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0장.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02 >
패선이 홀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육대마가의 주인들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다급하게 소식을 알린 마인의 마음과 달리 육대마가의 수장들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여유롭게 움직일 채비를 했다.
패선의 명성이 대단하다고 하나 이곳에는 육대마가 중 무려 다섯 마가의 주인들이 모여 있었다.
또한 머지않아 진명마가의 새 가주가 병력을 이끌고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다섯 명의 가주들은 늦장 아닌 늦장을 부리며 청성파의 산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꼴에 패선이라는 건가.”
“진명마가주가 당했다. 방심하면 안 돼.”
“내공만 많은 멍청이가 당한 걸 가지고.”
친위대를 비롯해서 각자 가문의 최정예를 이끌고서 산문에 도착한 가주들이 아니꼬운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혼자서 찾아온 벽우진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자에게 쫓기며 사냥 당하듯이 죽어나가는 수하들의 모습도 못마땅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절대 전사나 투사라고 할 수 없어서였다.
두려움을 모르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줘야 하는 마인들이 도리어 도망치는 광경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근데 배짱은 진짜 좋군. 홀로 적진에 쳐들어올 줄이야.”
“복수에 눈이 먼 거지.”
“그렇다고 해도 쉬운 결정은 아니지. 여기가 지 무덤이 될 수도 있는데.”
“반대로 우리가 무시를 당한 걸 수도 있지. 언제라도 지 한 몸 정도는 내뺄 수 있다는.”
“크르릉!”
다섯 명 중 유독 덩치가 큰 야수마가주가 콧김을 내뿜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불편해졌던 것이다.
특히 다른 이들보다 오감이 더욱 예민한 그는 멀리서 사냥하듯 하급마인들을 도륙하며 중얼거리는 벽우진의 말이 다 들렸다.
“혹시 아냐? 너는? 너도 몰라? 청해성으로 파견된 마인에 대해서 정말 모른다고?”
벽우진은 계속 해서 물었다.
대답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묻고 죽였다.
안다고 한 이들도 시간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기에 결국에는 몸이 썰려 죽었던 것이다.
“만만하게 봐서는 안 돼. 반천우가 아무리 내공만 많은 멍청이라도 그 무력이 약한 건 아니었으니까.”
“귀림마가에나 껄끄럽겠지.”
“···지금 한판 하자는 거냐?”
귀림마가주가 스산한 눈빛을 뿌리며 탐천마가주를 노려봤다.
신경을 건드는 말에 격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그쯤하지. 우리끼리 싸우려고 온 것도 아닌데. 더구나 적을 앞에 두고서.”
“흥!”
“쳇!”
똑같이 마가의 수장이지만 그렇다고 서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천년마교에서는 스스로의 무력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기에 귀림마가주는 천패마가주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천패마가주가 저렇게 말하는데 탐천마가주와 입씨름을 할 수는 없어서였다.
“우선 저 놈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누가 나설 거지? 설마 우리 전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요사스럽게 느껴지는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혈천마가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나머지 네 명의 얼굴이 동시에 찡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 저 놈 하나에?”
“그렇다고 시간을 질질 끌면 우리가 차륜전을 펼친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흥분하는 야수마가주, 탐천마가주와 달리 천패마가주는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하급마인들은 그리 생각할 수도 있었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저 놈도 우리가 온 걸 눈치챈 듯하고 말이지.”
벽우진이 이쪽을 쳐다보는 걸 느끼며 혈천마가주가 싱긋 웃었다.
때마침 천패마가주의 시선도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또한 굳이 우리가 나설 정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패선 혼자 반천우와 진명마가주를 몰살시킨 것도 아닌데.”
“그럼 애들만 보내자?”
“남아 있는 장로들만 보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귀림마가주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굳이 자신들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사실 벽우진의 등장에 이렇게 몰려나온 것만으로도 그는 과하다고 생각했다.
보아 하니 진짜 홀로 청성산을 찾아온 것 같기도 했고.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상대가 패선이라고 우리가 꼭 나설 이유는 없으니까.”
“근데 내가 보기에는 네가 저 놈에게 관심 있는 거 같은데.”
귀림마가주의 시선이 혈천마가주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딱 봐도 벽우진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어 보여서였다.
“어머나. 티 났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실하게 해라. 역겨우니까.”
“노인네보다는 낫지 뭐. 후후!”
혈천마가주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귀림마가주의 이맛살은 잔뜩 찌푸려졌다.
“다들 말만 많아서는.”
“말이 많은 게 아니라 우리의 위신 때문이다. 고작 한 놈 때문에 우리가 우르르 달려가는 게 보기에 썩 좋은 건 아니니까.”
“당할까 봐 무서운 건 아니고?”
“전혀.”
귀림마가주가 콧방귀를 끼었다.
하지만 내심 그는 찔렸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만 봐도 벽우진의 명성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굳이 남 좋은 일 해줄 필요는 없지.’
귀림마가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역시 청성산에만 쳐 박혀 있었기에 온몸이 근질근질 거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나서서 다른 마가주들의 앞길을 닦아줄 생각은 없었다.
“늙더니 겁쟁이가 되었군.”
“그게 아니라 굳이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상대해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흥.”
야수마가주가 코웃음을 치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그를 따라 야수마가의 마인들이 뒤따랐다.
야수마가의 최정예가 그를 보필했던 것이다.
“쯧쯧! 저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꼭 실리만 따져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아랫것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천패마가주의 말에도 귀림마가주는 고개를 저었다.
호승심은 좋지만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네가 말하는 아랫것들이 다 죽으면 나서려고?”
“아직 남아 있잖아?”
“흐음.”
혈천마가주를 향해 귀림마가주가 톡 쏘듯이 말했다.
그러자 혈천마가주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던 것이다.
“뭐, 나로서는 나쁘지 않지만.”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말이지.”
시종일관 툴툴거리는 귀림마가주를 일별하며 혈천마가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적진 한 가운데에 와 있음에도 고고하게 서 있는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촤르르륵!
무상검에 묻어 있던 피를 털어내며 벽우진이 다가오는 거구의 덩치들을 쳐다봤다.
숫자는 오십이 채 안 되었는데 풍기는 기운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이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특히나 선두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인의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야수마가주인가?”
“그렇다.”
십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멈춰 선 야수마가주가 으르렁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런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번들거렸다.
딱히 기운을 일으킨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운은 사방을 압도했다.
하급마인들이 자연스럽게 물러날 정도로 말이다.
“그럼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군.”
“아까부터 계속 나불거리던 그 질문 말인가?”
“들렸나?”
“하도 시끄럽게 떠드니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더군.”
야수화를 하지 않았음에도 칠 척은 거뜬히 넘는 거구의 야수마가주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연신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드득!
몸을 푸는 건지 아니면 위협을 가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가는 야수마가의 행동이었으나 정작 앞에 서 있는 벽우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야수마가주나 뒤에 있는 야수마인들이 아니었다.
청민을 죽인 원흉을 아는지 모르는지가 중요했다.
“그럼 우선 대답 좀 했으면 좋겠는데. 야수마가주쯤 정도 되면 알 거 아냐?”
“알고야 있지. 근데 어쩌나. 말해주기가 싫은데.”
야수마가주가 입가를 비틀었다.
묻는다고 순순히 말해줄 이유는 없어서였다.
그런데 그의 도발이 통한 것인지 벽우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역시 짐승은 때려야 하나봐. 그래야 말을 들으니.”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 나를 비교하면 안 되지.”
“야수마가의 장로도 있었는데, 별 거 없더라고.”
“본가의 아이들이 다 그 놈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시체가 된 장로를 눈짓으로 슬쩍 가리키는 벽우진의 모습에 야수마가주가 다시 한 번 으르렁거렸다.
벽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이 그의 심기를 계속해서 건드렸던 것이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정보 역시 곧 알게 될 것 같고.”
“그럴 일은 없다.”
야수마가주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놈은 그리 생각하고 싶겠지.”
“흥!”
콧김과 함께 야수마가주가 달려들었다.
우선은 말버릇부터 고쳐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방법은 아주 쉬웠다.
현실을 알게 해주면 자연스럽게 바뀔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죽이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의 움직임을 선보이며 야수마가주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눈 깜짝할 새에 벽우진의 코앞까지 접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일반적인 보신경하고는 많이 달랐다.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움직이었다.
쌔애액!
그뿐만 아니라 야수마가주의 공격은 규칙이 전혀 없었다.
맹수의 공격처럼 단순히 머리와 심장만 노렸다.
한데 그 공격들이 너무나 빠르고 강했다.
콰앙!
벽우진의 머리를 쪼갤 듯이 떨어져 내린 손바닥이 땅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뒤흔들렸다.
무지막지한 힘에 땅이 진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벽우진이 맞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휘리릭!
가볍게 몸을 띄운 것으로 야수마가주의 공격을 피해낸 벽우진이 슬쩍 무상검을 휘둘렀다.
딱히 힘을 주었다기보다는 가볍게 휘두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일검에 야수마가주의 팔뚝에 긴 자상이 생겼다.
“음?!”
얇은 실선으로 시작되었던 자상에서 이내 피가 솟구쳤다.
그러자 야수마가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검불침에 이른 자신의 살가죽이 갈라지자 믿겨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벽우진은 검강은커녕 검기도 일으키지 않았었다.
“짐승에게는 매가 약이지. 아, 걱정은 하지 마. 단숨에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터엉!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한 벽우진이 이번에는 앞차기를 날렸다.
착지와 동시에 검을 휘두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느닷없이 발을 뻗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끝에 실린 힘이 상당했다.
거구의 야수마가주가 뒤로 밀릴 정도로 말이다.
“큭!”
힘도 힘이지만 침투경의 수법을 사용한 것인지 내부로 파고드는 진기도 어마어마했다.
찌릿함을 넘어 얼얼한 고통이 교차해서 막은 팔뚝을 시작으로 전신으로 퍼져 나가자 야수마가주의 표정도 달라졌다.
경시하지 말라는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터엉! 텅!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벽우진의 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진 것이었다.
“크아아앙!”
그러나 근접전이라면 그도 자신이 있었다.
본능에 충실한 막싸움이야말로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쿠르르릉!
야수마가주의 포효에 주변이 쩌렁쩌렁 울렸다.
마기가 가득 실린 포효성에 대기가 진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감 넘치는 기세도 얼마 가지 못했다.
< 제 90장.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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