지요.”

제갈현의 뇌리로 공동파, 청성파, 점창파가 떠올랐다.

반파를 넘어 거의 멸문에 가깝게 피해를 입은 곳만 세 곳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구대문파들이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무당파와 아미파, 형산파 정도만 본래의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확실히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이기는 하지. 아마 천하무림 비무대회가 아니었다면 인연이 닿지 못했을 거야.”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참, 그리고 장문인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면서 제갈현이 부탁을 한 경우는 거의 없어서였다.

전쟁이야 이미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사실 투지는 그리 크게 일지 않았지만 말이다.

“예. 청룡단과 백호단을 한 번 찾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아, 두 단의 피해가 상당하다는 소식은 들었어. 만용을 부리다가 죽은 후기지수들이 상당하다고.”

“···예.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부상자도 많은 상태이고요.”

“반면에 폭혈광마대를 제외하면 네 부대는 건재한 편이고.”

제갈현이 이마를 짚었다.

어제 있었던 청룡단과 백호단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모든 신경이 곤마에게 향해 있었기에 그쪽 전투에는 시선도 두지 않았었다.

“급하게 충원은 하고 있는데 반복될까봐 걱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서 한 소리 하고 오라는 건가? 깝치지 말고 주어진 지시사항이나 잘 준수하라고?”

“허허허.”

제갈현이 겸연쩍게 웃었다.

너무나 직설적인 말에 살짝 당황했던 것이다.

하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러면 비틀어서 받아들이겠지만 벽우진이 그러면 그러려니 할 가능성이 높았다.

“호통 반 독려 반인 건가. 근데 나는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데 말이지. 총군사도 알다시피 나는 무공과 입에 재능이 모조리 집중된 인간이라.”

“가셔서 한 마디만 해주셔도 다들 기뻐할 것입니다. 다름 아닌 패선이시지 않습니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장문인을 우상으로 삼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후기지수들 중에서요.”

“우상은 무슨.”

벽우진이 손사래를 쳤다.

우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은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다른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저 그가 바라는 건 곤륜파가 완전하게 부활하고 제자들이 잘 먹고 잘 살면 그걸로 족했다.

“장문인을 닮고자 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목표로 잡은 이들도 많고요.”

“나보다는 맹주가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럼 같이 가시지요.”

“그렇다면야.”

벽우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애매했던 것이다.

“태상가주님은 어떠십니까?”

“입만 살아 있어. 나머지는 안 좋아.”

“아···.”

“적어도 오 일 정도는 푹 쉬어야 할 것 같아. 늙은 몸뚱이라 회복이 더디거든.”

제갈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어째 상황이 악화일로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상대였던 도마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당민호의 부재는 무림맹 입장에서는 상당히 컸다.

“하긴. 나이가 있으시니까요.”

“그래도 황보세가주나 하북팽가주보다는 낫지. 직접적인 전투는 힘들어도 하독은 가능하니까.”

“아!”

“도마에게 당해서 독이 아주 바짝 올라 있더라고.”

제갈현이 눈을 빛냈다.

하독 정도라면 중상을 입었어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당민호의 수준이라면 피는 물론이고 침조차도 맹독이라 할 수 있었다.

다다다다!

제갈현이 반색한 표정을 지을 때 멀리서 다급함이 느껴지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인지 전력으로 그의 집무실을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초, 총군사님!”

“무슨 일이냐. 벽 장문인도 계신 마당에.”

근엄한 얼굴로 제갈현이 수하를 타박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예의에 어긋난 짓이어서였다.

그러자 사내가 식겁한 얼굴로 벽우진과 제갈현을 향해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이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됐어.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고.”

“교주가 나왔습니다, 총군사님.”

“교주? 천년마교주?”

“예. 구마만 대동하고서 성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갈현의 눈동자가 순간 멍해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반면에 벽우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곱 명만 대동하고서 나왔다고?”

“예.”

“전언은?”

“아직 없습니다. 마교주가 나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보고하러 달려온 것입니다.”

제갈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직접 확인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맹주에게는?”

“맹주님께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가자고.”

“예.”

벽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제갈현과 함께 방을 나섰다.

< 제 97장. 천년마교의 지배자.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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