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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300화 (300/325)

< 제 92장. 무림맹(武林盟). -03(12권 끝) >

자존심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여기에 좀 더 흠집이 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리고 상한 자존심은 나중에 더 크게 챙기면 되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실적이었다.

‘똑같은 기회라도 결과는 얼마든지 다르게 나올 수 있으니까.’

처가라는 패를 사용했음에도 그가 얻은 결실은 없었다.

어떻게든 제갈현을 만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거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굽히는 것쯤이야.’

자존심이 드높은 석민후였지만 그 역시 장사꾼이었다.

이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쯤은 얼마든지 굽힐 수 있었다.

“길은 알고 있습니다. 연락은 닿지 못했지만요.”

“이곳에 있는 건 확실하고?”

“예.”

염충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혹시라도 거절당할까봐 연락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직접 찾아가면 문전박대는 안 당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고.

경쟁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혈족인 만큼 염충은 내심 살짝 기대했다.

“가자.”

“모시겠습니다.”

사천당가는 처음이었지만 앞서 방문했던 상인들을 통해 길에 대해 수도 없이 들었기에 염충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 길을 못 찾겠으면 주변의 도움을 받을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착각임을 염충은 얼마 가지 않아서 깨닫게 되었다.

괜히 사천당가의 장원을 철옹성이라 부르는 게 아님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크긴 더럽게 크네.”

“석가장보다 더 큰 것 같습니다.”

“규모로는 오대세가 중 최고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어.”

“저 곳 같습니다.”

딱 봐도 별채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고루거각을 바라보며 염충이 말했다.

그러자 석민후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장 걸어갔던 것이다.

“멈추시오.”

하지만 석민후는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서야만 했다.

별채에 들어가기 전 웬 무사 한 명이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석가장의 석민후입니다. 동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무사였지만 석민후나 염충은 놀라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당가이니만큼 보이지 않는 경비무사가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서였다.

더구나 이곳에 머무는 이가 태상가주의 친구인 패선이었다.

그런 만큼 비밀리에 지키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석민후? 따로 보고 받은 내용은 없소만.”

“급히 오느라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온 것을 알면 출입을 허락할 것입니다.”

“잠시 기다리시오.”

당당한 석민후의 모습에 무사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지나가던 시비를 불렀다.

잠시 후 전각 안에서 석정후가 백륜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로구나.”

“안녕하십니까.”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을 법도 하건만 석정후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히려 백륜이 크게 놀란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뒤늦게 포권을 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신지요.”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너하고 긴히 나눌 대화가 있어서 말이다.”

석민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석정후는 알았다.

지금 짓고 있는 미소가 석정후 특유의 영업용 미소라는 사실을 말이다.

“저를 만나러 이 먼 곳까지 오셨단 말씀이십니까?”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장사꾼이지 않더냐.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거리는 중요하지 않지. 이득을 남길 수 있다면 전쟁터가 문제더냐. 일단은 가고 봐야지.”

“그렇기는 하죠.”

석정후는 내심 웃었다.

어째서 석민후가 여기까지 직접 왔는지, 그리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유를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석민후 역시 자신이 그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자존심보다는 실적이 먼저라 이건가.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이야.’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고민을 했을 터였다.

아니, 오면서도 계속 고민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1순위가 자신이 아니었을 터였고.

하지만 석가장의 일 공자라는 신분은 상계에서나 대단하지 무림에서는 아니었다.

‘처가인 공손세가주조차도 총군사님을 독대하기가 쉽지 않은데.’

공손세가주도 힘든 것을 석민후가 가능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차선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일 터였다.

“무슨 일이야?”

“아, 사저.”

“허업!”

생각지도 못한 손님으로 인해 입구가 소란스러워지자 서예지가 다가왔다.

뒤뜰에서 수련을 하고 왔는지 얼굴과 머리카락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러나 땀 정도로는 서예지의 미모를 가리지 못했다.

오히려 묘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 모습을 본 석민후가 숨을 들이켰다.

“형제분인가?”

“아, 네. 저의 큰형입니다. 여기 이 분은 제 사저이십니다.”

부인이 있음에도 눈을 떼지 못하는 석민후의 모습에 석정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개해 주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마주쳤는데 소개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석정후는 어쩔 수 없이 석민후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석가장의 석민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서예지예요.”

“검봉!”

“그렇게 불리기도 해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자신의 별호에 서예지가 옅게 웃었다.

이제는 적응될 법도 한데 좀처럼 검봉이라는 별호가 적응되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청해제일미라는 별호보다는 검봉이 더 좋았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서 소저!”

“아, 네.”

호감이 듬뿍 담겨 있는 석정후의 눈빛에 서예지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짧게 목례한 후 몸을 돌렸다.

석정후의 손님인 것을 확인했으니 굳이 이 자리에 더 이상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더는 있고 싶지도 않았고.

“우와···.”

“무림오화보다 더 미인인 것 같습니다.”

넋이 나갔던 것은 석민후만이 아니었다.

염충은 아예 침이 흐를 정도로 입을 벌렸는데 그 모습에 백륜이 실소를 흘렸다.

석가장에서의 기세등등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서였다.

동시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혼담을 넣어볼까.”

“형님은 혼례를 올리시지 않았습니까.”

“영웅에게 삼처사첩이 흠은 아니잖으냐. 아버지께서도 첩을 여럿 두셨고.”

석민후는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검봉이라면 그의 부인으로 과하면 과했지 부족하지는 않아서였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곤륜파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셋째의 든든한 뒷배를 그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지.’

굳이 곤륜파가 아니더라도 서예지 정도의 미인이라면 그가 노력할 가치가 있었다.

거기다 그에게 부족한 무력을 대신 채워줄 수도 있었고 말이다.

‘부인이자 호위무사라. 정말 좋군.’

석민후가 히죽 웃었다.

자신이 금력을, 서예지가 무력을 담당한다면 무서울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본처도 아닌 첩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만 하더라도 혼담이 수십, 수백 개가 들어오는데요.”

“석가장의 일 공자라면 혼처로서 나쁘지는 않지.”

“그건 형님의 생각이죠. 사저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혹시 네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고?”

초를 치는 석정후를 석민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문득 하나의 추측이 뇌리를 스쳐지나가서였다.

“그럴 리가요. 근데 제가 만약 나오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만나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네 선택이 그런 것이니까.”

“하긴. 차차선도 있으셨겠네요.”

은근슬쩍 찔러보는 셋째의 말에 석민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계속 여기에 세워둘 것이냐?”

“들어오시죠.”

석민후의 독촉 아닌 독촉에 석민후가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가지만 그래도 일단 들어볼 작정이었다.

듣는다고 해서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한 번 정도는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스윽.

한편 석정후의 뒤를 따르던 석민후는 은근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벽우진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서예지를 다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말이다.

‘내가 잡은 숙소하고는 천양지차로군.’

건물 안으로 들어간 석민후가 쓴웃음을 흘렸다.

사천당가의 장원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그와 달리 석정후는 너무나 편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요구사항을 한 가지 더 추가했다.

‘이 정도 크기라면 둘이 더 머문다고 해서 불편해지지는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곤륜파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고 말이지.’

석정후와는 석가장주의 자리를 노리고 경쟁하는 사이지만 동시에 가족이기도 했다.

그러니 곤륜파와 아예 연관이 없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달칵.

“앉으시죠.”

석민후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자신의 방에 도착한 석정후가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앉는 사람은 석민후뿐이었다.

염충은 당연하다는 듯이 석민후의 뒤에 시립하듯 자리를 잡았다.

“좋은 곳에 머무는구나.”

“사부님 덕이죠. 저 혼자 왔다면 이런 곳은커녕 당가타 인근의 객잔을 잡아야했겠죠.”

“마치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형님께는 공손세가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내가 무인이 아니다 보니 눈치가 보여서 말이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짧게 머물 수도 있고.”

대답을 하며 석민후가 셋째 동생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석정후는 자신의 속내를 너무나 잘 숨기고 있었다.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많이 컸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잠자코 듣기만 하는 석정후의 모습에 석민후가 내심 입맛을 다셨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일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제법 협상할 태가 나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석민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애송이였다.

석정후의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상계에서 버텨온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석정후를 요리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이곳에 머물고 싶구나.”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여기 별채는 사천당가의 태상가주님께서 특별히 내어준 장소라서요.”

석정후가 단칼에 거절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달리 사천당가와 태상가주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마치 거들먹거리듯이 말이다.

‘후우. 참자. 지금은 내가 을인 상황이니까.’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는 석정후의 모습에 잠시 울컥했으나 그는 이내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석정후를 설득하는 게 먼저였다.

또한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기에 충격은 실질적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알지. 나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너와 나는 한 핏줄이지 않더냐.”

“반만 같은 피가 흐르고 있죠. 모친은 다르니까요.”

“그래도 너와 내가 석가장의 혈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완전 남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겠느냐. 게다가 두 사람이 머물 공간이 부족할 것 같지도 않고.”

석민후의 시선이 슬쩍 방을 훑었다.

들어오면서 확인한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벽우진과 당민호의 사이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은근히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여기에서 제 서열은 끝이에요. 막내인 제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석정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미소였으나 석민후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역시나 이렇게 나오는군.’

상인을 자처하는 석정후가 당가타의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그런데도 이렇게 말한다는 건 오직 한 가지만을 뜻했다.

‘신이 나겠지. 나보다 우위에 있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 제 92장. 무림맹(武林盟). -03(12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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