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87화 (287/325)

< 제 89장. 모조리 씹어 먹어 주마. -02 >

폭풍 같던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에는 당민호와 제갈현만 남았다.

벽우진이 할 말만 하고 부리나케 나간 덕분이었다.

“···잘한 일일까요?”

“하는 데까지 했는데 안 됐잖아. 어쩔 수 없지. 저 똥고집을 누가 말려? 예지도 안 되고 아이들도 안 되면 불가능해. 유일하게 가능했던 이가 청민이랑 청범이었어. 근데 청민이 죽었어. 청범이라고 제 정신일 것 같아?”

“······.”

어떻게 보면 벽우진보다 더 각별했을 게 청민과 서진후였다.

그런 만큼 제갈현은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당민호와 제갈현이 연거푸 한숨만 내쉴 때 회의실로 개왕이 들어왔다.

벽우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왜 그러긴. 이유가 있으니 이러겠지.”

“무, 무슨 일인가요? 오대전투부대 중 나머지 세 곳이 나타난 겁니까? 아니면 마교주라도?”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개방주는 너잖아?”

“흠흠! 사천성에 한정해서는 얘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저희보다는 사천당가가 훨씬 더 소식이 빠르죠.”

개왕이 슬쩍 물러났다.

전 중원이라면 모를까 사천성에 한해서는 개방도 사천당가에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천성에는 사천당가만 있는 게 아니라 청성파와 아미파도 있었다.

“우진이가 굉천뢰를 하나 던져 놓고 갔어.”

“굉천뢰요?”

느닷없이 굉천뢰를 던졌다는 말에 개왕이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황급히 주변을 훑었다.

“진짜 굉천뢰가 아니라 굉천뢰급의 통보를 던졌다고.”

“아.”

“뭐야, 그 반응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벽 장문인이 통보했으면 별 수 없지 않습니까. 태상가주님께서도 못 말리셨다는 뜻인데 그 정도 사안이면 누가 말려도 못 말리죠.”

“···어떤 때보면 참 똑똑한데 말이지.”

기가 막히게 맹점을 잘 잡는 개왕의 모습에 당민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신도 저렇게 속이나 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하. 제가 그리 멍청한 것은 아닙니다. 똑똑한 것도 상대적이지요. 총군사와 비교를 하면 누구나 다 바보가 될 겁니다.”

“저보다 뛰어난 사람은 많습니다. 다만 무림에서는 제가 좀 특출날 뿐이지요.”

“아니라고는 말 안 하네.”

“하하하.”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겸손한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도 개왕의 등장으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한데 무슨 통보를 하고 가신 겁니까?”

“청성산에 홀로 오르겠다네.”

“역시 패선이십니다!”

개왕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패기로는 중원일절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어서였다.

마음이나 생각을 그렇게 먹는 사람은 많아도 실행하는 이는 없었다.

그것도 천년마교를 상대로 말이다.

“걱정 안 되냐?”

“당연히 걱정이 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벽 장문인이시라면 왠지 혼자 쳐들어가서 싹 다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개왕이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그는 사왕성에서 벽우진이 보여주었던 일검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벽우진 혼자 대막에 갔어도 사왕성주의 목을 땄을 거라고 말이다.

‘다들 허황된 소리라고 하지만.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만약 그 일검을 본 이들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을 걸.’

홀로 대막을 평정했던 이가 사왕성주였다.

또한 대막의 유일한 지배자이자 독재자가 사왕성주였었다.

그런 사왕성주조차 벽우진의 손에 의해 쓰러졌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무리 무림인이 범인들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인간이야. 탈인경의 경지에 들었다면 모를까, 그건 불가능해.”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요? 태상가주님도 대막에서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탈인경이 왜 탈인경이라 불리겠어? 인간의 탈을 벗어던졌기에 탈인경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야.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는 인세(人世)에서 살 수 없어. 아주 먼 옛살 상고무림 시절이라면 모를까.”

“그건 믿으시네요?”

개왕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워낙에 칼 같은 성격이기에 전설이나 설화로만 치부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였다.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아마 본가보다는 제갈세가에 더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원래 학사들이나 책사들이 기록에 대한 욕구가 상당하잖아.”

“맞습니다.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어 참고만 하고 있습니다.”

“기문진도 있는 마당에 단순히 전설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지. 상고무림 시절과 지금이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 수도 있고. 우리는 느낄 수 없지만 아주 확실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무언가라든가 말이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릇 무공이라는 게 인간의 끝을 보고자 하는 공부가 아냐. 나라고 늘 현실적인 것은 아냐.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꿈이라든가, 목표라든가 하는 게 있어야 진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지.”

웬일로 철학적인 말을 하는 당민호의 모습에 제갈현과 개왕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감성적이어도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 같아서였다.

-왜 그러시는 거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짐작하기로 벽 장문인의 영향이 아닐는지 예상해 봅니다.

-흐음.

전음을 주고받던 개왕이 미간을 좁혔다.

순간적으로 노망이 왔나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고수 한 명이 아쉬운 마당에 만천독황이라 불리는 당민호가 노망으로 전력에서 제외된다면 출혈은 상당히 컸다.

“뭐야? 그 눈빛은. 상당히 건방진데?”

“아닙니다. 근데 정말 혼자만 보내실 겁니까? 만약의 상황에 대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큰 걱정을 안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저희가 파악한 전력보다 더 모여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알고는 있는데···.”

“맹주님과 권제도 오고 있지 않습니까. 제왕검 역시 모레면 도착할 예정이고요.”

당민호가 말을 아꼈다.

대신 그는 제갈현을 쳐다봤다.

“생각해야 할 게 많습니다. 만약 지금 벽 장문인의 움직임조차도 천년마교의 설계라면 저희는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을 지도 모릅니다.”

“여기 성도에서? 그것도 사천당가가 있는데?”

“허를 찌르는 것도 병법이니까요. 저는 책사로서 변수를 가장 조심해야 하고요.”

제갈현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전황 자체를 비틀어버릴 수 있는 변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아직은 완벽하게 준비가 되지 않았고 말이다.

“늘 완벽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법이야. 가끔은 과감한 결단도 필요하다고 본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불안요소가 눈에 훤히 보이는데 섣부르게 결정을 내리는 건 위험합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지닌 가장 강력한 패를 잃게 되면 어떡하려고? 이도저도 아니게 되면 불리한 건 우리야. 북해빙궁, 오독문, 대막. 거기에 만천무제의 무덤까지. 이미 우리가 입은 피해는 커.”

개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탁상공론이 길어져서 좋았던 적이 없기에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몰랐다.

“물론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점은 내 능력부족이야. 하지만 애초에 모든 걸 다 알고서 계획을 세울 수는 없어. 특히나 정마대전 같은 상황에서는.”

“···맞습니다.”

“때론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게 답이기도 해.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타고 나는 존재이니까. 신중한 건 좋지만 지나친 장고는 기회를 가리기도 한다는 말을 떠올려 봤으면 좋겠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잔소리는 이쯤하고. 사실 내가 제갈가주한테 잔소리할 신분은 아니잖아? 클클!”

“아닙니다.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적인 자리인데요.”

제갈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로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이런 직언을 해주는 이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그는 기꺼웠다.

‘심지어 싸대기를 날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벽우진이라면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순간 손찌검부터 할 터였다.

아니, 그 전에 죽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제갈현은 그게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길을 갈 때, 혹은 선택을 할 때 말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곁에 누구도 없을 때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지켜만 보실 겁니까?”

“지 혼자 가겠다잖아? 말려도 듣질 않는데 어떡해?”

당민호가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리 그가 친구라지만 벽우진은 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럴 인간도 아니었고.

때문에 당민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대로 물어보자. 너는 대책이 있느냐?”

“준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당민호와 제갈현의 고개가 동시에 개왕에게로 향했다.

궁금증과 의아함이 가득 담긴 눈빛을 그에게 보냈던 것이다.

“벽 장문인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갔다고? 이제 막 본가에 도착한 녀석이?”

“예.”

“어디로?”

당민호의 얼굴 가득 황당한 기색이 서렸다.

방금 전에 도착한 녀석이 떠났다고 하자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아미파로요.”

“거기에는 왜?”

당민호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벽우진과 아미파는 인연이 전혀 없어서였다.

선대로 올라가면 같은 구대문파이기에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곤륜파와 아미파는 딱히 교류가 없었다.

아미파 장문인의 얼굴은 알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저도 전해들은 내용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습니다.”

“잠깐만.”

당민호가 미간을 좁혔다.

조금 늦어서 그렇지 그 역시 개왕처럼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리고는 역시나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태상가주님도 눈치채셨군요.”

“가능성은 있지만, 위험한데.”

“거기에 저희가 손을 거든다면 무게추가 확 기울지도 모릅니다.”

당민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윽고 당민호의 시선이 제갈현에게 닿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임에도 산문으로 향하는 비탈길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육대마가가 자리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참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야.”

뒷짐을 지고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청성산에 짙게 내린 마기가 보였다.

영험하고 청청한 산의 기운을 마기가 억누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놈들이 모여 있길래.”

벽우진의 시선이 청성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그곳에 유독 많고 짙은 마기가 뭉쳐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언젠가는 다 뒈질 것들이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린 벽우진이 다시 산길을 올랐다.

이윽고 반쯤 무너진 산문과 함께 사주경계를 서고 있는 마인들의 모습을 벽우진은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냐!”

“흥.”

기척도 없이 나타난 벽우진의 모습에 놀란 듯 두 명 중 한 명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벽우진은 대답 대신 콧방귀를 끼었다.

고작 잔챙이들 따위와 말을 섞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털썩!

그런데 갑자기 산문을 지키던 두 명의 마인들이 고꾸라졌다.

마치 질식사라도 당한 것처럼 새하얘진 얼굴로 쓰러졌던 것이다.

“나와라, 개새끼들아.”

< 제 89장. 모조리 씹어 먹어 주마.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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