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4장. 정마대전(正魔大戰). -02 >
나와 있는 이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천패마가주의 목소리가 평원을 갈랐다.
심후한 공력을 말해주듯 마치 코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침을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공력도 공력이지만 풍기는 기도 역시 만만치 않아서였다.
“웃기는군. 꽁지 빠지게 도망친 주제에 누구보고 겁쟁이라 말하는 건지.”
싸늘한 일갈에 천패마가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을 꺼내자 심기가 불편해졌던 것이다.
“···제왕검인가.”
“영광으로 알도록. 내가 대답해준 것을.”
“하!”
천패마가주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주도 아니고 무당권제도 아닌 제왕검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천패마가의 가솔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하나같이 살벌한 안광을 뿌리며 남궁진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 마인들의 눈빛에도 남궁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작 천패마가주가 나선 걸 보니 아직 교주는 오지 않았나보군.”
“그게 알고 싶었나보군. 하긴.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을 테니.”
“상관없다. 집 지키는 개를 두드려 패면 주인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만한 실력이 있나 모르겠군.”
“두들겨 맞고 울지나 말도록.”
두 사람의 언쟁에서 불꽃이 튀었다.
둘 다 한 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맞받아쳤던 것이다.
“말들이 참 많아.”
“그러니까. 그냥 죄다 죽이면 될 것을!”
그때 천년마교 측에서 일단의 무리가 갑자기 튀어 나왔다.
오대전투부대 중 유독 통제가 안 되는 혼천천귀대와 폭혈광마대(暴血狂魔隊)가 느닷없이 무림맹을 향해 돌진했던 것이다.
“저, 저!”
그 모습에 귀림마가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전대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 마음대로 날뛰어버리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두 부대의 움직임을 반기는 이도 있었다.
“뭐 어때. 어차피 다 때려죽일 건데.”
“맞습니다, 가주님!”
“가자!”
호기로 따지자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야수마가의 마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특히 야수마가주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청성산에서 벽우진에게 당한 걸 갚겠다는 듯이 그는 살광을 번뜩이며 무림맹 쪽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봐도 벽우진을 찾는 듯한 모양새였다.
“공격하라!”
“마교 종자들을 쓸어 버려라!”
천년마교의 공세에 무림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청룡단과 백호단이 있었다.
“우리도 가지.”
“그럽시다.”
뒤이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나섰다.
오대전투부대는 오단에게 맡기고 육대마가를 향해 진격했다.
콰콰콰쾅!
이윽고 굉음과 비명이 평원을 가득 채웠다.
순수한 힘 대 힘의 격돌에 사방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 의외로 눈 먼 칼이나 공격에 죽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생전 처음 겪는 대규모 전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으음!”
그 모습을 가마 위에서 지켜보던 제갈현이 침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기에 그는 매일 같이 신신당부를 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싸움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 죽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리를 지켜! 혼자 싸우지 말고 협공해!”
“합격진을 펼쳐! 무리하지 마!”
“도망치지 말라고! 네가 벗어나면 동료가 당한다고!”
곳곳에서 고성과 괴성이 난무했다.
부단주들과 대대장, 조장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워낙에 시끄러웠기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키키킥!”
“축제다!”
“모조리 죽이는 거다!”
반면에 이 혼전과 난전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전선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이 혼천천귀대와 폭혈광마대는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오직 죽이는 것에만 관심 있다는 듯이 동료와의 연계나 그런 것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너무나 위협적이라는 점이었다.
“크헉!”
“끄륵!”
수비는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이 막무가내로 날뛰는 그들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난전을 교활하게 이용했기에 좀처럼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터엉!
“여기까지다.”
“부상자부터 속히 챙기도록!”
비릿한 조소와 함께 등 뒤에서 중소방파 제자의 목을 노리던 폭혈광마대의 마인이 강력한 반탄력에 뒤로 튕겨졌다.
뒷목에 손이 닿기 직전 무언가가 그의 장심을 후려쳤던 것이다.
“호오.”
“철저하게 자기보다 약자만 노리다니. 마인이라기보다는 승냥이 같은데.”
“무슨 소리. 우연찮게 나보다 약한 녀석들이 모여 있던 것뿐이다. 뭐, 어디를 가든 나보다 약한 녀석들만 있겠지만. 크큭!”
“일부러 자기보다 하수들이 있는 곳으로 온 것 같은데.”
남궁혁이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만약 강자와의 대결을 원했다면 결코 이런 곳에는 오지 않을 게 분명해서였다.
“말했을 텐데. 어디를 가든 나보다 강한 녀석은 없다고!”
말과 동시에 마인이 달려들었다.
폭혈광마대의 특징인지 상의를 탈의한 맨몸을 들이밀며 거칠게 주먹을 내질렀다.
얼굴을 날려버리겠다는 기세로 정권을 뿌렸던 것이다.
그런데 거친 말투와 몸놀림과 달리 마인이 뿌리는 기세는 날카로웠다.
쌔애액!
빠르고 강맹한 일격이 정확히 남궁혁의 안면을 노리고서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공격을 보면서도 남궁혁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인의 권역 안으로 몸을 날렸다.
대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청룡단의 부단주로서 일개 폭혈광마대원을 앞에 두고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콰앙!
순식간에 일어난 권강과 검강이 격돌했다.
그리고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
남궁혁의 검극이 폭혈광마대원의 주먹을 꿰뚫었던 것이다.
“끄흐흡!”
권강이 서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주먹을 꿰뚫은 일검에 폭혈광마대원의 두 눈이 퉁방울 만해졌다.
너무나 쉽게 뚫려버린 자신의 주먹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남궁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대로 검을 휘둘러 목을 베었다.
“강하긴 개뿔.”
허세 부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남궁혁이 코웃음을 쳤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차서였다.
진짜 강한 사람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 놈!”
“감히 우리 동료를 죽이다니!”
“웃기는군. 중원에 침입한 건 네놈들이다.”
한 명을 죽이기 무섭게 두 명의 폭혈광마대원들이 달려들었다.
동료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그가 날뛰는 게 아니꼬운 듯해 보였다.
그러나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콰아아앙!
창궁무애검을 극성으로 펼치며 남궁혁이 단칼에 두 마인의 몸을 베었다.
사선으로 휘둘러 둘 다 양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는 위험해 보이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몸을 날렸다.
꽈아아앙!
“제왕검이란 무명이 허명은 아닌 모양이구나!”
“흥!”
“외팔이가 되어서 기대에 못 미칠 거라 생각했는데, 심심하지는 않겠어.”
“죽기 직전이 되어서도 그렇게 나불거릴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전장 한복판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천년마교의 마인들도, 무림맹의 무인들도 감히 다가가지 않았다.
두 절대고수의 대결에 자칫 잘못해서 휘말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해서였다.
“일단 나머지 오른팔부터 잘라주마!”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콰콰콰쾅!
광오한 천패마가주의 말에 남궁진이 이를 드러내며 맞받아쳤다.
그런데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무시무시했다.
외팔이 무인이라고 낮잡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운을 뿜어냈던 것이다.
‘과연 남궁세가의 가주라는 건가.’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거대한 존재감에 천패마가주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상대로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제나 권제만 생각했는데, 제왕검도 나쁘지는 않군.”
“내가 할 소리를 네놈이 하는구나. 나는 적어도 구마가 나올 줄 알았건만.”
“도발이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말해주지.”
천패마가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안 그래도 그를 비롯한 육대마가주와 구마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아서였다.
쑤아아앙!
이윽고 천패마가주의 검에서 무지막지한 검강이 솟구쳤다.
천패(天覇)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패기 넘치는 일검이 남궁진의 정수리를 노리고서 떨어져 내렸다.
“흥!”
그러나 남궁진도 만만치 않았다.
남궁세가의 제왕검형(帝王劍形) 역시 천하제일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검공이었다.
쿠콰콰쾅!
그 사실을 증명하듯 둘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힘 대 힘의 대결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상황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전황을 살피며 서진후가 입을 열었다.
중군(中軍)을 맡고 있는 제갈준이 특유의 기문진법으로 어찌어찌 중심을 잡고서 천년마교의 공세를 막고는 있었지만 누가 봐도 위태위태했다.
게다가 우군과 좌군의 상황도 썩 좋지 못했기에 더더욱 아슬아슬해 보였다.
숫자는 엇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수준이 비등한 것은 아니었기에 오단은 점차 밀리고 있었고, 반대쪽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쪽의 상황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균형은 맞추고 있잖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도 합니다. 맹주와 권제를 비롯한 장문인들이 나서면 상황이 조금 달라질 것 같습니다만.”
“그럴 수는 없지. 핵심 전력이 나서지 않은 건 천년마교 역시 마찬가지야. 그래서 나도 대기하고 있잖아.”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습니다.”
군소방파의 무인들을 이끌고 제갈세가가 분전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수준 차이가 극심하다보니 피해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누가 봐도 인해전술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치르고 있는 건 전쟁이야. 피해가 없을 수는 없어. 그리고 다들 각오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이고. 그 결의를 무시하면 안 돼. 누가 불러서 이곳에 온 게 아냐. 모두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여기에 온 거라고.”
“음!”
“전공에 눈이 멀어서 온 이들도 있겠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온 이들도 있어. 무공이 약하다고 해서 그들의 그 각오도 약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오히려 절실함으로 따지면 그들이 더 높아.”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에 온 이들은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막지 않는다면 더 큰 피해가 온다는 걸 알기에 다들 검을 뽑고 주먹을 든 것이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짧은 게 아니야. 나 역시 너와 같은 마음이니까. 다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뿐이지. 총군사 역시 그걸 알기에 주요 전력을 제외시키고서 저렇게 고군분투하는 것이고.”
중군을 이끄는 것은 제갈준이었지만 무림맹의 전선을 지휘하는 건 총군사인 제갈현이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않더라도 그 역시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천년마교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벽우진-!”
팔짱을 끼고서 냉정한 눈으로 전장을 주시하고 있을 때 멀리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그를 애타게 불렀던 것이다.
콰아앙! 쾅!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사람 몸뚱이가 솟구쳤다.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무인들이 튕겨져 날아갔던 것이다.
동시에 수백 명의 거인들이 나타났다.
“야수마가입니다.”
“지난번의 복수를 하러 오는 모양이에요.”
“진짜 크기는 크다. 생김새도 짐승이네.”
서진후와 현주혜, 연진청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갑자기 거구가 나타나니 자연스레 시선이 갔던 것이다.
특히 연진청이 가장 크게 놀랐다.
두 사람이야 청성산에서 야수마가의 마인들을 봤지만 그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제 94장. 정마대전(正魔大戰).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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