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03화 (303/325)

< 제 93장. 각자의 전쟁. -03 >

별채 1층에 있는 식당에 들어선 벽우진이 실내를 슬쩍 훑었다.

그러자 역시나 평소와 달리 두 개의 자리가 비워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밤을 샌 모양이군.’

연진청과 현주혜의 자리가 비워져 있는 걸 보며 벽우진은 옅게 웃었다.

그의 눈에는 지금쯤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던 것이다.

“오셨습니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한편 벽우진의 등장에 서진후를 위시로 제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건 석정후와 백륜, 모용휘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좋은 아침. 근데 자네는 왜 다시 돌아왔어? 오단의 단주까지는 힘들더라도 부단주직은 충분히 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두와 한차례씩 눈을 마주한 벽우진의 시선이 모용휘에게 닿았다.

명문세가인 모용세가의 후계자인 모용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품 역시 나무랄 데 없었다.

전형적인 명문세가의 후계자다운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런 그가 다시 돌아온 모습에 벽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청룡단에서 제안은 받았습니다. 물론 부단주 자리를 주겠다는 건 아니고 지원할 생각이 있겠느냐고요.”

“근데 왜 안 갔어?”

비록 세력은 빈약하지만 모용휘는 천하무림 비무대회 용봉전 우승자였다.

실력으로 따지자면 최소 한 개 대대의 대장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해서요. 다른 이들을 잘 이끌 자신도 없고요.”

“그래도 가문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텐데.”

“명성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실력이지 않습니까. 실력을 쌓으면 명성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증명하신 분도 계시고요.”

모용휘가 은근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선망의 빛이 가득했다.

다 무너진, 폐허나 다름없던 곤륜파를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 올린 게 바로 벽우진이었다.

말 그대로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린 것이기에 모용휘는 내심 벽우진을 존경하며 그를 본보기로 삼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벽우진처럼 모용세가를 재건하리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봐도 정후하고 어울릴 인물은 아닌데 말이지.”

“하하하.”

“너무하세요.”

어색하게 웃는 모용휘와 달리 얌전히 앉아 있던 석정후는 울상을 지었다.

기를 세워주기는커녕 오히려 팍팍 찍어 누르는 말에 서운했던 것이다.

“섭섭해 할 시간에 더욱 노력해. 부족하다면 어울릴 만한 인물이 되도록 노력해야지.”

“꼭 그리 될게요!”

“그래. 패기는 있어서 좋네.”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하는 석정후의 모습에 벽우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서 있던 모두가 제자리에 착석했다.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벽우진이 앉기 무섭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준비해둔 음식들을 하나둘 내어왔던 것이다.

“그럼 모용 공자는 우리와 함께 움직일 생각인가?”

“예. 장문인께서 허락해 주시면 같이 움직이고 싶습니다. 옆에서 많이 배우고 싶어서요. 절대 짐은 되지 않겠습니다.”

“짐이 될 수준은 아니지, 모용 공자가. 아니. 가주라고 불러야 하나?”

“아직은 임시이니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말에 모용휘가 기꺼운 듯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벽우진이 이리 말해주자 더욱 기뻤던 것이다.

“근데 누님과 현 문주는 무슨 일 있습니까?”

“응.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 지금까지 안 오는 걸 보면 아침은 거를 모양인 거 같아.”

“중요한 일이라.”

“아침은 우리끼리 먹자고.”

서진후가 눈을 빛냈다.

벽우진의 말에서 무언가를 파악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진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너희들에게는 따로 제안이 안 왔어?”

뜨끈한 계란탕을 그릇에 덜며 벽우진이 물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서예지를 시작으로 아이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총군사께서 말은 하셨는데 거절했어요.”

“저희도요.”

“왜?”

“굳이 오단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손발이 맞지 않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냥 저희들끼리 움직이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총군사께서는 많이 아쉬워하셨지만요.”

서예지와 양일우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벽우진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딱히 명성이나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당연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기에 누구도 제갈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법님들도 있고, 보타문도 있으니까요.”

“저도 있습니다.”

모용휘가 슬쩍 손을 들며 자신도 있음을 알렸다.

전력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 몫을 할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선택은 자유니까.”

“정치질 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싫었고요. 여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더라고요.”

“욕심들이 대단하기는 하죠. 자신의 능력 이상을 바라는 이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질린 표정을 짓는 서예지를 거들 듯이 모용휘가 말했다.

면접까지는 아니더라도 청룡단에 한 번 가봤었는데 그는 진심으로 학을 뗐다.

전쟁이 눈앞에 닥쳤음에도 훈련은커녕 밥그릇 싸움을 하는 모습에 기차 찼던 것이다.

동시의 일말의 미련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것 때문에 총군사가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합니다.”

“머리 아픈 자리이지. 피곤한 자리이기도 하고. 원래 인선이 제일 어려운 일이야. 우리만 해도 힘든데 무림맹 정도의 규모면,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벽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서진후 역시 웃었다.

“사실은 그게 제일 크셨죠?”

“알면서 뭘 물어?”

“그나저나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천년마교 쪽 준비가 먼저 끝나겠어요.”

“자잘하게 국지전은 계속 벌어지는 것 같던데.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아무에게나 요직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오단의 단주만 하더라도 휘하에 500명을 두는데 당연히 심사숙고 해야지. 자칫 잘못하면 단주의 오판으로 500명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입맛이 없는지 계란탕 말고는 다른 음식에 손도 대지 않으며 벽우진이 말했다.

그로서는 제갈현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였다.

“뭐,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구마이지만요.”

“마교주도. 결국 지시는 그 놈이 내렸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한 번 찔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진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전면전이 아닌 기습이라면, 치고 빠지는 전술이라면 지금 곤륜파의 전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벽우진을 위시로 호법들과 자신, 거기에 현주혜라면 충분히 빠르고 강력한 일격을 먹이기에 충분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천년마교에 말이다.

“그러다가 흥분해서 달려들면?”

“그럼 그것 나름대로 무림맹에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적에게 익숙한 전장이 아니니까요.”

“흠.”

수저를 내려놓으며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아니 마음이 동하는 계획이었다.

소수이니 만큼 치고 빠지는데 훨씬 유리할 테고 말이다.

게다가 서진후를 제외하면 다들 한 가락씩 하는 고수들이었다.

“길을 안내하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짜식.”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성은 저에게도 익숙한 곳이기도 하고요. 청해성 다음으로 자주 다녔던 성이 바로 사천성입니다.”

역시 눈치 빠른 서진후가 먼저 선수를 쳤다.

미세하게 바뀐 눈빛을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일단 좀 더 고민을 해보자. 허탕을 치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확실하게 끝내는 게 좋으니까. 물론 오래 고민할 생각은 없어.”

“사형 성격상 오래 매달릴 일은 없지요. 오히려 저는 사형의 인내심에 많이 놀라고 있습니다.”

“화풀이는 좀 했으니까.”

“저는 하나도 못 했습니다만?”

“곧 기회가 생길 거야. 지금은 폭풍 전의 고요나 마찬가지니까.”

벽우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천년마교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무림맹이 계속해서 보급로를 끊고 있으니 머지않아 반응이 올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그 놈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복수심을 슬며시 드러내며 서진후가 말했다.

눈앞에 있다면 뼈째 씹어 먹을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

야심한 밤에도 제갈현의 집무실은 대낮처럼 환했다.

하지만 밝은 실내와 달리 제갈현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벌써 며칠 째 제대로 자지 못한 듯 그의 눈 밑은 검게 변해 있었다.

“형님. 소제입니다.”

“들어오너라.”

답답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책상만 두드리던 제갈현이 문 너머에서 들리는 제갈명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하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목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잠은 주무시고 업무를 보시는 겁니까?”

“넉넉하지는 않아도 충분할 정도는 잔다.”

“침실에 간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잠이야 집무실에서 자도 되니까. 노숙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허허허!”

“형님도 이제는 건강에 신경 쓰셔야 하는 나이입니다.”

제갈명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더 이상 그나 제갈현은 청춘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관리하지 않으면 노후에 고생할 게 뻔했다.

무공을 익힌다고 하지만 노년에 쌩쌩한 건 고수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일이 산재해 있는데.”

“다른 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있고.”

“이미 다들 충분히 제 몫 이상을 해주고 있어. 여기서 더 일감을 몰아주었다간 죄다 퍼질 거다.”

“그 전에 형님께서 쓰러지실 것 같습니다.”

“난 괜찮다.”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과도한 업무량에 머리카락이 하루가 다르게 빠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 했다.

“지금 상황에서 형님이 쓰러지면 큰일 납니다. 그러니 반드시 보중하셔야 합니다.”

“걱정 말래도. 쓰러지는 일은 없다. 그보다 오단은 다 정리 되었느냐?”

“일단 조직도는 완성했습니다. 8할은 확정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8할이라.”

제갈현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지지부진한 것 같아서였다.

“거절하는 이들이 워낙에 많아서요. 오히려 능력 없는 이들이 과한 자리를 요구하더라고요. 제 주제도 모르고.”

시달린 게 많은 모양인지 제갈명이 투덜거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제갈현은 그 말을 묵묵히 들으며 조직도를 살폈다.

“그래도 얼추 틀은 잡혔구나. 고생했다.”

“뭔 놈들이 그리 욕심이 많은지.”

“어쩔 수 없지. 그게 사람이기도 하니까.”

“실력 있고 협의지심 있는 이들이 너무 없습니다.”

제갈명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정작 맡아주기를 바라는 이들은 고사하는 판에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이 설치자 그렇게 가슴이 답답할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막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구룡도 없구나.”

“아무래도 각자 가문과 문파의 후계자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실력은 되지만 신분 상 힘들다고 봐야죠. 그래서 곤륜파가 나서주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당사자들이 싫다는데.”

“모용휘도 거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심 기대했던 인물이 천하무림 비무대회 용봉전 우승자 모용휘였다.

모용세가를 재건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그는 누구보다 명성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거의 승낙하기도 했고.

그런데 막판에 말을 바꿨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정치질에 학을 뗀 것 같았습니다. 근데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닌데 말이죠.”

“아직은 젊으니까. 게다가 곤륜파와 함께 있으니 더더욱 보기 싫겠지.”

“가주라는 자리는 보기 싫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감당해야 하는 자리이지 않습니까. 더욱이 지금 모용휘는 많은 걸 경험해야 하는 시기이고요.”

< 제 93장. 각자의 전쟁.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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