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96화 (296/325)

<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3 >

미지근해진 차를 들이켜며 벽우진이 물었다.

명성이 높아진 만큼, 문파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그가 지켜야 할 것도 많아졌다.

더불어 신경 써야 할 것도 말이다.

그렇기에 벽우진으로서는 이렇게 일일이 묻고 생각해야만 했다.

“아직은 별다른 보고가 없습니다.”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물러나라고 해. 괜히 무리해서 싸우지 말고.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해.”

“안 그래도 필교가 이를 갈고 있습니다. 제대로 한 방 먹여주겠다고요.”

“너무 나서지는 말라고 해.”

청민의 죽음으로 곤륜파 내부가 똘똘 뭉친 느낌이었다.

오죽 했으면 거리낄 거 없이 살아가는 당민호가, 그것도 사천당가에서 곤륜파 제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을까.

그 정도로 곤륜파가 풍기는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제가 누굽니까. 진즉에 말해두었습니다.”

“건물이 부서지면 다시 세우면 돼. 문파 역시 마찬가지다. 곤륜산은 어디 가지 않아.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며 앞으로도 똑같이 제자리에 있을 거다. 하지만 사람은 아냐. 그걸 명심해야 해.”

“물론입니다.”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다.”

장난기가 쏙 빠진.

진심만이 담긴 한 마디에 서진후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담담한 한 마디였지만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어서였다.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청민을 이렇게 잃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저보다는 사형이 걱정이죠. 사실 저는 막 나설 급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형은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누가 날 배치해?”

“맹주님이요.”

벽우진이 검지를 휘휘 저었다.

무림맹주는 소림사의 법무이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다른 장문인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대신 권유하고 의견을 수렴할 뿐이다.

“무림맹주는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어. 대표자나 중재자에 가깝지.”

“그렇다고 해도 권력이 없는 것은 아니죠. 신망 역시 두터우시고요.”

“그건 인정.”

벽우진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 역시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법무나 혜량이나 무림에서의 신망은 비슷비슷했다.

“근데 저는 내심 기대했었습니다. 사형이 무림맹주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사실 배분으로나 실력으로나 사형이 제격이잖습니까.”

“대신 난 신망이나 인망이 없잖아. 활동한 시기도 그리 길지 않고.”

“지지기반이 사실 좀 약하기는 하지만 또 막상 따져보면 그렇게 부실한 것도 아닙니다. 사천당가도 있고, 제갈세가도 있고 공동파도 있지 않습니까. 막말로 제갈가주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사형이시고요.”

“나하고는 안 어울려. 내가 무림맹주가 되었다고 생각해봐. 어떨 거 같아?”

서진후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법무의 자리에 벽우진이 앉았을 때를 상상했던 것이다.

“완전 좋거나, 폭망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요?”

“그치? 위험부담이 너무 커. 게다가 무림맹주가 회까닥 돌았다고 생각해 봐. 제갈가주 머리카락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빠졌을 거야.”

“극심한 탈모에 시달리긴 했겠네요. 안 그래도 요즘 검은 콩을 유독 많이 챙겨 먹는다던데.”

제갈현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듯이 서진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풍성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비록 검은빛이 많이 사라져 회색빛이 돌기는 해도 숱은 여전히 무성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관리해야지. 깨닫고 관리하면 늦어.”

“불변의 진리이죠.”

스윽.

익히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거린 서진후가 이제야 벽우진을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제법 묵직한 책자 하나를 다탁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책자에는 제목이 없었다.

“뭐야?”

“그러니까···.”

서진후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눈알만 굴려 주변을 빠르게 훑었던 것이다.

“편하게 말해. 주혜가 왔을 때부터 기막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있으니까. 여기가 사천당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역시 철두철미하십니다.”

“신경 써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우진이 게으르고 건성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 누구보다 잔머리가 잘 굴러가고 예민한 사람이 벽우진이었다.

평소에 하도 신경을 쓰니 쉴 때 완전히 늘어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오문과 함께 조사한 것입니다. 구마와 오대무력조직, 그리고 육대마가에 대한 것들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해야지요. 하오문도 저희와 마찬가지로 천년마교에 갚아야 할 빚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하건데 개방보다 더 자세하고 깊이 있을 겁니다.”

“하오문과 비청단의 협력이라.”

적어도 청해성에서만큼은 비청단이 확실하게 잡고 있었다.

똥개도 제 집 앞마당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처럼 청해성은 곤륜파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청해성은 천년마교가 자리 잡고 있는 신강과 맞붙어 있었고.

거기에 하오문이 합세했다면 개방보다 더한 힘을 발휘할 게 자명했다.

“급하게 모은 거라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요. 대략 훑어보는 것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생했다.”

“저보다는 하오문주가 많이 고생했습니다. 암암리에 움직이는 건 하오문주가 다 했으니까요. 그로 인한 피해도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도 잊지 말고.”

“당연히 그리할 생각입니다.”

곤륜파와 하오문은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수평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예우를 강조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 한 마디에도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서였다.

또한 하오문은 곤륜파의 동반자로 나쁘지 않았다.

‘일단 믿을 수 있는 곳이니까.’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신의를 지켰다는 점이었다.

그런 만큼 벽우진은 자신이 절대 먼저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마대전에서 하오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도 했고.

“너는 봤어?”

“정리만 했지 제대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사형께서 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요.”

“그럼 기다려. 나 보고 봐.”

“알겠습니다.”

서진후가 웃으며 다 식은 찻잔을 들었다.

뜨끈할 때와 미지근할 때, 그리고 식은 차의 맛은 각기 달랐기에 즐기는 재미가 있었다.

문 앞에 선 석정후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긴장감이 얼굴 가득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 긴장하시는 거 아니에요?”

“백륜은 안 들어간다고 너무 태평한 거 아냐?”

“저야 이 공자님의 호위무사일 뿐이니까요.”

“이 공자라는 말은 진짜 적응이 안 되네. 삼 공자라고만 불려서 그런가.”

틀린 표현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석정후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공자라고 누군가 불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차차 적응되지 않겠습니까. 장주님께서 이 공자님보다 나이가 많은 혼외자식을 데려오지 않는 한은요.”

“···그것도 가능성이 아예 없지만은 않은데.”

석정후가 피식 웃었다.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에게 여인이 꼬이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그의 부친도 열 여자를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호색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는 여자는 마다하지 않았기에 삼처사첩은 기본으로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이 공자는 공자님뿐입니다.”

“앞으로는 적응을 해야겠지.”

“석가장의 이 공자이니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백륜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큰 힘은 되지 않았다.

“다녀올게.”

“힘내십시오!”

“노력은 해볼게.”

깊고 긴 한숨과 함께 석정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결 단단해진 눈빛으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끼이익.

낡은 경첩에서 흘러나오는 마찰음이 이상하게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긴장감을 극대화시켰다고나 할까.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석정후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석가장의 이 공자다! 그리고 사부는 패선이야!’

강호에서 패선으로 이름 높은 이가 바로 그의 사부였다.

그렇기에 석정후는 가슴을 폈다.

패선의 제자가 못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석가장의 이 공자보다 패선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게 더 힘이 되는데?’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잡생각에 석정후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웃긴 건 그게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석가장의 이 공자로 이 자리에 선다면 긴장하는 게 당연했지만 패선의 제자로 선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긴장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비록 속가제자이기는 하지만 사부님의 제자인 건 사실이니까.’

벽우진을 떠올리자 어깨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조금은 구부정했던 허리 역시 덩달아 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석정후라고 합니다.”

뚜벅뚜벅 걸어간 석정후는 방의 주인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석가장의 혈족이면서 한 명의 무인이라고 생각했기에 평범한 인사보다는 포권을 택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재미있던 모양인지 앉아 있던 중년인이 옅게 웃었다.

“석가장도, 곤륜파도 거론하지 않는군.”

“두 개의 신분을 모두 갖고 있지만 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건 이름이라고 생각해서요.”

“듣던 대로 대담한 성격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앉지.”

긴장한 기미가 보이기는 해도 크게 떨지 않는 석정후의 모습에 제갈현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석정후가 자리에 앉았다.

“본가에서 만든 차네. 비싼 차를 기대했다면 미안하군.”

“아닙니다. 저는 뭐든지 잘 먹습니다. 다들 제가 집안이 집안이니만큼 입이 고급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장사꾼은 입맛과 자존심을 챙기는 순간 끝입니다. 그건 대상이라 불리는 이도 마찬가지지요.”

“그런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제갈현이 석정후를 향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찻잔을 밀었다.

그리고는 데워두었던 차호를 들어 차를 따라주었다.

“저야 아직 대상을 거론할 정도는 아니지만요. 차향이 좋네요.”

“고맙네. 일단 마시지.”

“예.”

제갈현의 일거수일투족을 빠르게 확인하며 석정후가 차를 들이켰다.

그러나 말이 많았던 모습과 달리 석정후는 의외로 차분해진 상태였다.

만나기 전까지는 극도로 긴장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더는 떨지 않았다.

‘내가 불리할 건 없어. 잃을 것도 없고. 더구나 할 말이 있으니 날 보자고 한 것이겠지. 예의는 지키되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어.’

후려침을 당하는 건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능수능란한 고객이나 판매자에게 호구 잡히는 상인은 의외로 많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막 상계에 입문한 초짜들이 주로 겪었다.

딱 지금 시기의 석정후처럼 말이다.

‘큰판인 건 분명하지만 굳이 매달릴 필요는 없다. 청해성만 해도 큰 시장이야. 감숙, 섬서, 산서만 확실하게 차지해도 기틀은 잡을 수 있어.’

석정후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이 자리가 기회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애걸복걸할 필요는 없었다.

제갈현이 갑인 건 맞지만 절대 갑은 결코 아니었다.

‘그나저나 신기하기는 하네. 내가 구절서생, 아니. 제갈세가주와 이렇게 단둘이 대면하고 있을 줄이야.’

긴장감이 풀리자 석정후는 새삼 자신의 신분이 말도 안 되게 격상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석가장의 이 공자가 되었다고 해서 제갈세가주를 단독으로 면담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석가장의 일 공자인 석민후조차도 불가능했다.

‘알게 되면 배알 좀 꼴리겠는데?’

<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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