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4 >
석가장주의 자리에 자신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을 석민후인 만큼 오늘 이 자리에 대해 알게 된다면 보나마나 자존심 상해할 터였다.
어쩌면 노발대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석가장에서나 일 공자였지 무림에서는 그저 상가의 큰아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줄을 잘 잡아야 하는 것이지.’
석정후가 슬쩍 웃었다.
공손세가를 처가로 둘 때만 하더라도 석민후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 역시 나이는 어려도 석민후에게 큰 날개가 되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중요한 것은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에게도 해당사항이 되는 말이고. 따라잡는 거에 그치지 말고 추월해서도 더더욱 격차를 벌려야 해. 감히 따라잡힐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힘을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특히나 가진 게 많을수록 안전제일주의를 택하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손해를 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큰 걸 얻으려면 그만큼의 위험부담도 감수해야만 했다.
때로는 배짱을 부릴 줄도 알아야 했지만 석민후는 그런 점이 조금 부족했다.
과감한 부분에서는 석창후가 확실히 나았고.
‘그러나 더 이상 둘째 형은 없다.’
어쩌면 가장 큰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가 석창후였다.
상재뿐만 아니라 무재 역시 상당히 뛰어났던 인물이 그였으니까.
하나 안타깝게도 석창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맛은 어떤가?”
“맛있습니다.”
“곤륜산의 차에 비하면?”
“저는 당연히 사문의 차에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웬만큼 뛰어나지 않는 한 말이지요.”
“사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석정후의 모습에 제갈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위를 잘 맞추다가도 제 할 말은 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그것도 아직 어린 소년이 말이다.
“저에게는 집보다 더 집 같은 곳이 곤륜산입니다. 제 2의 고향이랄까요.”
“확실히 좋은 곳이기는 하지. 조금 외지고 멀어서 그렇지.”
“그래도 갈만 하더라고요.”
신변잡기성 대화가 오고갔지만 석정후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로서는 이렇게 제갈현과 안면을 터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기에 급할 게 없었다.
가뜩이나 바쁜 제갈현이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할 리도 없었고 말이다.
“석 공자에게야 사문이니까. 말마따나 제 2의 집이기도 하고.”
“대신 힘들기도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저보고 무재가 있다고 하시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많이 모자라서요.”
“비교대상들이 너무 뛰어나기는 하지. 어떻게 그런 인재들을 구하셨는지.”
처음에는 왜 그런 아이들을 골랐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굳이 그 아이들 말고도 제자로 삼을 이들은 많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벽우진의 안목은 남달랐던 것이다.
‘이 아이도 그러려나.’
색목인과 혼혈은 새외에 인접해 있는 청해성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편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벽우진의 선택에 왈가왈부하는 이는 없었다.
실력으로 보여주었기에 다들 제자들의 재능을 인정했던 것이다.
‘석가장의 삼 공자. 아니. 이제는 이 공자이지.’
제갈현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처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인물이 석정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벽우진의 제자가 되더니 단숨에 후계자 경쟁에 끼어들었다.
양자구도이던 후계자 경쟁에 출사표를 냈던 것이다.
‘운이 따르기는 했지만, 운 또한 실력의 한 부분이지.’
원래 이 공자였던 석창후가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어찌됐든지 간에 중요한 건 석정후가 적어도 석가장에서는 일 공자의 대척점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와 무림맹에게는 필요한 존재였고.
“하하. 사형들과 사저들을 따라가기가 너무 벅찹니다. 사부님께서는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네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지 않나. 차근차근 가다보면 언젠가는 등 뒤가 아닌 나란히 걷게 될 지도 모르네.”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벽 장문인께 얘기를 들었네. 보급을 어느 정도 맡고 싶다고?”
제갈현이 본론을 꺼냈다.
분위기가 이 정도면 무르익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기도 했고.
“맡겨만 주신다면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석가장의 도움을 받는 건가?”
“상부상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석가장의 혈족이기도 하지만 곤륜파의 제자이니까요. 또한 근본적으로는 장사꾼이기도 하고요.”
스스로를 장사꾼이라 칭하면서도 석정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빛냈다.
장사꾼으로서의 승부사 기질이 발동된 것이었다.
“석가장이 아닌 이 공자 석정후라. 거기에 곤륜파 제자의 석정후인가.”
“못미더우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여준 것은 일 공자나 석가장주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제 장점 역시 분명하게 있습니다. 상인으로서는 일 공자나 석가장주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력이 미천합니다. 그러나 무림에 대해서는 제가 훨씬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장사는 단순히 능력과 수완이 뛰어나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네만.”
제갈현이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미소를 띠고 있는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석정후는 당황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장사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성사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맥이지요.”
“맞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석 공자를 인정하고 있네. 능력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인맥적인 부분에서는 나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있지. 상계에 한해서는.”
제갈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구절서생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그였지만 상계 쪽은 그도 깊숙하게 알지 못했다.
대략적인 생리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그는 보고를 받는 쪽이었지 가문의 자금을 불리는 이는 아니었으니까.
“저는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저 역시 곤륜파의 제자로서 천년마교와 끝까지 싸울 테니까요. 다만 다른 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싸움의 방식이겠지요. 저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천년마교와 싸울 생각입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군.”
“철이 든 순간부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기회가 올 거라 장담할 수 없으니 상상뿐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지요.”
“기회를 잡은 것도 능력이고, 그 기회를 살리는 것 또한 능력이지.”
“맞습니다.”
석정후는 절대 저자세로 나가지 않았다.
되레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설명했다.
설사 제갈현의 선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지금처럼 곤륜파를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석가장 내의 영향력이 야금야금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부터 맡겨보겠네.”
“감사합니다.”
“강호의 선배로서 한 가지 조언을 해도 되겠는가?”
“예.”
석정후가 얼마든지 해도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총군사인 제갈현 정도면 굳이 이렇게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연륜, 경험, 신분 모든 게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제갈현이었다.
비록 워낙에 쟁쟁한 이들과 함께 있어 존재감이 가려지는 것이지 제갈현의 신분은 석가장주라도 마음대로 독대할 수 없었다.
“석 공자의 행동에 따라 곤륜파 역시 같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라네. 특히나 벽 장문인에게 말일세. 패선의 제자라는 신분은 이득도 되지만 그만큼 책임질 무게 역시 무겁다는 걸 명심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석정후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패선의 제자라는 신분을 누리기만 했지 그 무게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아서였다.
지금껏 말해준 사람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석정후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더더욱 노력해야 돼. 잘하는 건 당연하고.’
뇌리에 깊게 남은 조언을 곱씹으며 석정후가 생각했다.
못난 제자나 모자란 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인정받는 제자가 되고 싶었다.
수행원 하나 없이 벽우진이 홀몸으로 사천당가의 내원을 거닐었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시비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벽우진의 얼굴을 알기에 당민호를 대하듯 그에게 예의를 다했던 것이다.
“편히 해, 편히. 할 일들 보고.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불편하게 해?”
“그래도···.”
“보던 일 봐.”
손을 휘휘 젓는 벽우진의 말에도 시비들은 좀처럼 허리를 피지 못했다.
당민호는 물론이고 가주인 당문경의 신신당부가 여전히 뇌리에 깊게 박혀 있어서였다.
게다가 벽우진의 소문은 사천당가 내에서 더욱더 유명했기에 다들 자세 하나도 조심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애들이 이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시비들과 하인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얼굴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편하게 지내라고 별채를 내어준 건 좋은데 딱히 심적으로 편하지는 않아서였다.
“들어가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 모여 있어?”
“예.”
3층 목조전각 출입구에 서 있던 총관이 공손히 대답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 전부 강호에서 한 가닥씩 하는 인물이었지만 눈앞의 벽우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더구나 태상가주의 벗이기도 했기에 총관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혹시 내가 마지막이야?”
“예.”
“잔소리 좀 듣겠는데.”
“방금 전에 태상가주님께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는 벽우진의 모습에 총관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벽우진 정도쯤 되면 마지막에 왔다고 해서 불평불만 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
“약속시간에 늦은 건 아니지?”
“예. 지금 올라가시면 딱 맞을 듯합니다.”
“좋아.”
여전히 뒷짐을 진 자세로 벽우진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시비가 열어주는 문을 지나 벽우진이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앉아앉아. 뭐 대단한 사람이 왔다고 다들 일어서? 법무는 맹주니까 맹주로서 위신을 챙기고.”
“맹주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장문인.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모두가 그리 생각합니다. 저는 대표자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아쉽다는 말로 들리는데?”
벽우진의 농에 법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절대로 그리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닙니다, 장문인.”
“다들 오랜만이야.”
“소식은 들었습니다.”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법무를 중심으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문인들이 거의 다 모였다.
내전을 치르던 점창파 역시 참석한 모습에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채중륭이 참석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무인이 죽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 단지 혈채만이 남을 뿐이지.”
“흠흠!”
“그, 그렇지요.”
무심하게 내뱉는 말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한 마디에 몇몇 사람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이 혈채 운운하니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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