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95화 (295/325)

<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2 >

“제대로 당했군.”

“처참하게 망가졌지만 요양을 하면 충분히 회복될 것입니다.”

“시일은?”

“보름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야수마가주를 장난감 다루듯 했단 말이지.”

비스듬히 앉아 있던 교주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 떠오른 감정은 경계심이 아니라 호기심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육대마가 중 한 곳인 야수마가의 주인을 가지고 놀았다고 하자 교주는 호기심이 짙게 동했다.

웬만한 고수로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보고 받기로는 그렇습니다.”

“더구나 천패마가주가 꼬리를 말았다라.”

자존심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 천패마가주였다.

또한 실력 역시 전대의 거마들인 장로들을 제외하면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게 그였다.

그런 천패마가주가 순순히 벽우진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그는 내심 놀라웠다.

“파악하기로 소문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중원제일인은 패선이지.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고.”

“하오나 교주님께는 안 될 것입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은마각주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에게 있어 교주는 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더구나 은마각주는 벌써 40년이 넘게 교주를 보필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지근거리에서 교주를 보아왔기에 은마각주는 확신할 수 있었다.

“후후! 아부가 늘었구나.”

“소인은 사실을 고했을 뿐입니다.”

“혼천천귀대는?”

“대비전력이 있기에 바로 복구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으로 이동 중입니다.”

교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중원을 침공하면서 제법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본교의 저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단일최강세력이라는 칭호는 괜히 붙는 것이 아니었다.

“알았다. 물러가라.”

“존명.”

원하는 내용들을 다 들은 교주는 은마각주도 물렸다.

그리고는 먼 허공을 응시했다.

“심심하지는 않겠어.”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너무 쉬운 싸움보다는 적당히 긴장되는 싸움이 훨씬 재미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대했다.

“곧 보자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교주가 씨익 웃었다.

사천성 성도로 복귀한 이들은 다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청성산을 수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이제 전초전, 탐색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후우.”

하지만 시끄러운 성도의 분위기와 달리 사천당가 내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별채를 배정 받은 벽우진은 조용히 명상 중이었다.

홀로 청성산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었던 것이다.

‘청민아···.’

그러나 아무리 명경지수와 같은 정신과 마음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그의 경지로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파문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후우.”

그럴수록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벽우진의 가슴 속에서 틈틈이 솟구치는 분노는 그 스스로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청민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특별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찌하여 먼저 갔느냐.’

장례식을 치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여전히 청민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죽인 원흉의 목을 베어도 지금의 분노와 슬픔은 가시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원흉의 목을 가지고 청민의 묘지로 갈 생각이었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청민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용서는 없었다.

‘마선과 신선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아니, 마선(魔仙)보다는 귀선(鬼仙) 쪽에 가까우려나.’

들끓는 분노를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벽우진이 심호흡을 했다.

여기까지 와서 마선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되면 천년마교의 교주나 초대 천마(天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천마 역시 사람이었고, 무인이었지. 다만 너무 강한 힘에만 연연했기에 천마라 불린 것뿐.’

초대 천마에 대해서 벽우진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천년마교와 초대 천마와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무공은 죄가 없었다.

익히는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

스르륵.

“구마의 일인이라.”

벽우진이 반개하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텅 빈 허공에 향해 있었다.

천패마가주가 남긴 말을 곱씹고 있던 것이다.

똑똑똑.

“오라버니. 소녀 주혜예요.”

“들어오너라.”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벽우진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이른 아침임에도 깔끔한 신색의 현주혜가 안으로 들어왔다.

막 머리를 감았는지 촉촉하게 젖은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모습의 현주혜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다른 사람에게 방해 받을 시기는 진즉에 지났지.”

“죄송해요.”

“방해 안 받는다니까. 근데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이야?”

벽우진이 익숙하게 차호를 들어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식은 차를 적정 온도로 데우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차호의 주둥이에서 새하얀 김과 함께 향긋한 차향이 올라왔다.

사천당가에서 특별히 챙겨준 화차(花茶)였다.

“아무래도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사과?”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어제 저희가 방해가 된 것 같아서요.”

“육대마가를 놓친 게 왜 너희들 잘못이야. 그리고 내가 너희들이 은밀히 따른다고 해서 못 알아챌 것 같아?”

“아셨어요?”

현주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부러 한참이나 떨어져서 뒤따랐는데 벽우진이 알고 있다고 하자 놀란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제 벽우진의 반응을 떠올렸다.

확실히 벽우진은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도 딱히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 패선이야.”

“그건 아는데···.”

“기감으로는 그 누구도 나에 비견될 수 없어. 이건 내 특수능력이나 마찬가지거든.”

“특수능력이라니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언어에 현주혜가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마가주들이 물러날 때 벽우진의 표정은 엄청나게 무서웠었다.

눈빛만으로 오체분시를 할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 보였다.

“내가 좀 기감이 예민한 편이라서. 그리고 청민의 복수를 할 자격은 아이들에게도 있으니까.”

“저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비록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저 역시 청민 장로님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보타문이 나서줄 줄은 정말 몰랐거든.”

“복수도 있지만 중원무림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본문 역시 중원무림에 속해 있기도 하고요. 일익을 담당할 정도는 아니지만요.”

현주혜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검후라 불리는 그녀였지만 요즘 들어 현주혜는 정중지와(井中之蛙)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보타문이 있는 주산군도에서는 그녀가 여왕이나 다름없는 무인이었지만 전 중원을 놓고 보면 아니었다.

그녀보다 고강한 무인은 상당히 많았다.

‘당장 눈앞의 오라버니만 해도···.’

현주혜는 처음 벽우진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익을 충분히 감당할 만해. 어제 보니까 다들 예리함이 장난 아니던데. 여인의 몸이라 힘이 부족하기는 한데 대신 기술이 뛰어나더라고. 기교 쪽으로는 구파일방 중 화산파 정도만이 비벼볼 만 할 것 같다고나 할까.”

“과찬이에요.”

“아마 그래서 누님께서 육체를 극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갈 길이 멀어요.”

현주혜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직 연진청의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대를 이어 진행 중이었다.

“미완성이지. 괜히 인간의 육신을 소우주라 칭하는 게 아니니까. 같은 여인이고 사람이지만 사람의 몸은 전부 다 달라. 아마 연구를 완성하려면 족히 백 년 이상 걸릴 거야. 연구결과가 축적되고 또 축적되어야 하니까.”

“노력해야지요.”

“어쨌든 어제 일은 신경 쓰지 마. 짜증나기는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네.”

똑똑똑.

대화가 잠시 끊겼다.

또 다른 손님이 벽우진의 방을 찾아온 것이었다.

“접니다, 사형.”

“어, 들어와.”

문이 열리며 서진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현주혜가 먼저 와 있는 모습에 눈을 살짝 치켜떴다.

“현 문주.”

“저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서진후에게 목례하며 현주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였다.

일단 그녀는 할 말을 다 하기도 했고.

“이따 보자고.”

“네.”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한 현주혜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서진후가 앉았다.

“들어오면서 봤는데, 두 분이 너무나 잘 어울리던데요?”

“갑자기 웬 흰소리야?”

새로운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벽우진이 코웃음을 흘렸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선남선녀라고나 할까요?”

“어제 전투에서 머리 다쳤냐?”

“그럼 큰일 나지요. 비청단주가 바로 저이지 않습니까.”

서진후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벽우진이 따라준 차를 두 손으로 들었다.

“이제는 너 없이도 잘 굴러갈 것 같은데? 애들이 잘 자리 잡은 거 같아.”

“그래도 제가 있어줘야 합니다. 눈치 볼 사람이 있어야 농땡이를 덜 피우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네가 말하니까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벽우진이 못마땅한 눈으로 서진후를 흘겨봤다.

하지만 이런 눈빛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서진후는 자연스럽게 받아 넘겼다.

“역시 차는 사형께서 우려내주시는 차가 제일 맛있는 것 같습니다. 공력이 심후하셔서 그런가.”

“언제는 청민이 내려준 차가 제일 맛있다며?”

“그게 바로 사회생활 아니겠습니까?”

칠십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과거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서진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녀석이 청하상단의 태상단주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늘 말하는 사회생활. 좀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이상은 힘듭니다, 사형.”

“노력도 안 하면서 말은.”

“허허허.”

서진후가 넉살 좋게 웃었다.

사형인 벽우진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유일한 낙이었다.

자식도, 손주들도 중요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에게는 벽우진이 더 중요했다.

이제는 함께 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적어도 십 년은 함께 할 줄 알았던 청민 사형이 그리 갈 줄이야···.’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청민의 죽음으로 서진후가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이렇게 사고를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더더욱 컸던 것이다.

물론 칼 끝 위에서 살아가는 무인인 만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으나 서진후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청민과 벽우진만은 자신과 늘 함께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게 크나큰 착각이었지.’

청민의 죽음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된 후 서진후는 이런 사소한 시간이, 대화가 너무나 각별해졌다.

“우리 쪽 피해는 어때? 다친 애들이 좀 있는 거 같은데.”

“소혜와 혁문이가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혁문이를 특히 신경 써. 그 나이 대에는 무슨 일을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사춘기가 일찍 올 수도 있고.”

“안 그래도 각별히 챙기는 중입니다. 가장 충격이 클 아이가 제자인 혁문이일 테니까요.”

“율석이도 만만치 않았지.”

사제인 서진후보다도 더 끈끈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가 배율석이었다.

그런 만큼 청민의 죽음에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제자인 배혁문보다 더 말이다.

“부상보다 혁문이의 심리상태에 더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더욱 챙기고 있고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본산은?”

<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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