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11화 (311/325)

< 제 96장. 죽음에는 죽음으로. -03 >

“허.”

그 모습에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실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절박했다.

“자, 장문인!”

“제발 도와주시오!”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보강, 팽무광과 달리 권마의 손아귀에 있는 둘은 간절하게 벽우진을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사가 벽우진에게 달려 있었기에 절실하게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대화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군.”

“대화?”

“그래. 너 역시 이대로 이 놈들이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 아냐?”

꿀꺽!

죽음이라는 말에 악진광과 하후건이 마른침을 삼켰다.

새삼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막연하게 느끼는 것과 코앞까지 다가온 것은 너무나 달랐다.

게다가 문제는 벽우진의 손에 있는 이가 곤마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전쟁 중에 패배자가 죽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오대세가와 명문세가의 수장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인질교환이라도 하자는 거냐?”

벽우진이 축 늘어져 있는 곤마를 툭 던졌다.

그러나 살아 있음에도 곤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던져진 채로 숨만 쉬었던 것이다.

“못할 것도 없지.”

빠르게 곤마의 상태를 살핀 권마가 말했다.

곤죽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단전은 멀쩡했다.

외상만 지독할 뿐 본교의 의술이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기에 권마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이들이 죽게 내버려두겠다고?”

“끄아아악!”

하후건과 악진광이 비명을 질러댔다.

갑자기 목을 조이자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비명소리에도 벽우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기 싸움을 하려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말해주고 싶군. 난 복수를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지 네놈이랑 기 싸움을 하려고 온 게 아니거든.”

“···복수가 더 중요하다는 거냐?”

“그래.”

벽우진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분명 네 사람은 중원무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곤륜파와는 남이었다.

또한 청민과 비교할 수도 없는 인물들이었다.

“벽 장문인!”

“제발 저희 가주님을 구해주십시오!”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벽우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무림맹의 병력이 모여 있는 곳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였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희 가주님을!”

“도와주십시오, 장문인!”

애절하게 벽우진을 부르는 이들은 바로 사로잡힌 가주들의 가솔들이었다.

특히 산동악가와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유독 크게 소리쳤다.

권마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이상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서였다.

“이거 분위기가 인질교환을 하지 않으면 천하의 나쁜 놈이 될 것 같은데?”

“······.”

권마가 히죽 웃었다.

상황이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서였다.

“이제는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은데.”

“얕은 수작 부리지 마라. 어차피 네 명 다 보낼 생각도 없는 주제에.”

“생명의 무게는 똑같으니까. 그러니 넌 선택만 하면 된다. 누구를 맞바꿀 것인지를.”

부르르르!

붙들려 있던 두 사람이 몸을 떨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결과가 나와서였다.

동시에 둘 다 빠르게 궁리했다.

무슨 말을 해야 벽우진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이다.

“어, 어!”

“그게 무슨 말이냐!”

그리고 당혹감에 빠진 건 네 가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질교환만 생각했지 넷 중 한 명만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몇몇은 빠르게 상황파악을 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주들처럼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 지를 궁리했던 것이다.

“원한다면 선택지를 줄여줄 수도 있다. 크흐흐흐!”

“해.”

“뭐라고?”

“하라고.”

비릿하게 웃던 권마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이런 상황에서도 벽우진이 뜻을 굽히지 않을 줄은 몰라서였다.

“패배한 순간부터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모르고 여기에 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더 치욕적일 걸.”

붙잡혀 있는 둘의 동공이 흔들렸다.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살고 싶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기에 둘은 눈빛으로 벽우진에게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도 벽우진의 표정은 일절 변화가 없었다.

“끝까지 복수를 포기하지 못하겠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약속해주지. 저 놈을 곧바로 보내주마.”

악진광과 하후건의 두 눈이 감겼다.

둘은 벽우진의 말뜻을 단박에 이해했던 것이다.

반면에 권마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벽우진의 말이 허언처럼 들리지 않아서였다.

“저들이 가만있을 것 같으냐!”

“착각한 모양인데 넷을 죽인 건 너지 내가 아냐.”

권마가 네 가문을 거론했지만 벽우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권마를 주시하기만 했다.

콰콰콰쾅!

그러는 사이에도 주변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각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네놈이 그러고도 명문대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느냐!”

우드득! 우득!

권마가 떠들거나 말거나 벽우진은 발을 들어 곤마의 발목을 짓이겼다.

잠시 지연되었을 뿐 청민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벽우진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 놈!”

거침없이 곤마를 짓밟는 모습에 권마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쥐고 있던 하후건의 목을 분질러 버렸던 것이다.

이윽고 목뼈가 꺾인 하후건이 혀를 내밀려 죽었다.

“끅!”

그러나 권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반대쪽의 악진광 역시 하후건과 똑같이 목을 부러뜨렸다.

“가, 가주님!”

“크흐흑!”

순식간에 절명한 두 사람의 모습에 산동악가와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누구도 권마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달려들어 봤자 개죽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본인들 스스로가 잘 알아서였다.

“이 둘은 네놈이 죽인 거다.”

순식간에 둘을 죽인 권마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곤마의 사지를 분질렀다.

그에게는 둘의 죽음보다 청민의 복수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쫑알쫑알 되게 시끄럽네.”

“흡!”

따로 빼놓았던 황보강과 팽무광을 향해 손을 뻗던 권마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무지막지한 인력이 느껴져서였다.

그래서 그는 진기를 일으켜 대항했다.

“왜? 나랑 한 판 붙고 싶은 거 아니었어?”

“이 자식이!”

인력의 주인이 벽우진이라는 것을 확인한 권마가 저항하는 것을 멈췄다.

대신 땅을 박차며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다.

인력을 이용해 더욱 빠르게 접근했던 것이다.

웅웅웅!

동시에 솥뚜껑만 한 두 주먹에 진기를 집중했다.

평생토록 고련한 붕천마공(崩天魔功)을 극성으로 일으켰던 것이다.

흥분했어도 권마는 한줄기 이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곤마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걸 봤기에 절대 방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쑤아아앙!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권마가 마기를 잔뜩 머금은 일권을 내질렀다.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정권 찌르기를 펼쳤던 것이다.

쩌어어엉!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그러나 권마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공격이 막혔음을 본능적으로 느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하지는 않았다.

웅웅웅!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을, 두 번도 안 되면 세 번을 날리면 되었다.

제아무리 단단한 철벽도 수없이 두드리다 보면 결국에는 부서졌다.

그렇기에 권마는 멈추지 않았다.

한 번에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고 말이다.

스으으윽.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주먹질 사이로 새하얀 손이 나타났다.

시커먼 마기로 이루어진 권강들 사이에서 나타났기에 더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손을 봤음에도 권마는 어쩌지 못했다.

워낙에 절묘한 순간에 파고들었기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덥석!

너무나 자연스럽게 파고들어온 손은 권마의 팔뚝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들어서 바닥에 메다꽂았다.

콰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권마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를 들은 힘도 힘이지만 원체 몸이 단단했기에 땅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권마가 박혔다.

“크아아아!”

하지만 권마는 곧바로 뛰쳐나왔다.

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다 속절없이 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에 권마는 사납게 포효하며 재차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큭!”

권마의 맹렬한 파상공세에도 벽우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권마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날아드는 권마의 강권을 정확히 타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권마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투두둑.

그뿐만 아니라 권마의 주먹에서는 어느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그의 주먹이 벽우진과의 격돌로 인해 찢겨지고 갈라졌던 것이다.

“제기랄!”

반면에 벽우진의 손은 그대로였다.

처음 봤던 모습과 똑같이 새하얗고 말끔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긁힌 자국도 없는 모습에 권마가 이를 악물었다.

누가 봐도 그가 현격하게 밀리고 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하아압!”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권마가 단전의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반드시 벽우진을 죽이겠다는 의지로 최후의 절초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윽고 권마의 전신이 검게 물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검은 기운이 한 곳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오른손 주먹에 집중되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대지가 흔들렸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운이 응축되었던 것이다.

기운의 주인인 권마조차도 힘겨워할 정도로 응축된 마기가 일순 쏘아졌다.

부지불식간에 공간을 꿰뚫으며 벽우진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죽어라!”

모든 것을 한순간에 쏟아낸 권마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번 공격은 제아무리 벽우진이라도 별 수 없을 게 분명해서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수법이기도 했고 말이다.

“제일 쓸 만하네.”

“어?”

“근데 부족해.”

까드드득!

권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던 강탄(罡彈)이 벽우진의 손바닥에 막혔다.

별다른 기운 하나 서리지 않은 장심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권마의 혼신의 힘이 담긴 강탄은 벽우진의 손아귀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박살났다.

벽우진이 장난감을 부수듯 너무나 쉽게 권마의 강탄을 바스러뜨렸던 것이다.

“······!”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권마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권마의 수난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날 부르지 않았다면 그래도 살 수는 있었을 텐데. 뭐, 자업자득이니까 스스로를 탓하도록.”

“크윽!”

강탄을 가루로 만든 벽우진이 다시 손을 펼쳤다.

예의 허공섭물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자 권마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악착같이 버티려는 기색이었지만 공력을 방금 전 일격에 전부 다 쏟아부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신음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턱!

너무나 쉽게 날아온 권마의 머리를 벽우진은 움켜잡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권마가 연체동물처럼 벽우진의 몸을 휘감았다.

비록 내공은 한 톨도 없었지만 수십 년 동안 고련한 육체와 체력은 멀쩡했기에 그 점을 이용해 관절기를 펼친 것이다.

“소용없다니까.”

“끄으읍!”

그러나 몸을 조이는 것보다 벽우진의 침투경이 훨씬 빨랐다.

굳이 손을 쓰지 않고 공력을 이용해 권마의 내부혈맥을 헤집은 벽우진은 그대로 무림맹 쪽으로 던졌다.

산동악가와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권마를 집어던졌던 것이다.

< 제 96장. 죽음에는 죽음으로.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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