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86화 (286/325)

< 제 89장. 모조리 씹어 먹어 주마. -01 >

제갈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무림맹이 결성되고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정마대전이 발발했음에도 정치질은 여전했던 것이다.

‘방장님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런 쪽에는 약할 수밖에 없지.’

평생을 무공수련에 힘 쏟은 이가 법무였다.

방장이라는 자리도 원래는 사제인 법우가 맡고 있었고.

다만 법우가 죽었기에 법무가 어쩔 수 없이 방장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정치싸움에는 아무래도 취약한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정말 딱인데.’

고약하고 괴짜스러운 성격의 벽우진이었지만 의외로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했다.

또한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핍박하지도 않았고,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지 않았다.

특이한 성격 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람을 편견 없이, 선입견 없이 보는 사람이 벽우진이었다.

지닌바 무위야 두 말할 필요도 없었고.

‘아마 장문인이 맹주가 되었다면 누구도 감히 입을 나불거리지 못했겠지.’

제갈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벽우진이 맹주자리에 앉았다면 감히 누구도 지금과 같은 정치질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제갈현은 아쉬웠다.

법무도 훌륭한 인물이지만 지금과 같은 전시에는 벽우진과 같은 인물이 훨씬 더 나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상황이 안 좋은 건 아니잖아? 사천성의 정세가 어지럽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운남성에 이어 광서성도 반쯤 넘어간 상태라서요.”

“아, 오독문?”

“예.”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제갈현으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오독문이 상당히 얌체처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부지리를 노려도 너무 얍삽하게 노리고 있어서였다.

“급한 건 천년마교야. 오독문은 그 다음에 처리해도 돼.”

“알고 있어. 오독문에는 딱히 관심 없기도 하고. 북해빙궁이라면 모를까.”

“하긴. 곤륜파하고는 접점이 없지.”

“있다면 네가 있겠지.”

“맞아.”

당민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독문과는 독의 명가라는 자존심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게 많았다.

하지만 무릇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었다.

지금은 턱밑까지 다가온 천년마교가 먼저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난 오독문은 안중에도 없어.”

“그것도 인정. 내가 너였어도 이렇게 차분히 앉아 있지 못했을 거야.”

“사실 난 통보를 하러 온 거다.”

“설마···.”

나름 차분한 신색을 유지하던 제갈현의 표정이 갈라졌다.

이 한 마디에서 그는 많은 걸 유추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 생각이냐?”

“전혀.”

“그럼?”

“나 혼자 간다.”

“뭐?”

당민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놈들이 청성산에 자리 잡은 이유는 이미 다 드러났다고 생각되는데.”

“다른 음모가 준비되어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교주를 비롯해서 정예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을 수도 있다.”

“혼천천귀대는 감숙성에서 지리멸렬했고, 잔영비마대(殘影飛魔隊)는 사천성 곳곳을 휩쓸고 있지. 그렇다면 남은 곳은 세 곳뿐이다. 진명마가도 제외해야겠지.”

벽우진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굳어져만 갔다.

말이 이어질수록 벽우진의 의지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해도 청성산에 모여 있는 전력은 천년마교 전체의 반 이상이다.”

“이건 말 그대로 추측이지. 육대마가 중 다섯 곳만 모여 있을 수도 있어. 어쩌면 위장성세일지도 모르지. 애초에 남의 집인 청성산에 터를 잡을 이유가 없어.”

“거점으로 삼기에는 네 말대로 모든 점에서 부족하지. 하지만 시선만큼은 확실하게 끌 수 있다. 그걸 지금까지 증명하기도 했고.”

“그러니 내가 알아보겠다는 거다.”

“너무 위험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제갈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청민을 잃은 벽우진의 심정도 짐작이 가고, 어떤 생각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했다.

더구나 벽우진은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런 벽우진을 고작 청성산의 전력을 확인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은 낭비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청민을 죽인 놈을 찾을 수 있나?”

“······.”

“그렇다면 좀 더 기다리지.”

제갈현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누구라도 할 말이 없었다.

“너 이젠 혼자가 아니다.”

“내 인생의 반 가까이를 채워주었던 녀석이 죽었다.”

“제자들도 생각해야지.”

입을 다문 제갈현을 대신해서 당민호가 나섰다.

어르고 달래듯이 말했던 것이다.

그 역시 벽우진이라는 존재가 현재 중원무림에 얼마나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만류하고 또 만류했다.

“어째 말하는 투가 묘하다? 내가 마치 묏자리를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말하네?”

“그럼 육대마가 중 다섯 곳이 웅크리고 있는 곳에 혼자 가겠다고 하는데 그게 묏자리가 아니고 뭐냐?”

당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친우였다.

또한 죽었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기적처럼 되돌아 왔기에 당민호는 더더욱 벽우진을 잃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중원무림을 생각해서라도 벽우진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 있어야 했다.

“친구라는 녀석도 나를 못 믿어서야.”

“그럼 넌 내가 홀로 싸우러 가겠다고 하면 안 말릴 거냐?”

“말려야지. 넌 약하잖아. 가면 십이면 십 무조건 죽어.”

“···이 자식이.”

당민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확신하듯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 얄미웠던 것이다.

하지만 강하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 역시 알고 있어서였다.

“근데 난 다르지.”

“너도 사람이야.”

“너희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뭐?”

당민호와 제갈현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벽우진은 화제를 돌렸다.

“내가 혼자 쳐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겠다는 게 아냐. 단지 가서 알아보겠다는 거지.”

“아! 적당히 싸우다가 몸을 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마교주가 있으면 모를까, 진명마가주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내 한 몸 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아. 내가 청성산을 가로 지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청성산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막겠다는 것도 아냐. 그저 알아보고 싶은 것만 알아보고 오겠다는 거다.”

“그럴 거면 나랑 같이 가자.”

당민호가 큰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친우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는 너무 위험했다.

또한 인원을 늘리는 것 역시 짐만 늘리는 셈이 될 테고.

“청범이도 안 데려가는 마당에 너를 왜?”

“나 정도면 너에게 짐은 안 될 것 같은데?”

“내 작전에 방해된다.”

“도대체 무슨 작전인데?”

당민호는 물론이고 제갈현도 짐짓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비밀이다. 철통보안이 필요한 일이라.”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위세 부리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흐음.”

당민호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벽우진은 그 눈빛에도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꼭 하셔야겠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원하시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청성산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 많이 참고 있는 거야.”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너무 성급한 결정은 아닐까 싶어서요.”

“제갈가주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많이 참고 있다는 걸.”

“개방주는 물론이고 천이각이 사천성과 청해성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범인을 밝혀내겠습니다.”

제갈현이 다시 한 번 만류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기 몸쯤은 빼낼 수 있는 실력자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더구나 아직 구파일방도 제대로 집결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제갈현은 가급적이면 말리고 싶었다.

“그것보다는 이쪽이 더 빠를 것 같아서 말이지. 그리고 막말로 알아내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겠지만.

그렇기에 제갈현이 한 발 물러났다.

“꼭 그렇게 가야겠어?”

“어. 그래서 여기로 온 거야. 사실은 천산에 가려고 했는데 길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끄응!”

당민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벽우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다짜고짜 신강으로 날아가고도 남아서였다.

“겸사겸사 길잡이도 구할 겸 이리로 왔지. 일단 천년마교 놈들이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어. 너를 잡기 위한.”

“그럴 지도 모르지. 근데 함정은 걸려서 위험해야 함정이지 안 걸리면 아무것도 아니야.”

“허참. 그놈의 패기는.”

누가 패선 아니랄까봐 패기가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모습에 당민호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이제는 듣지 않을 것임을 안 것이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말씀하십시오.”

“지금 전력이면 한 번 붙어도 되지 않아? 난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으음!”

제갈현이 침음을 흘렸다.

사실 그도 몇 번이나 생각하기는 했었다.

개방과 천이각을 통해 파악한 바에 의하면 지금 청성산에 모여 있는 천년마교의 전력은 육대마가 뿐이었다.

잔영비마대가 암암리에 사천성 북서쪽에서 활동한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천년마교 전체 전력의 반 정도였다.

반면에 청성파가 무너지고 공동파와 형산파가 각각 감숙성, 오독문을 수습한다고 쳐도 반 이상의 전력이 집결 중이었다.

또한 끊임없이 협객협사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안 그래?”

“왜 애를 독촉하고 그래. 총군사 입장에서는 승리도 승리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데. 이거 정마대전이야. 애들 골목싸움이 아니라고.”

“피해 없이 이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저 천년마교를 상대로?”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지. 피를 보는 게 당연하다고 무작정 싸우면 누구 좋으라고? 가뜩이나 오독문이 우리랑 천년마교가 양패구상하길 바라며 눈치 보고 있는데.”

당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느냐 싸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키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서였다.

천년마교나 오독문은 중원만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중원무림은 아니었다.

두 곳 다 감안하고 감당해야 하는 만큼 움직이는 건 신중해야 했다.

자칫 잘못해서 악수를 두게 된다면 수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가 나서겠다고. 그러니 지켜보도록 해.”

“···이래서 통보라고 했던 거냐?”

“응. 너희들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었지 해는 아니니까.”

“애들은 가만히 있냐?”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자 당민호가 이번에는 인정을 걸고 넘어졌다.

서로를 끔찍이 여기는 사제지간인 만큼 아이들이 이런 결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였다.

“우리 애들은 너희 가문 애들 못지않게 강해. 오히려 같이 간다고 하지 말리지는 않아.”

“다들 눈 돌아간 모양이네.”

당민호가 한순간에 오 년은 훌쩍 늙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믿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뭐, 나 혼자 가는 건 말렸지만. 근데 최종결정권자는 나다.”

“알고 있지? 지금의 곤륜파, 보기와는 다르게 위태위태하다는 거. 네가 있기에 곤륜파가 지금의 위치와 위상을 가지고 있는 거야. 네가 쓰러지는 순간 곤륜파도 같이 무너진다. 그걸 명심해야 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나 58년은 더 살 거라고. 이제 56년 정도 남았다.”

< 제 89장. 모조리 씹어 먹어 주마. -01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