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98화 (298/325)

< 제 92장. 무림맹(武林盟). -01 >

제갈현의 나지막한 음성이 대전을 갈랐다.

그러자 다들 자세를 바로 했다.

무림맹을 결성하고 공식적인 첫 번째 회의인 만큼 다들 집중했던 것이다.

물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도 있었다.

“우선 사천성의 현 상황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현이 대전 중앙의 원탁 앞에 서서는 돌돌 말려 있는 종이를 활짝 펼쳤다.

사천성의 전 지역이 그려져 있는 전도였다.

깔끔하게 각을 잡아 펼친 제갈현은 뒤이어 색깔이 다른 깃발들을 전도 곳곳에 꽂았다.

“위치가 서장에 가까운데.”

“일단 청성산에서 밀렸으니까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스로 물러난 것이지만요.”

“흠흠!”

얼마 전 청성파의 장문인이 된 현백자가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천년마교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그걸 청성파 혼자서만 한 것은 아니었기에 현백자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사실 구대문파가 전부 모였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구대문파의 전력을 갖추지 못한 곳이 제법 많았다.

형산파는 오독문을 견제하기 위해 참석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런 기분이었나. 공동파와 점창파가 느끼던 분위기가.’

소림사 역시 본산인 숭산을 빼앗기고 세력이 반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림사는 소림사였다.

법무가 건재하다보니 전력이 반 토막이 났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청성파는 아니었다.

반 토막을 넘어 거의 붕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에 자연스레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장문인인 그의 무력 역시 다른 수장들에 비해 손색이 있었고 말이다.

“금천(金川)이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도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대전을 찾았다.

그런데 사천당가에서만은 두 명이 참석했다.

장소가 사천당가이기도 했고, 당민호가 태상가주의 신분이었기에 별다른 잡음 없이 참석을 허용했던 것이다.

더욱이 사천성에 한해서 어쩌면 당문경보다 더 잘 알지도 몰랐고 말이다.

“위치가 상당히 전략적인 것 같습니다. 청해성으로도, 서장으로도, 그리고 감숙성으로도 갈 수 있을 위치입니다.”

원탁 위에 펼쳐진 지도는 사천성의 전도였지만 맞닿아 있는 성들도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그렇기에 지리적으로 살펴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청해성과 감숙성 모두 천년마교의 공격을 받은 곳이지.”

조용히 있던 하북팽가의 가주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구에 어울리는 크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보면 서장 쪽으로 왔다는 추측에 무게가 실리는군. 근데 어떻게 서장을 경로로 이용했을까.”

팽가주 못지않게 장대한 체구를 가진 황보가주가 미간을 좁혔다.

금천이라는 위치를 보자 서장 쪽으로 왔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개방이 전 중원에 흩어져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하급마인의 수준이 절정고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낮은 계급의 마인조차 중원으로 치자면 절정고수의 수준이었다.

강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는 못해도 강사를 지나 강기의 형상을 이룰 정도의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그런 이들이 몇 십 몇 백 명이 아니고 수천 명이나 되었다.

“어후.”

그쯤 된다는 게 아니라 정확한 수치로 생각하자 몇몇이 암담한 생각이 들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혔던 것이다.

“괜히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홀로 중원을 넘볼 정도가 되니까 이러는 거지.”

“지난 세월 동안 힘을 축적해오기도 했고요.”

당민호의 말을 받으며 제갈현이 부연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개방과 천이각을 통해 천년마교의 전력에 대해 알아내면 알아낼수록 막막함이 들어서였다.

“하나 그럼에도 우리는 싸워야 해.”

“맞소이다. 아미타불.”

“어떻게든 말이지. 지면 끝장난다는 생각으로 싸워야 해.”

무거운 한숨이 하나둘 대전에 내려앉을 때 남궁진과 법무, 개왕이 입을 열었다.

싸우기도 전에 기세가 처지는 것은 좋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투쟁심을 불태워야 할 때였다.

처음부터 패배를 떠올리고 싸우면 될 일도 되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쉽네. 북해빙궁과 오독문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밀리지는 않았을 텐데.”

“전쟁억제력이 제대로 발휘되었겠지요.”

당민호와 마찬가지로 제갈현 역시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순간 피해는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피해 역시 생기지 않았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아버지. 새외의 침공이 없었다면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힘이 생기면 그걸 분출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요.”

“그렇긴 하지.”

씁쓸하지만 현실이기도 했다.

백도무림이라고 해서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온갖 이유로, 혹은 아주 사소한 문제로 문파 간의 분쟁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경쟁 중에 다툼이 생기기도 했고.

“오독문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독문의 움직임은 어떤가?”

“형산파가 잘 견제해주고 있습니다. 귀주성에 자리 잡은 후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입니다.”

“형산파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무당의 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형산파였지만 오독문은 최정예가 모두 건재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형산파 단독으로는 오독문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귀주성의 백도문파들과 무가들, 거기에 호남성의 전력까지 끌어 모았으니 적어도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겁니다. 예전 오독문이 날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오독문의 전력도 예전 같지 않은 상태이고요.”

“승냥이 같은 것들.”

혜량이 입맛을 다셨다.

오독문이 하는 짓이 너무나 얌체 같아서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고.”

“알겠습니다. 현재 금천에 자리 잡은 천년마교는 계속해서 병력을 충원 중입니다. 여기가 자신의 거점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서 말이지요.”

“자신 있으면 쳐들어 와봐라 이건가.”

“풍기는 분위기는 그렇습니다.”

당민호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광오해도 그렇게 광오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건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다들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래야 천년마교답지. 암계나 귀계를 쓰느니 힘으로 밀어버리는 게 천년마교의 성향이니까. 힘이 전부라고 믿는 놈들이니. 다만 내가 좀 불만스러운 건 금천에 저렇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다는 거야. 정확하게는 본가의 불찰이기도 하고.”

“으음!”

잠자코 듣고 있던 당문경이 침음성을 흘렸다.

누가 뭐래도 이건 사천당가의 불찰임이 명백해서였다.

물론 사천당가만이 책임질 일은 아니었지만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던 것은 맞았다.

청성파는 도문이고 아미파는 불가였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도 면목이 없지요.”

“과오를 따지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금천에 모이는 마인들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천이각에서 파악하기로 진명마가와 혼천천귀대도 합류했습니다.”

“숫자만 해도 천사백 명 가까이 되는데 그게 벌써 충원이 되었단 말입니까?”

화산파의 명일 도장이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수준이 죽은 이들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숫자가 한꺼번에 충원되었다고 하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새삼 천년마교의 저력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네. 안타깝게도 말이지.”

“구마는?”

제갈현 역시 마음이 무거운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때 인사 후 한 마디도 없이 조용히 경청하던 벽우진이 입을 열었다.

하오문과 비청단을 통해 사천성의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놓친 게 있지 않아서였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쉽게 찾아내기도 힘을 테고요. 아무리 인원이 많아도 교주나 구마 정도의 고수들이 마음먹고 움직이면 그 행적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

벽우진만 하더라도 그가 마음먹고 이동하면 추적하기가 불가능했다.

전서응보다 빨리 움직이는데 어느 누가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천라지망을 펼쳐도 될까 말까한 수준이었기에 벽우진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쉬웠던 것이다.

“분명히 천산에서 나오기는 했을 텐데 말이지.”

“어쩌면 이미 금천에 도착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사실 간자를 투입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니까요.”

벽우진이 왜 구마를 언급했는지 모르지 않기에 당민호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공을 익힌 이가 아닌 이상 천년마교가 터를 잡은 장원 내부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했다.

정공을 익힌 이들이 마공을 익힌 이들을 알아보는 것처럼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공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내부 깊숙한 곳까지는 못 들어갈 터였다.

“결국 제자리걸음이군.”

“그래도 현황 파악은 제대로 했잖아?”

“흠.”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무모한 짓을 하면 안 된다.”

벽우진의 옆에 앉은 당민호가 왠지 모를 불길함에 다급하게 말했다.

친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안 되나?”

“예?”

제갈현이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던 그가 이번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막말로 쳐들어온 쪽은 저 쪽이지. 게다가 지금 하는 꼬라지를 보면 자신 있으면 얼마든지 들어오라고 말하는 거잖아. 우리 땅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서.”

“그건 그렇습니다만···.”

제갈현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보면 남의 집 앞마당에 떡하니 앉아서 칼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되레 집주인이 눈치를 보고 있는 꼴이었기에 벽우진은 미간을 좁혔다.

긴장하고 대비해야 하는 쪽은 천년마교이지 무림맹이 아니었다.

“지켜보기만 하면 더 만만하게 볼 것 같은데. 아니. 이미 만만하게 보고 있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대범하게 거점을 드러냈을까.”

“으음!”

곳곳에서 노기가 섞인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나같이 틀린 말이 없어서였다.

집주인은 엄연히 무림맹이었다.

침범자는 천년마교였고.

“꼭 구마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고.”

“나 역시 무시를 당하고는 못 살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민호를 위시로 당문경, 남궁진이 형형한 안광을 뿌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았던 것이다.

제갈현의 생각은 신중하게 접근하자였지만 그는 무인이라기보다는 책사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인의 심장은 늘 뜨거운 법이었고.

“생각해 보니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가마니로 볼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혜량에 이어 법무 역시 눈을 빛냈다.

둘은 도인이자 승려였지만 동시에 무인이었다.

시주들에게는 얼마든지 고개와 허리를 숙일 수 있었지만 마교도들에게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부딪칠 게 분명하다면 먼저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선공의 이점이야 총군사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말이오.”

황보세가주와 팽가주가 벽우진의 의견에 동조했다.

성급한 성격을 가진 그들은 참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깨지더라도 싸우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무림맹의 사기나 세인들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조직편제는 다 끝나가지?”

< 제 92장. 무림맹(武林盟).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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