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04화 (304/325)

< 제 94장. 정마대전(正魔大戰). -01 >

진심으로 아까웠던 모양인지 제갈명의 한탄이 이어졌다.

하지만 당사자가 싫다는데 다른 사람이 강조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강요할 수도 없는 문제니.”

“보타문주도 정말 아쉽습니다. 주작단주로 제격이었는데.”

여인들로 이루어진 주작단인 만큼 현주혜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는 없었다.

실력은 물론이고 나이와 배분 역시 적당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군사부의 제안을 거절했다.

“최대한 있는 사람으로 활용해 봐야지.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니까.”

“알긴 아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워서 하는 말입니다.”

“훈련 상황은?”

“꾸준히 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 많이 미흡합니다. 손발이 착착 맞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동생의 대답에 제갈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시간은 없는데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일이 많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똑똑똑.

“총군사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말이더냐?”

문 밖에서 들려오는 하인의 음성에 제갈현은 물론이고 제갈명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밤중에 누가 찾아왔나 싶어서였다.

“예.”

“누구라고 하더냐?”

“냉하성 대협이십니다.”

“모시거라.”

제갈현의 동공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에 크게 놀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건 제갈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입니다, 제갈가주.”

“오랜만이죠?”

“위 소저?”

냉하성을 따라 들어오는 중년미부를 본 제갈현의 두 눈이 퉁방울 만해졌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나도 있소이다.”

“유 대협까지?”

소소선자(笑笑仙子) 위령령에 이어 낭왕 유장건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제갈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셋의 조합도 조합이지만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제갈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별로 우리를 반기지 않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요.”

“괜히 온 것 같군.”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일단 앉으시죠.”

제갈현이 다급히 책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제갈명은 차를 준비했다.

세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많이 바쁜 모양입니다. 안색이 좋지 않아요.”

“아무래도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요. 이제 막 설립되기도 했고요.”

신색을 가다듬은 제갈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이 제갈명은 세 사람에게 차례대로 차를 따랐다.

“생각보다 잡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이니 목소리가 격해지는 경우가 없을 리 없지요. 그래도 다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 전에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 아닌가?”

“아, 그걸 깜빡 잊었군요. 하하하.”

가장 연배가 높은 유장건의 말에 냉하성이 머쓱하게 웃었다.

나름 신경 쓴다고 한 말인데 제갈현의 입장에서는 배려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저희가 너무 늦게 찾아왔죠? 죄송해요. 원래는 내일 아침에 뵈려고 했는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직 업무를 보고 계시다고 들어서요.”

“저는 괜찮습니다. 세 분 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런 것 치고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눈 밑이 심하게 까매요.”

위령령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빈말이 아니라 제갈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윤기가 하나 없이 푸석푸석했다.

“수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업무 때문입니다.”

“그게 그거 같은데요?”

“잠은 충분히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총군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저희도 한 손 보태려고 왔어요.”

“감사합니다!”

제갈현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음성(音星)이라 불리는 소소선자와 낭왕, 거기에 괴성(怪星) 만병자의 합류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천년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수 층이 얇은 무림맹에게는 크나큰 호재였기에 제갈현은 확 밝아진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자면 의성(醫星)도 오고 있습니다.”

“만수신의(萬手神醫)께서 말입니까?”

“예. 언제 도착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물론 무림맹에 합류하는 건지 성도에 볼 일이 있어 오시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성도에 오신다면 말은 나눠볼 수 있겠지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냉하성을 보며 제갈현은 눈을 빛냈다.

의원으로서의 역량을 따지자면 현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이가 만수신의였다.

게다가 무인으로서도 상당한 실력자이기에 무림맹으로서는 반드시 포섭해야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다만 연구를 위해 전 중원은 물론이고 세외도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인물이어서 행적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운이 닿은 것인지 성도로 온다고 하자 제갈현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저 역시 의성께서 계시면 든든하니까요. 그렇다고 무림맹의 의약당(醫藥堂)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허허. 오해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사도 드렸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너무 시간을 빼앗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얼른 주무세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냉하성에 이어 위령령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운 마음에, 아직 안 자고 있다는 말에 찾아왔는데 안색을 보아하니 시간을 더 이상 빼앗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장 자야 할 것 같은 제갈현의 모습에 셋은 동시에 일어섰다.

“보기에만 그렇지 괜찮습니다만.”

“저희가 보기에는 안 괜찮아 보여요.”

“동생인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제갈명도 슬그머니 합세했다.

바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건강이 먼저였다.

지금 이렇게 심력을 쏟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쓰러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럼 앞으로 머물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형님. 어차피 나가는 길이니.”

“숙소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따로 머물 곳이 있거든요.”

“예?”

제갈현과 제갈명이 동시에 반문했다.

이제 막 도착한 그들이 머물 숙소가 있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동시에 제갈현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과 사천당가 사이에 인연이 있나 곱씹었던 것이다.

“곤륜파가 머무는 별채로 갈 생각입니다. 제가 벽 장문인과 연이 있기도 하고 두 분 다 곤륜파에 호기심을 가지고 계셔서요.”

“아, 그렇습니까.”

냉하성의 말에 제갈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하무림 비무대회 당시 벽우진과 냉하성이 만났던 걸 알고 있었기에 납득한 것이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가볼게요.”

“푹 쉬시구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사라지는 세 사람의 모습에 제갈현은 실소를 흘리고는 제갈명을 쳐다봤다.

일을 다 봤다는 듯이 제갈명 역시 일어났던 것이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얼른 주무십시오, 형님.”

“그러마.”

“또 보고서 보지 마시구요.”

“알겠다.”

걱정이 가득 담긴 제갈명의 말에 제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웅했다.

그러나 말과 달리 그의 방에 켜진 등불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단 하루 만에 금천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천년마교의 거점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평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무인들의 전쟁이었기에 일반 양민들에게 가는 피해는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금천현에는 중원의 마인들도 모여 들었기에 사건사고는 많아도 일반 양민들이 다치는 경우는 없었다.

휘이이잉.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왠지 모르게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저 짝들도 알고 있겠지요?”

“모를 리가 없지. 대놓고 진군했는데.”

“은마각 놈들은 보지 못했는데 말이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이각이랑 개방과 치고 박고 했겠지.”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을 내려다보며 벽우진이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냉하성이 휘파람을 불었다.

“첩보전도 나름 흥미진진하다고 하던데.”

“그럼 너도 한 따까리 하던가. 괴성이라면 천이각에서도 두 팔 벌려 환영할 것 같은데.”

“에이. 제가 천이각에 들어갈 급은 아니죠.”

“저는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위령령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력이 부족한 천이각에 냉하성이 합류한다면 무림맹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역마살이 있는 냉하성이니만큼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했고.

“왜 그래, 령령아.”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근데 우리만 농담하니까 좀 그러네. 다들 분위기가 살벌한데.”

“아닌 곳도 있어요.”

위령령이 눈짓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후기지수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청룡단과 백호단이었는데 두 부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청룡단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명문 출신들로 구성되었다면 백호단은 군소방파의 후기지수들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독 경쟁심이 심했는데 지금은 그게 극에 달한 듯한 모습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안 좋은데.”

“얼어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저것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죠. 전쟁은 비무나 대련하고는 완전히 다르니까요. 혼자만 잘한다고 이기는 게 아닌데.”

“표정을 보아하니 말해준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야망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무명을 날리겠다고.”

위령령이 미간을 좁혔다.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맹주도 있고 총군사도 있는데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총군사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어쩌면 이미 말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당해보고 깨닫는 거지.”

“살아남는다면 말이죠.”

후회도 살아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죽은 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냉하성이 무거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죽지 않는 전쟁은 없어.”

“이왕이면 죽어야 할 놈들만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야 할 놈들은 살고.”

“그게 어디 뜻대로 되나.”

쿠르르릉!

유장건과 냉하성이 말을 주고받을 때 대문이 열렸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열렸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마인들이 밀물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처처척!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를 시작으로 오대무력부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숫자만 물경 삼천 명이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동안 모여 들었던 중원 출신의 마인들이 각 문파별로 오대무력부대의 뒤를 받쳤다.

“어마어마하네요.”

평원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모습에 위령령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벽우진은 팔짱을 끼고서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숫자만 많았지 그의 눈에는 딱히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아직인가.”

“육대마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보필하듯 서 있던 서진후가 눈을 빛냈다.

뒤이어 육대마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천패마가를 끝으로 육대마가가 전부 다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더 이상 나오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흠.”

그 모습에 벽우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했던 이들이 보이지 않자 실망한 것이었다.

“아직 모릅니다, 사형.”

“맞아요. 아직 실망하긴 일러요.”

서진후와 현주혜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보면 이제 막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만큼 실망하기는 일렀다.

“두들기다 보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저희는 기다리면 됩니다.”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들어가면 되니까.”

“그렇습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날인만큼 서진후의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벽우진만큼이나 오늘을 기다리던 이가 서진후였다.

그런 만큼 서진후는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교주나 구마 정도쯤 되면 엉덩이가 무거워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저벅저벅.

벽우진과 서진후가 대문 너머의 성을 쳐다보고 있을 때 천패마가주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무림맹 쪽을 천천히 훑었다.

“놀랍군. 겁쟁이들이 먼저 찾아올 줄이야.”

< 제 94장. 정마대전(正魔大戰).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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