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01화 (301/325)

< 제 93장. 각자의 전쟁. -01 >

득의양양한 석정후의 모습이 너무나 아니꼬웠지만 그럼에도 석민후는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지금은 엿 같아도 석정후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알지. 나도 잘 알지. 네 입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지만 말은 해볼 수 있지 않더냐. 아까 보아하니 서 소저하고도 각별한 사이인 것 같은데. 서 소저는 비록 무기명제자이기는 하지만 벽 장문인의 첫 번째 제자이지 않더냐.”

“할 수는 있는데, 글쎄요. 아까 형님의 눈빛 때문에 조금 꺼려지네요. 사저께서 그런 것에 상당히 민감해서요. 어렸을 적부터 하도 시달려서 그런 눈빛에는 학을 떼시거든요.”

“내 눈빛이 어때서?”

“형님께서 가장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속에 날카로운 칼을 숨긴 석정후가 웃으며 염충에게도 시선을 두었다.

석민후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는 정확히 봤었다.

염충이 헤벌쭉 웃으며 서예지의 몸 곳곳을 훑어보는 걸 말이다.

“크흠!”

그 사실을 염충 역시 모르지 않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변명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만한 미모를 가진 여인이 있는데 눈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사저께서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지요.”

똑같이 받아치는 석정후의 모습에 석민후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그러나 그 주름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아니꼽고 짜증나더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진짜 진상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하면 양 대협에게 부탁해 보는 것은 어떠냐? 대제자이시지 않더냐.”

“형님. 형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이곳에서의 제 위치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첫 번째입니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넌지시 운은 띄워볼 수 있지 않더냐. 너 역시 곤륜파의 제자인데.”

석민후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더구나 벽우진의 제자사랑은 중원사람 전부가 다 알고 있었다.

속가제자들의 죽음에 대막까지 찾아간 일화는 이미 모르는 이가 없었고.

“근데 굳이 이곳에 머무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짧게 머무는 거라면 숙소를 잡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 정도 위세는 있는 곳이 석가장이지 않습니까. 그곳의 일 공자가 형님이시고.”

“허어. 다 알면서 그리 말하는 거냐? 단순히 머물기만 할 것이 아니니까 내 이리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지 않더냐.”

“부탁이라.”

“너에게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다.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삼 일에서 오 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상과 달리 길어져도 이레는 넘지 않을 것이다. 그 동안만 부탁 좀 하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석민후가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에도 석정후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석정후는 석민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굳이 경쟁자를 옆에 둘 필요는 없지.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 정도야 떨어져 있어도 충분하고.’

석정후는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친구보다 적을 더 가까이 두는 게 유리한 법이라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벽우진을 등에 업은 그에게 당가타는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였다.

알고자 한다면 오늘 석정후가 입은 속옷 색깔도 알아낼 수 있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제 권한 밖입니다, 형님.”

“···운을 띄우는 것조차 힘들다는 말이더냐?”

석민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도 힘들다고 하자 짜증이 난 것이었다.

“제가 계속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하기 싫은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석민후가 본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석정후도 만만치 않았다.

여유롭게 웃으며 아닌 척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우리가 경쟁하는 사이이지만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형님이랑 제가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석정후가 반문했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어서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 경쟁자의 손을 잡아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아니었다.

“총군사님을 만났다고 들었다.”

“감사하게도 먼저 연락을 해주셨지요. 그때의 기분은 아마 제 인생에서 손에 꼽을 겁니다. 앞으로도요.”

“각종 물자와 보급에 대한 얘기가 나왔겠지?”

석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두 사람은 형제라기보다는 석가장주라는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으니까.

실제로 석정후는 석민후를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도 없는데 형제는 무슨.’

같은 핏줄이지만 얼굴을 본 날보다 보지 못한 날이 많았다.

또한 그는 석가장에서 살면서 형제간의 정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주쳐도 없는 사람 취급하던 석민후를 그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가식적인 게 장사에 특화되기는 했지.’

석가장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아쉬운 게 생기자 이제 와 미소 띠며 다가왔다.

그 모습에 석정후는 실소가 나왔다.

물론 겉으로는 안타까운 척 연기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널 부를 이유가 없지.”

“대외비라 대답해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확신하듯 말하는 석민후를 향해 석정후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도 석민후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저 말이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였다.

스윽.

석정후의 대답을 들은 석민후는 굳은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셋째 동생을 쳐다봤다.

“너 혼자서는 무리다. 혼자 감당하기는 힘들 거야. 그러니 나와 힘을 합치자. 나의 경험과 너의 인맥이라면 이 큰 건을 다 집어삼킬 수 있다.”

석민후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지지부진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였다.

또한 간은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기에 석민후는 가감 없이 본론을 얘기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정말 혼자 하려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만약 실패한다면 너의 실패만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석민후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재능도 있고 배짱도 있어 보이지만 결국 중요한 건 실력이고 결과였다.

그 부분에서 석정후가 증명한 것은 아직 많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비율 정도를 생각하고 있겠지.’

지금의 모습은 비율을 높이기 위한 튕김이라고 석민후는 생각했다.

자신의 역량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의 역량을 과대평가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대화로 보건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조언도 받았고요. 하지만 중요한 건 제 역량이겠지요.”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다. 옆에서 네가 보고 배울 것도 많을 테고.”

“자꾸 같은 말을 하게 하시네요. 저 혼자 하겠다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요.”

“···과욕을 부리다가는 탈이 나는 법이다. 지금 네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냉정하게 현실을 봐야 한다.”

“충고는 감사히 듣겠습니다.”

부르르르!

말과는 달리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한 석정후의 모습에 탁자 아래 가려져 있던 석민후의 두 주먹이 부들거렸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순간의 흥분을 참지 못해 주먹다툼을 하게 되면 잃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손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기대하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마. 다음에 네가 날 찾아왔을 때는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얄미운 석정후의 모습에 석민후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거기서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찬바람이 일 정도로 싸늘하게 방을 나섰다.

“시원하게 욕이라도 하시지 그랬습니까.”

“에이. 그건 하수나 그러는 거지. 그리고 나중 일은 혹 모르니까. 지금이야 내가 잘 나가지만 나중에는 달라질 수도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지금은 추격이지만 곧 추월할 테고 나중에는 내 등만 바라봐야 할 거야.”

석정후가 씨익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위협적인 경쟁자라는 걸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았다.

“둘 다 치워버릴 수 있으실 겁니다.”

“염충도?”

“예. 혹시 포섭하시게요?”

백륜이 미간을 좁혔다.

개인적으로 염충과는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럴 리가. 염충은 마지막까지 큰 형의 곁을 지킬 걸.”

“돈이 있을 때까지는요.”

“정답. 근데 의외네.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진짜 급하긴 했던 모양이야.”

“시급을 다투는 상황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석가장의 일 공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방법을 찾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찾아온 것일 터였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라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몸이 달아올랐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웬만해서는 석가장을 나서지 않는 분이잖습니까.”

“지금까지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지.”

“그 정도로 공자님이 위협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아부가 많이 늘었어.”

느긋한 자세로 앉아서 차를 들이켜며 석정후가 말했다.

성장한 것은 자신만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다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시기가 지난 거 다 알고 있거든. 웃차! 그럼 나도 일을 해볼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말이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석정후가 마음을 다잡았다.

석민후 앞에서 거들먹거리듯이 말했지만 아직은 인정을 받아야 하는 단계였다.

그렇기에 석정후는 각오를 다지며 방을 나섰다.

촤르륵!

홀로 방 안에 앉아 있던 벽우진이 종이를 펼쳤다.

고요한 방에서 혼자 눈을 빛내며 보고서들을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일단 아홉 중 셋은 제외이고.”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흔적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세 장의 종이를 겹쳤다.

검과 도, 그리고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셋은 아무래도 상흔과는 연관이 적다고 생각해서였다.

“근데 그래도 아직 여섯 명이나 남았네.”

용모파기 하나 없이 단순히 글만 있는 보고서였지만 벽우진은 진지했다.

이 여섯 명 중에 청민을 죽인 흉수가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똑똑똑.

“오라버니. 사부님과 함께 왔어요.”

“어, 들어 와.”

문 밖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살기 넘치는 눈빛을 뿌리던 벽우진이 책상 위를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방 안으로 현주혜와 연진청이 들어왔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표정이 좋지 않네?”

“구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서요.”

“차라리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아? 저리 꽁꽁 싸매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내겠어. 차라리 구마 중 한 명을 만났을 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은데. 물론 쉽게 말해주지 않겠지만 매 앞에 장사도 없다고 하잖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요.”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연진청이 씁쓸한 기색을 띠었다.

청민의 죽음에 슬퍼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인의 삶이 그런 것이기에 어느 정도는 납득하고 있었다.

사람인 이상 죽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얘기는 얼추 들었어. 오단(五團)의 단주 자리를 거절했다고?”

< 제 93장. 각자의 전쟁.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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