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2장. 무림맹(武林盟). -02 >
“큰 틀은 거의 다 잡혔습니다. 아직 소소한 부분들이 남아 있으나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해도 될 것 같은데.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어.”
“맞습니다. 아직 교주와 구마가 합류하지 못했다면요.”
부친의 말에 당문경이 눈을 빛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반면에 무림맹은 현재 주요 전력들이 모두 다 결집한 상태였다.
“준비가 다 끝나지 않은 상태라 피해가 클 겁니다.”
“안 싸울 거 아니잖아? 이미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그렇다면 우리 쪽에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렇긴 합니다만.”
제갈현이 미간을 좁혔다.
당민호의 의견도 일리가 있어서였다.
더욱이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무림맹의 전력이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교주와 구마가 아직 합류 전이라면 기회인 건 분명해.’
총군사로서 제갈현의 임무는 승리와 피해의 최소화였다.
상처뿐인 승리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만약 양패구상이라도 당한다면 오독문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정작 천년마교를 막아내고도 오독문의 지배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안전하게 가는 게 정석이지만 너무 신중하게 준비했다가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
“맞는 말씀입니다.”
“뭐, 생각해 보라고 한 말이야.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사실 관심 있는 곳은 따로 있고.”
“아직 못 알아냈지?”
“응. 구마가 아홉 명이나 되잖아. 추리기는 했는데 확실한 건 아니니까.”
여기저기에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각자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레 벽우진은 당민호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직접 나서서 찾고 있으니까.”
“사천당가에 그럴 여력이 있나?”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뜩이나 천년마교로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사천당가는 금천의 거점으로 인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그렇기에 벽우진은 구마를 찾을 여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이각도 있고, 개방도 있다. 그리고 구마와 교주의 움직임은 모두가 예의주시해야 하는 일이야. 다른 이들도 아니고 천하의 교주와 구마 아니냐? 게다가 알아보니 이번 교주는 초대 천마에 버금가는 고수라고 하더라고.”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 당민호가 작게 말했다.
굳이 다른 이들이 들어서 사기를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나중에는 알려지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초대 천마에 버금가는 고수라.”
“그래서인지 마제라는 별호보다 천마로 더 많이 불린다고 하더라고.”
“일부러 흘린 소문 아냐? 연막작전이라든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맞을 수도 있어. 걔네들이 언제 잔머리 굴리는 거 봤어?”
당민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천년마교가 보여준 모습을 감안하면 거짓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만천무제의 일.”
“···그건 진짜 의외였지.”
“심심해서 저지른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근데 생각보다 알아낸 게 너무 적어. 육대마가나 오대무력부대는 예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들이잖아.”
“나도 답답하다. 개왕도, 총군사도 마찬가지고.”
벽우진의 시선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제갈현과 개왕에게로 향했다.
특히 개왕은 의족이 반이나 닳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움직임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늘 염두에 두어야 해. 지금처럼 거점을 크게 잡은 경우도 없었다는 것을.”
“보통은 그냥 단순무식하게 들이밀었지. 그만한 힘이 천년마교에는 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 피해를 단숨에 회복하는 거 봐.”
벽우진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새삼 천년마교의 저력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나도 그건 기가 질리더라. 말이 천사백 명이지 최소 절정이 그 정도 숫자라는 거잖아. 어느 정도 기준이 되지 않으면 전사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기준은 통과한 놈들이겠지. 하지만 고수급은 얼마 없을 거야.”
“문제는 천사백 명 중에 눈에 띄는 성장을 하는 이들도 있을 거라는 점이지. 무인의 성장에 가장 좋은 양분은 누가 뭐래도 실전이니까.”
“근데 그건 피차 마찬가지야.”
괜히 영웅이 난세 속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상황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어마어마한 숫자가 갈려 나가겠지.”
“···어쩔 수 없지. 그게 전쟁이니까.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
벽우진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전쟁이 발발한 이상 죽음은 늘 옆에 있었다.
또한 천년마교의 침공이 아니더라도 무인은 늘 칼날 위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냉혹하고 비정한 세계지.”
“괜히 비정강호라는 말이 있겠어.”
“근데 진짜 혼자 쳐들어가지 않을 거지?”
“내가 그렇게 무모한 성격은 아니야. 나 혼자서 천년마교랑 싸우는 건 힘들어.”
“불가능하다고는 말 안 하네?”
당민호가 실소를 흘렸다.
보통은 엄두도 못 낼뿐더러 아예 말 자체를 하지 못할 텐데 벽우진은 역시나 달랐다.
“치고 빠지는 식으로 하면 병력을 야금야금 잡아먹을 수 있지. 대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위험하기도 하고. 괜히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냐.”
“승리도 승리지만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종지부라.”
당민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마음은 그도 굴뚝같았다.
이 지겨운 전쟁을 후대에까지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과 달리 결과를 내는 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직 중원무림이 천산을 공격한 적은 없지?”
“없지.”
“길은 얼추 알잖아?”
“알지. 근데 천산까지의 여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거야. 신강은 온전히 천년마교의 영토이니까. 신강에서는 우리가 외부세력인 게지. 지금 천년마교처럼. 그리고 북해빙궁 때의 일을 겪어봐서 너도 알 텐데? 무림맹은 근본적으로 한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당민호의 얼굴에 회의적인 기색이 떠올랐다.
단 한 명이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천년마교와 달리 무림맹은 수없이 많은 무문들의 연합체였다.
그리고 그 말은 무림맹주 혼자서는 그 무엇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걸 뜻했다.
다들 천년마교의 침공을 막는 것에는 열과 성을 다하지만 원정을 나서자고 한다면 머뭇거릴 터였다.
“결집력이 약하지.”
“맞아. 강경파와 온건파가 늘 맞붙는 형상이었고, 그건 이번 역시 다르지 않겠지.”
“균형은 좋지만, 과감할 때는 과감하게 전진할 필요가 있는데 말이지.”
“당장 눈앞의 평화가 더 소중하다 이거지. 후대의 일은 후대에게 맡기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의외로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많았다.
후대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기도 했고.
천년마교를 막아내는데 급급했기에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겨서 몰아내더라도 복구라는 일이 남아 있기도 했고 말이다.
“이기적이지만, 현실적인 부분이라 뭐라 말하지를 못하겠네.”
“그래도 난 너랑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너도 괴짜라 불린 거야.”
“후후! 유유상종이라는 좋은 말도 있잖아?”
“유유상종은 무슨.”
벽우진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당민호와 같은 부류에 포함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번에는 좀 다른 결과가 나오게 해보자고. 막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추격해서 끝장을 내자.”
“우리 둘만으로는 힘들어.”
“그러니까 노력해 봐야지. 안 될 거라고 미리부터 포기하면 더 안 돼. 되게 만들어야지.”
“내가 평소에 자주 하는 말인 거 같은데.”
벽우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역할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금천에 자리 잡은 놈들을 흔들 필요가 있어. 가만히 지켜보는 건 내 성미에 안 맞기도 하고.”
“찔러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그렇지.”
당민호의 시선이 제갈현에게로 향했다.
무림맹의 전략전술을 총괄하는 이가 그인 만큼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이제는 듣고 싶어서였다.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당민호는 제갈현을 쳐다봤다.
그러자 제갈현 역시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석가장을 벗어나 머나먼 사천성 성도에 도착한 석민후는 얼굴 가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석가장의 대공자나 마찬가지인 자신이 직접 방문했음에도 그의 처소는 당가타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현재 사천당가의 장원에는 구파일방을 비롯해서 오대세가와 그에 준하는 무문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리가 없을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호위무사 겸 수행원인 염충이 불만 가득한 석민후를 달래듯 말했다.
상계에서야 석가장의 위치가 절대적이지만 이곳은 무림세가였다.
더구나 그리 멀지 않은 금천에는 역사적으로도 악명이 자자한 천년마교가 있었다.
그런 만큼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석가장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다면 공손세가의 이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석민후가 말했다.
처가인 공손세가는 나름 명망 높은 무가였기에 살짝 기대해 보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손세가의 이름으로도 안 된답니다. 그리고 공손세가 역시 당가타에 숙소를 배정받았다고 합니다.”
으득!
석민후가 이를 악물었다.
홀대도 이런 홀대가 없는 것 같아서였다.
“···하! 이런 대우는 또 처음이군.”
“아무래도 전시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염충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석가장에서는 나름 어깨 좀 펴고 다니는 그였는데 여기에서는 기가 팍 죽었다.
사천당가의 장원도 아니고 당가타인데도 그 이상 가는 무인들이 수두룩했다.
천외천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당가타만 해도 이 정도인데 장원 안은···.’
염충이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절로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가 적지는 아니니까. 침착하자.’
염충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대단한 고수들이 바글거렸지만 적어도 여기는 적진이 아니었다.
크게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다칠 일이 없기에 염충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석민후를 달랬다.
“정후가 머무는 숙소는 사천당가의 내원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삼 공자, 아니 이 공자가 곤륜파의 제자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혼자 지내는 것도 아니고 곤륜파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곤륜파, 곤륜파. 그 놈의 곤륜파!”
석민후가 이를 악물었다.
안중에도 없던 녀석이 한 순간에 늑대가 되어서 나타났다.
등 뒤에 거대한 호랑이, 아니 용을 두고서 말이다.
그게 석민후는 너무나 못마땅했다.
“대공자님도 아시겠지만 현재 곤륜파의 위세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와 벗이기도 하고요.”
“하아! 총군사님과의 만남은?”
“···죄송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크게 한숨을 내쉰 석민후가 이어진 염충의 대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이 안 풀려도 너무나 안 풀리는 것 같아서였다.
“결국 차선책을 택해야하나.”
“곤륜파의 숙소는 알아내었습니다.”
“별채라고 들었는데. 거기까지 들어갈 수는 있나?”
석민후가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어째 이곳에 온 후 계속해서 자신이 작아지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더 격차를 벌리기 위해서는 이번 건을 반드시 성사시켜야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일단은 물꼬를 트는 게 중요하다.’
< 제 92장. 무림맹(武林盟).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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