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88화 (288/325)

< 제 89장. 모조리 씹어 먹어 주마. -03 >

벽우진의 두 눈에서 살광이 폭사되었다.

마인을 보자 꾹꾹 눌러놓았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동시에 청성파의 경내가 들썩였다.

벽우진이 뿜어대는 살기를 느끼고 난리가 난 것이었다.

뎅뎅뎅뎅!

이윽고 멀리서 정신없는 경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입자의 등장을 알리는 경종소리였다.

동시에 사방팔방에서 인기척이 폭발했다.

스윽.

하지만 산문을 향해 폭풍처럼 달려드는 마기를 느끼고 있었음에도 벽우진은 여유로웠다.

뒷짐 진 자세에서 팔짱을 낀 자세로 바꾸기만 한 상태로 산문 너머를 삐딱하게 응시하기만 했다.

“뭐야?”

“한 명이야?”

“기습 공격 아니었어?”

가장 근처에 있던 십여 명의 마인들이 허겁지겁 산문으로 달려왔다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경종소리에 비상인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 나왔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수십 명도 아닌 단 한 명의 도사뿐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젊은 도사의 모습에 다들 하나같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경종 친 거야?”

“청성파의 제자인가?”

“그때 봤던 도복이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속가제자라서 옷을 다르게 입은 거 아냐? 검에 달아 놓는 수실로 서열을 나누기도 한다던데?”

자신들이 나타났음에도 긴장은커녕 재수 없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서 서 있는 벽우진을 보며 마인들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들의 시선은 날카롭게 벽우진의 몸 곳곳을 훑었다.

하지만 원하는 정보는 얻을 수가 없었다.

도복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무인은 중원에 수두룩했기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얼굴이 익숙하지 않아?”

“도망자 중에 한 명 아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도망쳤던 놈이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믿을 만한 뒷배를 데려왔을 수도 있잖아. 예를 들면 암살자들이라던가. 돈만 주면 누구든 죽여주는 게 청부살인업자들이라며?”

적을 앞에 두고도 마인들이 키득거렸다.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을 그들을 방심케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벽우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한 명만은 여전히 묘한 눈으로 조용히 주시했다.

이상하게 눈에 익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생김새인데. 도복이랑 검만 빼면 시골촌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근데 저 놈 왜 저렇게 여유가 있는 거지? 미친놈인가?’

자신만 하더라도 마기를 숨기지 않았다.

이미 청성산을 정복했기에 굳이 마기를 갈무리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천산에서는 원래 이렇게 생활하기도 했고.

그런데 눈앞의 청년은 이상할 정도로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부르르르!

‘자, 잠깐만!’

동료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혼자만의 상념을 이어가던 마인이 돌연 몸을 떨었다.

미친놈이라는 세 글자를 떠올리기 무섭게 한 명이 자연스레 떠올라서였다.

바로 얼마 전에 질리도록 본 용모파기 속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장로가 가장 먼저 보여준 요주의 인물이었다.

“패패패패···!”

“뭐? 패야 한다고? 그건 당연하지.”

“패는 것 정도로 되겠어? 목을 따줘야지.”

“안 그래도 겁쟁이처럼 웅크리고만 있어서 손이 근질근질 거렸는데 잘 됐네. 저 놈 좀 가지고 놀면 되겠다.”

벽우진을 알아차린 마인의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강호에 알려진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감히 그들이 패니 마니 할 수 있는 급이 아니었다.

사니 마니 하는 쪽은 자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무 놀라서 그런지 좀처럼 입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씨익.

더구나 그런 그의 모습에 벽우진이 의미심장하게 웃기까지 하자 마인은 몸이 굳어졌다.

별다른 기세를 풍기는 것도, 그렇다고 무형지기를 움직인 것도 아닌데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독사와 눈이 마주친 개구리처럼 말이다.

‘도, 도망쳐야 해!’

시시덕거리는 동료들은 여전히 벽우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이 호랑이 아가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모르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는 땅이 마치 자신의 다리를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발바닥에 아교를 발라놓았거나.

물론 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공을 익힌 그가 고작 아교 따위에 붙잡힐 리가 없었다.

탁.

그때 벽우진이 움직였다.

왼손을 갑자기 허공으로 뻗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돌멩이 하나가 두둥실 떠올라 벽우진의 손아귀에 잡혔다.

“뭐야?”

“허공섭물은 갑자기 왜?”

뜬금없는 허공섭물에 마인들이 실소를 흘렸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뒤이은 행동에 그들은 입을 쩍 벌렸다.

퍼퍼퍼퍽!

손아귀에서 적당한 크기로 부서진 돌멩이 조각들은 이내 허공을 갈랐다.

장난처럼 튕기는 손가락에 돌멩이 조각들이 정확히 마인들의 미간을 꿰뚫었던 것이다.

털썩! 털썩! 털썩!

실소를 흘리던 표정 그대로 머리에 구멍이 뚫린 마인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막거나 피해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일격필살이었다.

“으어어···!”

동료들이 한순간에 절명하는 모습에 가장 먼저 벽우진을 알아봤던 마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감히 반항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달려들어 봤자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내가 네놈을 살려둔 이유는 하나뿐이다. 수뇌부를 데려와. 잡것들 말고.”

쉬이이익!

지금 이 순간에도 경종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이들은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 중에 수뇌부라, 혹은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대부분 다 아랫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본 마인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 살려주시는 겁니까?”

“글쎄. 그래도 당장은 죽지 않을 것 같은데.”

“가겠습니다!”

누군가는 소식을 전해줘야 했다.

아니, 반드시 전해야 했다.

벽우진은 진명마가주마저 쓰러뜨린 강자였다.

아무리 육대마가의 마인들이라고 하나 숫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마인은 고민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거냐!”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다니!”

“킬킬킬! 고추가 없는 녀석인가 본데?”

다른 마가(魔家) 출신인지 무복이 미묘하게 다른 이들이 되레 경내로 달려오는 마인을 보고는 조소를 잔뜩 머금었다.

꼬락서니가 꼭 꼬랑지에 불이 붙어 발광하는 짐승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조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퍼퍼퍼퍼퍽!

거리는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이 돌멩이 조각들이 그들의 머리를 꿰뚫었던 것이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는 듯이 조소를 머금은 표정 그대로 허물어지는 모습에 뒤따르던 마인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저, 저 놈 짓이다!”

“도대체 무슨 수···!”

“철륭아!”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관자놀이가 꿰뚫렸다.

심지어 무엇에 당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탐천마가(貪天魔家) 마인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한 명이라고 방심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던 것이다.

“흩어져!”

동시에 이십여 명의 마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그들의 뇌리에는 방금 전 경내로 되돌아가던 마인에 대한 생각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생존과 적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산개한 마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벽우진에게 쇄도했다.

“죽어!”

순식간에 산개한 마인들이 벽우진을 포위했다.

방심을 걷어내자 무시무시한 살귀들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퍼퍼퍽!

“어?”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마인들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갑자기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했던 것이다.

동시에 그들의 전신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게, 무슨···.”

뒤늦게 찾아오는 고통에 모두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입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멀었나.”

순식간에 수십 명을 절명시켰으나 벽우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고작 이 정도로는 그의 울분이 풀리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생명은 존귀한 것이라고 하지만 마귀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마인들을 죽이는 것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살아 있어 봤자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것들이었다.

이런 놈들을 죽여 선인 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벽우진은 얼마든지 살계를 열 생각이었다.

타다다닷!

경내에서 시커먼 무복을 입은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공격할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본 벽우진의 얼굴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지휘부를 데려오라고 친히 명령을 내렸음에도 죄다 어중이떠중이로 보여서였다.

“아직 제대로 보고가 덜 된 모양인데. 좀 더 살려둘 걸 그랬나.”

별다른 직책도 없는 하급 마인 하나만 달랑 돌아왔으니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양동작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어느 쪽이든 벽우진은 실망스러웠다.

천년마교면 천년마교답게, 강자존을 숭상하는 집단답게 무식하게 달려들기를 원했다.

“이런 찌끄레기들 말고 말이지.”

탁.

검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육대마가의 마인들을 무심히 쳐다보며 벽우진이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무상검을 움켜잡았다.

“엉덩이를 떼기 싫다면, 뗄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되는 일이지.”

벽우진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 순간 무상검이 쏘아졌다.

말 그대로 화살처럼 달려드는 마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역시 오라버니시네요.”

“괜히 패선이라 불리시는 게 아니죠.”

감탄이 짙게 서린 현주혜의 말에 서진후가 뿌듯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

패선이라는 별호는 그와 청민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청민이 떠오른 것이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호는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선(仙)자보다는 왕(王)이 더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요.”

“저도 같은 생각이지만 그래도 사형은 도사이니까요. 도사에게 왕이라는 별호는 그리 어울리지 않지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이는 한참 많았지만 서진후는 현주혜를 대하는데 있어 늘 예의를 지켰다.

그가 곤륜파의 장로이고 청하상단의 전 상단주라고 하지만 현주혜는 보타문의 수장이었다.

때문에 서진후는 보타문주로서 그녀를 대우해 주었다.

“보타문 말씀이시죠?”

“예.”

“사부님이 계시니까 괜찮아요. 지금은 비록 내공을 잃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망이 어디 간 것은 아니니까요. 모든 제자들이 저보다 더 존경하는 사람이 저희 사부님이세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조금 아쉬워요. 만약 사부님의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을 구할 수 있었다면 이번 전쟁에서도 큰 힘이 되었을 텐데.”

현주혜가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무리한 수련으로 인해 주화입마에 빠져 평생 동안 쌓아온 내공을 모조리 잃어버린 연진청이었다.

하지만 육체는 망가졌을지 몰라도 그녀가 쌓아온 무공은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부분은 오라버니께서도 인정하셨지.’

가끔 연진청과 벽우진이 논검하는 걸 들은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육체적인 수련은 하지 못해도 정신적으로는 계속해서 사부가 수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에게도 지나가듯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검선과 비견될 만한 실력자이시라고요.”

“정말요?”

< 제 89장. 모조리 씹어 먹어 주마.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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