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3장. 각자의 전쟁. -02 >
“네.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요.”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벽우진이 차를 준비했다.
이제는 제법 머물렀다고 익숙하게 차호와 찻잔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렇긴 한데 누구를 이끌면서 싸운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서요. 그리고 보타문의 제자들도 신경 써야 하고요.”
“어중간하게 신경이 분산될 바에는 하나에 집중하는 게 맞지. 근데 다른 이유 때문에 포기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런 것에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도 않고요.”
“하긴. 내가 실언을 했네. 지워버려.”
어깨를 으쓱한 벽우진이 삼매진화로 차를 우려내며 연진청에게 먼저 차를 따라주었다.
그런데 그 모습에 연진청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왜 불렀어? 그냥 둘이 오붓하게 차 한 잔 하지.”
“오붓하게는 뭐가 오붓하게예요.”
“나이 찬 남녀가 만났으니 당연히 오붓한 시간 아닌가?”
“누님이 적적할 것 같아서요. 호법님들은 제자들 가르치느라 정신없잖아요.”
“대신 나에게는 우리 애들이 있는데?”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연진청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무공은 잃었지만 그렇다고 지식과 경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보타문도들을 가르치며 나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그래요?”
“응.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자리를 피해줄까?”
“재미있어요?”
“완전. 아주 신나. 고구마를 먹은 듯한 답답함도 있지만 나름 놀리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벽우진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모습조차도 연진청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서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이를 많이 먹으면 도리어 애가 된다더니.”
“왜? 젊게 살면 좋지. 꼬부랑 할머니가 됐다고 빌빌 대기만 하면 무슨 낙으로 살아?”
“제 말은 장난을 그만 치라는 거죠.”
“에이. 이 정도 가지고”
“상대방이 불편하면 그건 더 이상 농담이 아닙니다만.”
벽우진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나 연진청은 그 모습에도 생글거리기만 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하면 되잖아. 근데 이거 알아? 주혜는 늘 잠자코 있다는 거.”
“사부님!”
조용히 두 사람의 티격태격 하는 걸 듣고 있던 현주혜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자신을 걸고 넘어가자 깜짝 놀란 것이었다.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저는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있었던 것뿐이에요.”
현주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더니 벽우진 못지않게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똑같다니까.”
“누님.”
“사부님!”
“어후. 무서워서 내가 뭔 말을 못하겠다.”
연진청이 짐짓 무섭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패선과 검후가 연합공격을 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가장 연약하기도 했고 말이다.
“정말 필요한 말만 하시면 이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너무 재미가 없잖아. 가뜩이나 보타암은 사찰처럼 조용한데.”
“사찰 아니에요?”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색깔이 많이 희미해졌어. 점창파나 종남파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돼. 속가(俗家)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보타문의 무공이 불가(佛家)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한때 불문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성격이 많이 변해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제자들이 바뀌는 것만큼 문파의 정체성 역시 자연스럽게 변해갔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맞춰갔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잊은 건 아니야. 역사와 전통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어. 다만 아직은 정통 후계자가 없어서 그렇지.”
“이번 정마대전이 끝나면 저도 슬슬 제자를 찾아보려고요.”
“슬슬이 아니라 빨리 찾아야지.”
연진청이 웃으며 옆에 앉은 현주혜의 등을 쓰다듬었다.
워낙에 아이일 때부터 키워서 그런지 마흔이 넘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였다.
실제로 겉모습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기도 했고.
“맥을 잊는 건 중요하죠. 그렇다고 아무나 받을 수는 없지만.”
“곤륜파처럼 깐깐하게 받지는 않을 거야.”
“현재 상황도 감안해야죠. 가뜩이나 문제가 많은 상태인데.”
“그건 인정.”
연진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이야 벽우진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괜찮아 보이지만 실제로 아직 곤륜파는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차근차근 재건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그래도 씨앗을 제대로 심었으니 큰 걱정은 덜었습니다.”
“심었다고 끝난 게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지? 물도 줘야 하고 거름도 줘야 하고. 날씨도 확인해야 하고. 할 일은 끝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 하릴없이 지내는 것 같은데요.”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가 구마에 빠져 있다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소식은 매일 같이 확인하고 있었다.
굳이 그가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말해주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릴없이 지내다니! 내가 얼마나 바쁘게 생활하고 있는데. 무공수련을 안 하는 대신에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챙겨주고 있다고. 동생의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말인데, 누님.”
“갑자기 왜 그렇게 무게를 잡아? 나 무섭게?”
한순간에 달라진 분위기에 연진청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현주혜 역시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다시 무인이 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인?”
“예.”
벽우진의 대답에 연진청의 동공이 흔들렸다.
찰나였지만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옅게 웃으며 감정을 수습했다.
“에이. 무슨 말이야. 동생도 잘 알잖아. 지금 내 몸이 어떤지. 소림의 대환단 정도 되는 영약이면 모를까 웬만한 걸로는 못 고쳐. 그런 영약이 흔하지 않다는 거 동생도 잘 알잖아? 그리고 그런 영약이 있으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사용해야지. 다 늙은 내가 먹어서 뭐해?”
“전대의 여중제일인이 돌아오는 거죠.”
“말은 좋네.”
연진청이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과거 검후라 불리며 숱한 무인들을 쓰러뜨렸던 영광의 시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 중원에는 고수가 필요합니다. 그저 그런 고수가 아닌 절대고수가요.”
탁.
벽우진이 일어나 서랍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연진청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목함과 벽우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열어보시죠.”
“으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장난기가 싹 가신 연진청이 조심스럽게 목함을 들어 열었다.
이윽고 그녀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목함을 열자마자 영약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였다.
“본 파의 비전으로 만든 영단인 상청단입니다. 자부하건데 소림사의 대환단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청단과 저라면 누님의 몸을 원상복구 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런 무가지보(無價之寶)를 나에게 준다고? 안 돼. 난 받을 수 없어.”
연진청이 황급히 목함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손가래를 치며 다시 벽우진에게로 목함을 밀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닙니다. 누님께서 말했다시피 상청단은 무가지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영단이거든요.”
“···혹시 날?”
“이 상황에서도 농담입니까.”
벽우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진청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통은 눈이 돌아갈 만한 상황에 연진청은 의외로 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그럼 원하는 게 뭔데?”
“동맹입니다. 다행히 보타문과는 거리가 멀어서 영역이 겹치지도 않습니까.”
“멀다고 말하기는 지나치게 먼데? 청해성과 절강성은 대륙의 끝과 끝이잖아.”
“믿을 수 있는 고수가 필요해서요.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죠.”
“음!”
연진청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째서 벽우진이 상청단을 꺼냈는지 조금은 납득이 됐던 것이다.
“그리고 전 누님의 실력을 아니까요.”
“날 너무 과대평가해주는 거 아냐?”
“아니라는 거 누님도 알잖아요. 몸은 망가졌어도 명상수련은 계속 하고 있는 거 알아요.”
“그래봤자 상상 속의 수련일 뿐이지.”
연진청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연진청은 몸이 망가졌음에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육체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상상 속에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님이라면 금방 적응할 겁니다.”
“만약에 실패하면? 그럼 이 영단은 그냥 날아가는 거야. 어쩌면 너의 진원진기 역시 소실될 지도 모르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벽우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중원에서 그보다 환골탈태를 많이 경험해본 이는 없을 게 분명해서였다.
더구나 이번에 사용하는 영단은 비천단이 아니라 그보다 윗줄의 상청단이었다.
“환골탈태를 한다고 해도 완치될 거라는 보장도 없어. 워낙에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미안하니까 그러지.”
연진청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도 냉큼 상청단을 받고 싶었다.
다시 무인으로 되돌아가는 상상을 지금까지 매일 했었으니까.
불가능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그런 상상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작 기회가 오자 연진청은 망설여졌다.
자신이야 실패하면 그만이지만 벽우진은 아니었다.
“공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잖아, 이건.”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누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제가 판단한 거니까. 그리고 실패한다고 해도 누님한테 손해는 아니잖아요?”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불확실성 때문인지 연진청의 동공이 흔들렸다.
앞으로 있을 정마대전을 생각하면 자신보다는 좀 더 안전한 쪽을 선택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건 그쪽이기는 하죠. 하지만 한 번에 절대고수급을 만들 수는 없어요. 이미 고수인 사람에게 사용해봤자 효율이 좋지 못하고요. 경지가 높아질수록 공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누님도 알잖아요. 공력은 경지가 높아지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거지 공력만 많다고 해서 강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누님은 모험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아니에요. 그러니 저를 믿어보세요.”
“동맹 정도로 괜찮아? 동생이 너무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
확고한 벽우진의 모습에 연진청도 마음이 기울었는지 슬쩍 운을 띄웠다.
단순히 동맹 관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돈으로 주자니 보타문은 재정적으로 풍족한 문파가 아니었다.
“비장의 한 수 겸 안전장치를 위해서이니까 저로서도 손해는 아닙니다.”
“거절할 수 없게 만드네.”
“대신 입 싹 닦으면 알죠?”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손을 그었다.
장난스럽게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각서라도 쓸까? 난 얼마든지 쓸 수 있어.”
“저도 쓸게요. 태상문주보다는 현 문주가 작성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조용히 있던 현주혜도 적극적으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현주혜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오자 현주혜는 달려들 것처럼 눈을 빛내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뒷간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가 다르니 확실하게 하는 게 낫겠지?”
“그럼요.”
현주혜의 두 눈은 뜨거웠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도와주는 이가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이었다.
당대의 중원제일인인.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을게.”
“잊지만 않을 거예요?”
“죽을 때까지 갚을게. 동생의 제자들을 본문의 아이들처럼 챙기고 보살필게.”
< 제 93장. 각자의 전쟁.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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