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5장. 구마(九魔). -01 >
“확실히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약해빠진 놈들을 상대하는 것만큼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맏형이자 대형이라 할 수 있는 검마(劍魔)의 말에 도마(刀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은 없었다.
가장 연장자인 검마를 제외하면 다들 실력이나 나이 대가 비슷해서였다.
“근데 기분이 좀 묘한데. 심심하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또 쉽게 못 밀어붙이니까 답답하네.”
“그럼 네가 직접 나가든가. 주군께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으니까.”
“흠.”
손이 근질거린다는 듯이 연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하는 권마(拳魔)를 향해 등에 궁을 멘 중년인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런데 활은 가지고 있는데 화살이 들어 있는 전통(箭桶)은 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활만 덩그러니 메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요마(妖魔)는 어디 갔어?”
“보나마나 주군과 함께 있겠지. 자기가 책사인 양 늘 곁에 있잖아.”
“책사는 무슨.”
시종일관 두 눈을 감고 있는 백마(白魔)의 물음에 쌍둥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닮은 것이라고는 얼굴 밖에 없는 둘이 동시에 툴툴 거렸던 것이다.
“좋게 생각하게. 한 명 정도는 주군의 수발을 들어야 하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요마가 일처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 않나?”
“맞는 말씀입니다만···.”
검마의 말에도 도마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이 인자라도 되는 양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력이 아니라 미모와 아양으로 차지한 자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게. 다 본교를 위해서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나저나 패선이 자네를 그렇게 찾는다고 하던데.”
검마의 시선이 조용히 성벽 아래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야수마인들이 시신이 있는 곳을 말이다.
“저도 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무제와 권제도 아직 나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겠지. 감히 본교를 상대하는데 힘을 남겨 놓다니.”
곤마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권마가 투덜거렸다.
허약한 무림맹 따위가 여력을 남겨 놓았는데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로 우리가 신경 쓰인다는 뜻이겠지. 무인들을 갈아 넣을 정도로 말이야.”
검마의 시선이 성벽 아래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무림맹의 중군 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중원 전역에서 모인 군소방파의 무인들이 제갈준과 제갈세가의 지휘를 받으며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그들의 적은 천년마교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중원 전역에서 모여든 마도방파들의 마인들이 그들의 상대였다.
“보통은 난타전으로 가면 서로가 불리하지만, 저희는 좀 다르죠.”
“우리 애들은 강하니까. 강자존의 세상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약할 리가 있나.”
“야수마가는 운이 없다고 봐야죠. 검후와 보타문이면 육대마가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은 명문이니.”
도마의 시선이 현주혜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호승심 반 호기심 반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야수마가주가 뒈졌다는 게 중요해. 결국 패배자라는 거지. 야수마가의 주인이라는 작자가 말이야.”
“귀림마가주도 죽었는데?”
“허참.”
권마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이렇게 빠른 시간에 두 마가주가 당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놀라기만 했을 뿐 딱히 연민을 느끼지는 않았다.
전쟁에서 약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천패마가주도 위태위태하고.”
“상대가 제왕검이면 그럴 만 하지. 근데 의외이긴 하군. 팔을 하나 잃었음에도 건재하다니.”
“은마각주가 말하길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던데.”
“팔을 잃은 대신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가.”
백마와 궁마의 시선이 천패마가주를 밀어붙이는 남궁진에게로 향했다.
사실 그들은 남궁진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림무제와 무당권제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천패마가주와 대결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자양분으로 삼은 건가.”
“그런 경우는 본교에도 제법 많지요.”
도마의 시선이 백마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백마는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고만 있었다.
“지켜만 보고 있을 거야? 무림맹 애들, 기가 살아나는데?”
“그래 봤자 이제 겨우 비등해진 정도야. 정 근질거리면 나가던가. 주군께서도 알아서 하라고 하셨으니까.”
“흐음.”
쌍마(雙魔) 중 소마(小魔)가 몸뚱이에 비해 유달리 큰 머리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내려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친형을 쳐다봤다.
“내려가고 싶어?”
“형은 심심하지 않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는데? 아직은 정리가 좀 덜 된 거 같기도 하고.”
대마(大魔)가 가볍게 전장을 훑었다.
그 말대로 성벽 아래의 평원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수천 명이 뒤섞여 아비교환의 지옥도였다.
시산혈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곳곳에 시체의 산이 쌓여 있었다.
“대마의 말대로 우리가 날뛰기에는 판이 좀 더럽기는 하지. 아직 급에 맞는 녀석들도 나오지 않았고.”
“오늘은 이대로 마무리 될 것 같은데. 소모전 양상으로.”
도마와 궁마가 중얼거렸다.
구마라 불리는 자신들이 끼어들기에는 판이 아직 제대로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지켜만 볼 거야? 이대로? 야수마가주와 귀림마가주가 죽었는데? 두 마가의 전력도 괴멸됐는데?”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두 마가주를 잃었으니 적어도 그에 준하는 네 명 정도는 죽어야 얼추 저울이 맞지 않겠어?”
“흐흐흐!”
권마의 대답에 소마가 흡족한 듯 히죽 웃었다.
원했던 대답이 나오자 미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그 네 명 중 한 명은 저 녀석이면 적당할 것 같은데.”
“구절서생?”
“응.”
궁마가 몸에 메고 있던 활을 들었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신궁이라 불리는 그에게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제갈현은 전선을 지휘한다고 높은 가마에 탄 상태였기에 더더욱 조준하기가 편했다.
“우리의 등장을 알리는 시작으로 나쁘지 않지. 구절서생 정도면.”
“피해도 상관없고. 다시 노리면 되니까.”
“가면 너무나 좋고.”
소마가 쿵짝을 맞췄다.
작은 몸을 들썩이며 맞장구를 쳤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궁마가 활시위를 당겼다.
우우웅!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검은빛 화살이 생성되었다.
놀랍게도 강기로 이루어진 화살이 나타났던 것이다.
“머리통을 날려 버리라고!”
쉬이이익!
신난 소마의 외침과 함께 궁마가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미세한 파공성과 함께 한 줄기 묵빛 섬광이 제갈현에게로 쏘아졌다.
소마의 말대로 그의 머리를 노리고서 강기의 화살이 날아갔던 것이다.
스으윽.
활시위를 놓은 것과 동시에 궁마는 재차 활시위에 손을 댔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만약에 제갈현이 피했을 때를 대비해 두 번째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먼 거리에서 저격하는 공격이었다.
또한 화살을 날린 이가 천산의 신궁이라 불리는 자신이었다.
그런 만큼 궁마는 이번 공격을 제갈현이 피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차 활시위를 잡은 건 뜻밖의 결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왕이면 고통 없이 한 방에 가라고.’
빛살과 같이 날아가는 자신의 화살을 주시하며 궁마가 눈을 빛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한 방에 가는 게 좋아서였다.
“절대 혼자 싸우지 마라! 동료와 같이 싸우도록! 후방에 있는 무인들은 부상자부터 챙기고!”
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높은 가마에 탄 제갈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는 일어선 채로 말이다.
하지만 목이 터져라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전장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던 것이다.
“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전신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고개 숙여!”
제갈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인 것을 넘어 가마 위에 엎드렸다.
등 뒤에서 들려온 당민호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가득 담겨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꽈아아앙!
간발의 차이로 무언가가 제갈현을 스치고 지나가 당민호와 격돌했다.
그런데 스친 것뿐인데도 제갈현의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무언가가 일으킨 바람이 그의 두피를 가른 것이었다.
뚝뚝.
이마를 가르며 흘러내린 피가 가마를 적셨다.
그러나 제갈현은 떨어져 내리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뿐 지혈하지 않았다.
만약 당민호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자 머리가 새하얘졌던 것이다.
“아직 안 끝났어! 정신 차려!”
“흡!”
흐리멍덩하던 제갈현의 두 눈이 당민호의 일갈에 초점이 잡혔다.
동시에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소름에 제갈현이 황급히 가마를 박찼다.
콰아앙!
다행이도 이번에는 완벽하게 피해낸 제갈현이 창백해진 얼굴로 당민호의 옆에 섰다.
그러면서 가마를 들고 있던 가솔들을 빠르게 살폈다.
피한다고 정작 가솔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저, 저희는 괜찮습니다!”
“찰과상 정도입니다.”
큼직한 폭발과 달리 두 명의 가솔은 멀쩡했다.
자잘한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치명상은 피한 듯했다.
“도대체 누가···.”
가솔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제갈현이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는 당민호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던 것이다.
“아무래도 구마 중 궁마인 것 같군.”
“···역시 와 있었군요.”
“성벽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귀림마가주와 야수마가주가 죽으니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들었겠지. 아무리 천년마교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을 테니.”
“그래서 절 노렸군요.”
제갈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공격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면 모를까 궁마라는 패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무위가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만큼 단번에 보내기도 쉬웠을 테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총군사만큼 위협적인 인물도 없으니까.”
“위협적이라기보다는 껄끄러웠을 겁니다.”
“그게 그 말이지. 근데 두 발 다 실패했으니 표정이 볼만 할 거야.”
“근데 의외네요. 한 번 더 노릴 줄 알았는데.”
제갈현이 두 눈을 좁혔다.
시력에 진기를 집중해 성벽 위를 쳐다봤던 것이다.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한 번 더 쏜다고 달라질까. 오히려 다른 표적을 노리는 게 낫지. 물론 성공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콰아아앙!
미세한 파공음도 없이 갑자기 날아드는 공격에 당문경이 펄쩍 뛰었다.
제갈현에게 쏘아지는 것을 봤기에 미리 대비했던 것이다.
게다가 날아오는 방향이 똑같았기에 알고 있다면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 놈의 새끼가. 내 아들이 만만하다 이거냐?!”
근데 그게 당민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그가 노발대발 했다.
두 번째로 아들을 노렸다는 건 달리 말하면 제갈현 다음으로 쉬운 상대라는 걸 뜻해서였다.
퍼퍼퍼펑!
그런데 그때 전장의 한복판이 갈라졌다.
난전으로 치달아가던 전장이 단 한 명의 등장으로 침묵에 빠졌던 것이다.
“으으으···!”
“미, 미친!”
< 제 95장. 구마(九魔). -01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