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5장. 구마(九魔). -02 >
저벅저벅.
천년마교의 진형을 거침없이 꿰뚫은 무상검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벽우진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벽우진은 되돌아온 무상검을 잡지 않았다.
대신 뒷짐을 진 채로 무상검이 만든 길을 거닐었다.
스슥! 스스슥!
그런데 놀랍게도 누구 하나 감히 벽우진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같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 벽우진이 보인 이기어검의 수법에 모두 다 압도당한 것이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저 놈 역시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에 불과하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란 말이다!”
“칼에 맞으면 뒈지는 건 똑같다! 공격해!”
아직 벽우진을 만나본 적이 없는 폭혈광마대와 잔영비마대가 소리쳤다.
이기어검이라는 놀라운 경지를 목도했지만 그렇다고 기죽지는 않았다.
괴물처럼 보여도 벽우진 역시 인간인 건 똑같아서였다.
마제처럼 신이 된 이라면 모를까 벽우진 정도는 자신들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뒈져라, 이 새끼야!”
뒷짐을 진 채로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벽우진을 향해 수십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상대하던 무림맹의 무인들을 놔두고 모조리 벽우진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후우우웅!
그러나 그 누구도 벽우진에게 닿지 못했다.
갑자기 일어난 거센 바람이 그들을 끌어 당겼던 것이다.
“아니···!”
“흐어어!”
무상검이 회전하면서 일으킨 바람은 무지막지한 흡인력을 뿜어내며 마인들을 집어삼켰다.
땅을 박찬 이는 물론이고 대지에 두 발을 대고 있던 마인들도 가리지 않고 빨아들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정작 벽우진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게 무슨···!”
“대체 뭐야? 뭘 어떻게 한 거야?”
무상검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마인들은 다시 나오지 못했다.
대신 하늘에서 혈우(血雨)가 쏟아졌다.
진짜 혈향을 풍기는 피가 이슬비처럼 추적추적 내렸던 것이다.
부르르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갈려나간 동료들과 동족들의 모습에 흉포하기 짝이 없었던 마인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공격에 처음으로 겁을 먹은 것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지금껏 단 한 번도 뒷걸음질 친 적이 없던 마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저벅저벅.
하지만 정작 벽우진은 그런 마인들에게는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고서 걸음을 옮겼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성벽을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벽우진을 핏방울 하나 없이 매끈한 자태의 무상검이 호위하듯 주위를 배회하며 뒤따랐다.
마치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전장을 가로 지른 벽우진이 성벽 위를 쳐다봤다.
정확히 궁마가 서 있던 자리를 올려다봤던 것이다.
“면상 좀 꺼내지? 네놈을 만나러 이 몸이 여기까지 행차했는데. 면상은 꺼내야 하지 않겠어?”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 여기를 혼자 찾아오다니.”
한 손에 애병을 든 채로 궁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싸늘한 눈으로 벽우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도 벽우진은 되레 코웃음 쳤다.
“자신이 되게 대단한 존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복수심에 눈이 멀어 지금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야.”
“저딴 찌끄레기들을 믿고 있는 거냐? 아니면 나머지 구마를?”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에 다가오지는 못하고 포위망만 구축해 놓고 있던 마인들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벽우진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등을 훤히 보이고 있음에도 어느 누구 하나 공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난 나를 믿을 뿐이다.”
“됐고. 넌 하나만 대답하면 된다.”
“네 사제를 죽인 자 말이냐?”
“맞아.”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는 벽우진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너무나 섬뜩했다.
얼굴은 그대론데 입술만 찢어졌던 것이다.
언뜻 귀기가 느껴지는 표정에 궁마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내가 왜 말해줘야 하지?”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 만약 그러면 몸이 좀 고달파질 거야. 어쩌면 병신이 될 지도 모르고.”
“반대의 상황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벽우진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실소를 흘렸던 것이다.
그 모습에 궁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크큭! 크하하핫! 저 놈 물건인데?”
“패선, 패선 그러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큭큭큭!”
궁마의 뒤에서 두 명의 파안대소가 들려왔다.
박수까지 치는지 손바닥이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벽우진의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싸늘한 눈으로 성벽 위를 올려다봤던 것이다.
“근데 하늘 밖의 하늘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거 같군. 중원이니까 패선이라는 별호를 얻었지 천산이었다면 패(覇)라는 글자는 붙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단 천패마가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패라는 글자에 유독 집착하는 녀석들이니까.”
권마의 말에 소마가 맞장구를 쳤다.
가문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외인에게는 으뜸 패자를 허용하지 않는 게 천패마가였다.
“하늘 밖의 하늘이라고?”
“왜? 아닌 거 같나?”
권마가 솥뚜껑만 한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증명해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권마의 도발에 벽우진은 되레 피식 웃었다.
“네놈 정도로? 어이가 없군.”
“뭐라고?”
권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놓고 비웃는 행동에 심기가 크게 언짢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시끄럽고 내 사제를 죽인 놈이나 데리고 나와.”
“싫다면?”
“그럼 일단 너부터 뒈지게 맞겠지. 내 말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할 정도로.”
“크큭! 크하하핫!”
권마가 고개를 젖히며 앙천광소 했다.
그런데 웃음소리에도 내공을 담은 것인지 주변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상당히 떨어져 있던 마인들과 무림맹의 무인들이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말이다.
“저거 미친놈 아냐?”
“복수심에 눈이 돌아갔으니 생각이라는 게 제대로 되겠어.”
“그래도 실력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군.”
궁마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소마가 입맛을 다셨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이라면 나름 상대할 맛이 날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그 기대는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미치광이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어서였다.
“저 놈은 내가 맡겠다.”
“뭐?”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니까. 그리고 매에는 주먹이 제격이지.”
권마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거의 통보나 마찬가지였지만 의외로 궁마나 소마는 따지지 않았다.
“네가 하겠다면야.”
“미친놈에게는 미친놈이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뭐라고?”
소마의 말에 권마가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나 권마에 비하면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소마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권마에게서 마기가 폭발했다.
하지만 소마도 기세로는 뒤지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구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실력 덕분이었다.
그런 만큼 소마는 얼마든지 덤비라는 듯이 마기를 폭발시켰다.
“개판이구만.”
“응?”
그때 낯선 음성이 성벽 아래에서 들려왔다.
새로운 인물이 벽우진의 옆에 내려섰던 것이다.
“저래서 마교 종자들이란.”
“넌 왜 왔어?”
“친구 따라 왔지. 혼자 서 있는 게 너무 외로워 보였다고나 할까.”
“퍽이나.”
“총군사 말 못 들었어? 구마가 나타나면 우리도 나서기로 한 거.”
구마를 앞에 두고서도 당민호는 농담을 했다.
그런데 나타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탁. 타탁.
두 사람의 주위로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아미파의 금강신니를 시작으로 무당권제와 낭왕, 소소선자와 괴성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얼추 숫자가 맞지 않겠습니까?”
“두 명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우진이와 내가 감당할 수 있지.”
마지막에 등장한 냉하성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자 당민호가 받았다.
일곱 명이라 구마를 상대하기에는 두 명이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벽우진과 자신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
“나는 왜 빼?”
“영화 사태야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뭐라고?”
칠십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는 금강신니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그녀의 눈썹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니까 배려해준 건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말을 해도 예쁘게 해야지. 어 다르고 아 다른 게 말인데.”
“미안미안. 근데 이 놈들아. 나머지 여섯 놈들도 얼굴 좀 보이지 그러냐? 혹시 셋이 전부인가?”
“그럴 리가.”
모여든 이들이 하나같이 거물이라서 그런지 다섯 명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앉아 있던 검마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었다.
전대와 당대를 대표하는 고수들의 등장에 호기심이 동한 것이었다.
“응? 하나가 비는데? 왜 여덟 명뿐이야?”
당민호가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아홉 명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는 것은 여덟 명뿐이어서였다.
“요마가 없는 것 같군.”
“유일한 여자이기에 신니에게 맡기려고 했건만.”
“빈니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
벽우진과 당민호의 대화에 영화 사태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구마 중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전부 다 쓰러뜨려야 하는 건 똑같아서였다.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쫓아내야 했다.
“그럼 다들 한 명씩 정하지. 난 남은 두 명을 맡을 테니.”
“난 딱 한 명이면 된다.”
“알지. 너무나 잘 알지. 그래서 너에게 우선권을 주려고.”
당민호의 시선이 성벽 위로 향했다.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구마에게로 말이다.
“그래서 누구냐? 내 동생 죽인 새끼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정상이 없구나.”
“넌 몇 살인데 그따위로 말하는 거냐?”
“허!”
도마가 콧바람을 내뿜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어서였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다들 표정이 살벌했다.
“패선과 독황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지. 적어도 우리와 어울릴 급은 되니까. 근데 나머지는 영···.”
“우리와 또래라는 건가?”
“빈니는 왜 빼는 거지?”
여전히 검을 품에 안고 있는 검마의 말에 영화 사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벽우진, 당민호와 같은 세대인 자신을 무시하자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됐고. 누군지나 말해. 두려우면 도망쳐도 되고.”
쓸데없이 길어지는 대화에 벽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입이 많아서 그런지 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였다.
애초에 그가 여기에 온 건 청민을 죽인 놈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
“대벽검이라면 내가 보내주었소이다.”
“곤마?”
“맞소.”
조용히 있던 곤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권마가 입맛을 다셨다.
곤마가 나선 이상 자신이 벽우진을 상대할 일은 없어서였다.
정상이 아닌 것 같기는 해도 벽우진은 당대의 중원제일인이었기에 권마는 내심 아쉬웠다.
“이제야 상판때기를 보게 되는구나.”
쿠르르릉.
벽우진의 기운 때문인지 미약한 지진이 일어났다.
지금껏 억눌러 놓기만 했던 분노가 폭발하자 무시무시한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걸 구마 역시 느낀 모양인지 표정이 순간적으로 싹 변했다.
“나머지도 내려와야지? 아니면 우리가 올라갈까?”
벽우진이 오직 곤마만을 쳐다보고 있을 때 당민호가 도발하듯 말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머지 일곱 명을 차례대로 쳐다봤던 것이다.
그 모습에 곤마를 제외한 일곱 명이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 제 95장. 구마(九魔).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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