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12화 (312/325)

< 제 96장. 죽음에는 죽음으로. -04 >

“네놈이 가주님을!”

“곱게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푸푸푸푹!

사슴을 사냥하는 늑대들처럼 두 가문의 무인들은 권마가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단전부터 박살냈다.

공력을 다 소모한 걸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끄어어억!”

잠시 후 권마의 처절한 비명성이 들려왔지만 벽우진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죽은 이들에게 약속하기도 했고.

거기다 인질로 붙잡혀 있던 황보강과 팽무광을 개왕이, 악진광과 하후건의 시체를 정은 사태가 수습하는 걸 확인한 벽우진은 몸을 돌려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곤마에게 걸어갔다.

“다른 일은 다 정리 되었으니 이제 우리 일을 마무리 해볼까?”

“······.”

정신줄을 놓은 것인지 흐리멍덩한 눈동자의 곤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몸뚱이는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목숨 값을 받아야지.”

벽우진은 만신창이가 된 곤마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곤마는 대답이 없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대(大)자로 뻗어 있기만 하는 모습에 벽우진은 무상검을 뽑았다.

곤마의 목을 베기 위해서였다.

서걱.

작은 파육음과 함께 곤마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됐다.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는 말끔한 절단이었다.

“시원하군.”

다른 이들은 말한다.

복수를 정작 하면 허탈한 심정뿐이라고.

딱히 달라질 게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생각은 달랐다.

할 수 있는 건 하는 게 나았다.

용서는 성인군자나 약자만 하는 것이었다.

스윽.

곤마의 머리를 챙겨든 벽우진은 몸을 돌렸다.

볼 일을 다 봤으니 다른 이들의 전투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콰콰콰쾅!

“크아아압!”

벽우진의 시선이 한 자루 검을 귀신 같이 다루는 장년인과 싸우고 있는 당민호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친구인 당민호에게 가장 먼저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 곤마도 죽었다고 합니다.”

널찍한 대전 가장 안쪽에 위치한 태사의를 향해 오체투지를 한 채로 은마각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권마에 이어 곤마마저 죽었다고 하자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패선에게 죽은 모양이야?”

“그렇습니다.”

태사의의 옆에 서 있던 여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진명마가주와 야수마가주를 쓰러뜨렸던 이가 벽우진이었다.

그런 만큼 곤마가 당했다고 해서 이상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벽우진은 중원제일인이라 불리는 무인이었다.

“권마에 이어 곤마라. 근데 둘 다 패선에게 당했단 말이지.”

“예, 주군.”

“심지어 곤마를 상대한 후에 권마를 상대했다고?”

“보고에 의하면 아예 상대가 안 되는 수준이라고···.”

은마각주가 교주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교주에게 있어 구마는 친위대라 할 수 있는 만큼 단어 선택을 조심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역시 저력이 있는 곳이라니까.”

“저는 두려운데요, 주군.”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 생글거리는데?”

“그야 주군이 곁에 있으니까요. 저 혼자서 싸워야 한다면, 그때는 무서울 것 같아요.”

요마가 한순간에 표정을 싹 바꿨다.

구마의 일인으로 불리는 고수가 바로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곤마나 권마를 그리 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요마는 혼자서 벽우진을 상대하는 건 벅차다고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셋은 모여야 승산이 있겠지. 근데 구마 중 셋이 협공해야 하는 무인이 중원에 있을 줄이야···.’

요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그녀는 이번 대계가 상당히 쉬울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역대 정마대전 중 가장 싱거운 정마대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예상과 너무나 많이 달랐다.

‘첫 전투에서 구마 중 둘이 사망할 줄이야.’

중원무림의 저력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었다.

나약한 놈들이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와 달리 많은 준비를 했었다.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중원무림의 전력을 깎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랬는데도 소용없다는 건가.’

요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노력이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였다.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야.”

“저 정도의 고수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너무 쉬운 것보다는 낫잖아? 무혈입성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데. 전쟁은 전쟁다워야지. 그래야 침공한 의미가 있지.”

“소녀는 당연히 본교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너무 큰 것 같아서요.”

“약자는 죽고 승자는 살아남는다. 둘 다 약했기에 죽은 것뿐이야. 그리고 전쟁 속에서 새로운 강자가 탄생하는 법이고. 빈자리는 다시 채우면 된다.”

친위대라 할 수 있는 둘이 죽었음에도 교주는 딱히 슬퍼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에게 죽음은 친숙했다.

더구나 비겁한 술수에 당한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싸우다 죽은 것이니 만큼 분노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은원을 기억할 뿐.

“다른 이들의 대결은 어떻게 되고 있지?”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쓸려 나갔는데도 여전히 고수들이 남아 있단 말이지.”

요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가자.”

“직접 보시게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패선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무림맹주도 아직 안 나섰다며?”

교주가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마가 보필하듯 따라붙었다.

“딴에 교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나서지 않았으니 자신도 나서지 않겠다는 건가. 하긴 소림사의 방장이라면 그럴 자격은 충분하지. 중원무림의 태산북두 아니더냐.”

“그래 봤자 교주님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일 뿐입니다.”

은마각주가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말했다.

진심을 담아 우렁차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네. 무림맹주도, 패선도.”

“뭐해? 얼른 일어나서 앞장서지 않고.”

“예!”

요마의 닦달에 은마각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구부정한 자세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콰콰콰쾅! 꽈앙!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굉음과 폭발음이 커졌다.

싸우는 이들은 몇 안 되었지만 워낙에 고수들이었기에 소리가 요란했던 것이다.

“박빙인가.”

곤마와 권마를 제외한 여섯 명이 각자의 상대를 앞에 두고서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 교주가 미소를 지었다.

구마가 싸우는 모습을 보니 피가 끓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나설 때가 아니었다.

스윽.

구마를 한 번씩 본 교주의 시선이 좀 더 먼 곳으로 향했다.

바로 무림맹주가 있는 곳을 쳐다봤던 것이다.

“소림무제입니다.”

“그래 보여.”

말없이 응시하는 교주를 향해 은마각주가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굳이 그가 설명하지 않아도 교주는 한눈에 법무를 알아봤다.

승복을 입고 있었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풍기는 존재감 역시 도마와 싸우고 있는 무당권제를 제외하면 가장 강렬했다.

“패선은?”

“저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요마는 곤마와 권마를 죽인 벽우진이 더 궁금한 모양인지 은마각주를 재촉했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곤마의 수급을 발아래 둔 채로 구마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는 벽우진에게 닿았다.

“나조차도 볼 수 없을 정도라고?”

벽우진을 본 요마의 동공이 흔들렸다.

강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눈으로도 경지를 가늠하지 못할 줄은 몰라서였다.

물론 경지가 높을수록 자신의 무경을 감출 수 있다고 하지만 엇비슷한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오.”

법무를 일별한 교주의 시선이 벽우진에게 닿았다.

한데 그때 벽우진 역시 교주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똑똑똑.

벽우진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당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누군 줄 알고 들어오래야?”

“대놓고 기운을 흘리는데 모를 리가 있나?”

“완전 중환자인데?”

방 안으로 들어간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얼굴을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에 붕대가 감겨져 있어서였다.

“죄다 스친 건데 애들이 심각하게 반응한 거야. 침만 바르면 다 낫는 상처들인데.”

“그럼 피로 물든 붕대는 뭐야?”

벽우진의 시선이 당민호의 몸 곳곳에 닿았다.

벌겋게 물들어 있는 부위를 눈으로 정확하게 짚어주었던 것이다.

“스쳐도 피는 나오니까.”

“허세는. 만신창이가 된 거 이미 다 봤는데.”

“살갗만 베인 거라니까!”

당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곤마와 권마를 때려잡은 벽우진과 달리 그는 도마 한 명을 상대로 절절맸다.

구마의 수좌라는 검마도 아니고 고작 도마 한 명에 고전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민호는 자신의 상처를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왼팔은 아예 들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끄응! 대신 그 놈은 왼쪽 다리를 못 움직이고 있을 것이야!”

“어제 보니까 쩔뚝 거리기는 하더라.”

“그치?”

당민호가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아볼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근데 신체재생 쪽은 천년마교 쪽이 우위에 있지 않나. 야수마가주도 멀쩡하게 날뛰던데. 그 정도 의술이면 도마도 금세 회복될 거 같은데?”

“···내가 환골탈태를 한 번 더 했었어야 했는데.”

당민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늙어버린 육신은 회복력도 더뎠다.

가뜩이나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회복력까지 더디자 나오는 것은 탄식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세월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니까.”

“넌 빗겨갔잖아.”

“그럼 너도 58년 동안 갇혀 지내던지.”

“그건 너무 끔찍해.”

당민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 해도 두렵고 끔찍했던 것이다.

젊어지고 고수가 되는 건 좋았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58년을 보낼 자신은 없었다.

“난 오죽 했겠냐.”

“너야 원래부터 독한 놈이었으니까 가능한 거고.”

“부상이 심각해서 걱정됐었는데 말하는 본새 보아하니 괜찮은 것 같네.”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 멀쩡하다고. 이깟 상처 하루면 다 낫는다. 본가는 의술도 천하일절이니까.”

전신을 붕대로 감고 있음에도 당민호는 콧대를 세웠다.

그런데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벽우진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하루는 개뿔. 비천단이나 소환단, 소청단이면 모를까 하루 만에 회복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문병을 온 거냐, 내 속을 긁으러 온 거냐?”

“둘 다?”

“이 자식이!”

당민호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렇지만 침상에서 내려오지는 못했다.

멀쩡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부상은 심각했다.

거의 난도질을 당한 상태이다 보니 운신이 힘든 수준이었다.

“얼른 나아라. 그래야 복수를 하지. 이대로 판정패를 받고 끝낼 순 없잖아?”

“판정패라니! 내상은 그 녀석이 더 깊어! 난 외상이 심한 거고!”

“이제야 인정했네. 긁힌 거라더니.”

“으윽!”

당민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격하게 소리쳤더니 상처가 벌어지며 찌릿한 고통이 전해졌던 것이다.

동시에 상처 주변의 붕대가 축축해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쉬고 있어. 그래야 빨리 회복이 되지.”

“내일이면 다 낫는다.”

“만수신의가 봐줘도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한 걸 확인했으니 이제 다른 볼 일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두고 봐. 내일은 멀쩡히 걸어 다닐 테니까.”

“그래그래.”

호언장담하는 당민호를 향해 벽우진은 손을 흔들며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가 나오기 무섭게 문 너머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제 96장. 죽음에는 죽음으로. -04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