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94화 (294/325)

<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1 >

“지원군이다!”

“흑풍살마대(黑風殺魔隊)!”

“멸정참살대(滅正斬殺隊)도 왔다!”

전선의 좌우로 두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한쪽은 환희에 찬 음성이, 다른 한쪽에서는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두 부대의 등장에 희비가 엇갈린 것이었다.

특히 개왕의 놀람이 가장 컸다.

“어디서 저들이···!”

차라리 잔영비마대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자기 나타난 두 부대의 모습에 개왕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동시에 전투가 자연스레 멈췄다.

갑작스러운 두 부대의 등장에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교주님의 명입니다. 물러나십시오.

-물러나라고? 청성산에서?

-예.

소강상태에 빠진 건 수뇌부들의 대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두 부대의 모습에 법무를 위시로 당민호와 당문경, 아미파가 뒤로 물러났다.

일단은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분명 그리 말씀하셨더냐?

-예.

천패마가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당황한 것이었다.

하지만 교주의 명령은 지엄했다.

아무리 그가 육대마가 중 한 곳인 천패마가의 주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쉽군.’

흑풍살마대주의 말을 곱씹으며 천패마가주가 입맛을 다셨다.

두 부대가 나타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여기 있는 중원인들을 몰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피해가 상당하겠지만 이 자리에서 소림무제와 구절서생, 개왕, 패선을 잡는다면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의 대계를 생각하면 크나큰 이득이었다.

‘하지만 명분이 없으니.’

신교에서 교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괜히 절대권력이라 칭하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기에 천패마가주로서는 불만이 있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교주가 되었더라면···.’

천패마가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적들이 쉽게 놓아주지 않을 텐데.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파파파팟!

흑풍살마대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단의 무리가 이동했다.

하나같이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소림무제와 구절서생, 개왕, 독존과 사천당가주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런 건가.’

흉흉한 기운도 기운이지만 혈관이 꿈틀거리는 마인들의 얼굴에서 천패마가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준비된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깨달은 것이었다.

저들이라면 막지는 못하더라도 잠깐 동안의 시간은 벌어줄 터였다.

“도망치는 것이냐!”

“승부는 다음에 내는 걸로.”

“보내줄 성 싶으냐!”

갑자기 나타나 앞을 가로 막는 다섯 명을 본 순간 당민호는 눈치챘다.

물러나기 위해 희생양을 던졌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천패마가주는 비릿하게 웃었다.

“참고로 도망은 아니다. 나 역시 지엄한 교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뿐이니까. 사실 불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꽈아아앙!

한쪽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당민호와 마찬가지로 벽우진의 앞으로도 열 명의 괴인들이 배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지막지한 벽우진의 주먹질에도 의외로 괴인들은 버텨냈다.

한 명이 폭사되더라도 악착같이 벽우진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천년마교도 별 수 없구나! 꼬리를 말고 도망치다니!”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도망치는 게 아니다. 전략적 후퇴인 거지. 그리고 당신도 알 텐데. 정면으로 싸웠으면 양쪽 역시 피해가 어마어마할 거라는 사실을.”

“······.”

당민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흑풍살마대와 멸정참살대가 나타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죽음을 불사하는 청성파의 제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기세는 한시적이었다.

그런 만큼 양패구상의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승부는 다음에 보자고.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청민을, 대벽검을 죽인 자가 누구지?”

“구마 중 한 명이다. 나머지는 직접 알아보도록. 후후후!”

끈질기게 매달리며 전진을 저지하는 다섯 명의 괴인들을 독강으로 튕겨내며 당민호가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천패마가주나 다른 마가주들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인사불성의 야수마가주도 챙겨서 물러나는 그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스스스슥!

창졸간에 썰물처럼 물러나는 육대마가와 흑풍살마대, 멸정참살대의 모습에 당민호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선천진기를 폭발시킨 괴인들을 날려버렸다.

특유의 지독한 독강으로 괴인들을 녹여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독기로 따지자면 괴인들 역시 밀리지 않는 모양인지 온몸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당민호를 붙잡고 매달렸다.

“···지독한 놈들.”

“근데 왜 그냥 갔을까요? 정면으로 붙었어도 승산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대신 피해가 막심했겠지.”

당민호의 곁으로 개왕이 질린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그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거적이나 다름없던 옷이 넝마가 되었던 것이다.

몸을 덮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천년마교 입장에서는 굳이 전장을 청성산으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괜찮나?”

“외상만 입은 것입니다. 다행히 내상은 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며칠 요양은 해야겠지만요.”

“책사가 몸을 쓰면 쓰나. 머리를 써야지.”

당민호가 질책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무림맹에 있어 제갈현의 비중이 적지 않음을 그는 잘 알고 있어서였다.

뛰어난 고수는 수십, 수백 명을 쓰러뜨릴 수 있지만 뛰어난 군사는 수천, 수만 명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당민호는 제갈현의 몸 곳곳을 살뜰히 살폈다.

“무력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다음부터는 그리하겠습니다.”

당민호의 마음을 아는지 제갈현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이 곁으로 법무와 당문경, 정은 사태, 금강신니가 다가왔다.

다들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이네.”

“위험하기는 했지만요.”

“어째 혼자 싸운 사람은 멀쩡한데 우리만 심각한 거 같아.”

“하하하.”

당민호의 말에 개왕과 당문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애들은 어때? 괜찮아?”

“너희 애들부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냐?”

“본가는 문경이가 챙길 테니까. 난 말했다시피 뒷방 늙은이가 다 되었다고.”

“퍽이나.”

벽우진이 코웃음 쳤다.

말은 저렇게 해도 당문경 이상 가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당민호였다.

당문경이 많이 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당민호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천패마가주가 한 말, 들었지?”

“못 들었을 리가 있나.”

“구마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게 없는데.”

당민호가 미간을 좁혔다.

마교주의 친위대이자 한 명 한 명이 절대고수인 구마는 육대마가주나 오대전투부대의 대장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떨치는 고수라는 뜻이었다.

“일단 정리부터 하자고. 고민은 나중에.”

“그래.”

심각한 이곳과 달리 곳곳에서는 승리의 포효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특히 청성파 제자들의 함성이 요란했다.

빼앗겼던 본산을 결국 되찾아서였다.

거기에 편승된 무인들이 함께 두 팔을 벌리고서 울부짖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천산의 대전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제법 널찍한 회의실에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행원도 없이 단출하게 회의실 안에 들어온 네 사람은 상석에 앉아 있는 존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고전했다고?”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패마가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호기롭게 선발대로 나섰지만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아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청성산에서 끝까지 싸웠다면 결과는 충분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일 확률이 높지.’

소림무제와 만천독황이 예상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기더라도 피해가 상당했을 터였다.

특히 옆에 있는 탐천마가주는 죽거나 지금 침상에 누워 있는 야수마가주와 같은 꼴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천패마가주가 송구하다는 말을 하다니. 의외로군.”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중원은 저력이 있는 곳이지. 잡초처럼 아무리 짓밟아도 다시금 머리를 들이미니까. 죽이고 죽여도 계속해서 자라난다고나 할까.”

“다음번에는 다를 것입니다.”

패배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음에도 교주는 딱히 분노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듣고, 말하기만 했다.

하지만 천패마가주는 알고 있었다.

교주가 이번 결과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야겠지. 아무리 진명마가가 없었다고 하지만 육대마가 중 다섯 곳이 함께 나섰는데 밀렸다는 건 쪽팔린 일이니까.”

우드득!

탐천마가주와 혈천마가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못했다.

패자는 유구무언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했기에 두 사람은 울분을 그저 속으로 삭였다.

똑똑똑.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을 짓누를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적의무복을 입은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제야 왔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됐어. 진명마가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교주가 손을 휘휘 저었다.

새롭게 진명마가주가 된 만큼 잡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단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는?”

“말끔하게 끝냈습니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렇습니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장년인이 다부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네 명의 마가주들을 힐끔거렸다.

그들을 보자 꿈에도 그리던 자리에 올라왔음을 진짜 느낄 수 있었다.

“기대하지.”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진명마가주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다른 마가주들에게로 향했다.

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진명마가주의 행동에도 교주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직접 본 패선은 어땠지?”

“···강했습니다.”

“어느 정도나?”

“중원제일인이라는 칭호에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조금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천패마가주는 느낀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야 확실하게 대비할 수 있었다.

“혼자서는 버겁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분하지만 그렇습니다.”

“호오.”

교주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천패마가주가 이렇게 말할 줄은 예상 못해서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다른 마가주들이 그 말을 반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쓰러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전쟁은 혼자서만 치르는 게 아니지요.”

“자존심을 굽힌단 말인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굽힐 수 있습니다.”

교주의 얼굴에 또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기억해 두지. 다들 물러가도록.”

“예.”

교주의 축객령에 다섯 명이 몸을 돌렸다.

조용히 회의실을 나섰던 것이다.

“은마각주.”

“예, 주군.”

“야수마가주의 상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에 신체능력이 뛰어나기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교주의 부름에 안개처럼 은마각주가 나타났다.

오체투지한 자세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 제 91장. 모두 다 함께.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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