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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85화 (285/325)

< 제 88장. 아아! 청민아…. -04 >

휘이이잉.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저지하겠다는 일념을 드러내듯 검을 뻗은 채로 죽은 청민의 시신을 곤마가 지그시 쳐다봤다.

사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그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당한 게 있기에 그 이상으로 갚아줘야 한다는 교주의 생각을 지지했기에 딱히 따지지 않고 출발했다.

그런데 직접 본 청민이라는 무인은 그가 생각했던 중원인들과는 달랐다.

“흐음.”

그는 겁쟁이와 기회주의자들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들은 게 그런 것들이었고, 몇 번 본 이들 역시 그 예상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청민은 달랐다.

“명문대파의 저력을 무시하면 안 된다더니.”

심장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았던 청민이었다.

이런 이는 본교에서도 드물었다.

아니, 명문이라 할 수 있는 육대마가에서도 드물 터였다.

더구나 자기보다 강한 자를 상대로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는.

“적장이지만 예의는 지켜야겠지.”

마인이지만 무인의 긍지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 신봉하는 이가 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곤마는 아직도 청민의 심장에 박혀 있는 자신의 애병을 천천히 뽑았다.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겠다.”

마제는 청민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 죽이라 했지만 곤마는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최소한의 목적은 이루었다고 생각해서였다.

청민을 상대한 후에 조무래기들과 손을 섞기도 싫었고.

“패선이라면 모를까.”

곤마가 중얼거렸다.

패선이 온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관심 없었다.

그렇기에 곤마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털썩!

소식을 듣자마자 어검비행술로 날아온 벽우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믿기지 않은 현실에 넋을 놓은 것이었다.

“장문인···.”

먼저 와 있던 설백이 조심스럽게 벽우진을 불렀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 듯 멍하니 청민만 쳐다봤다.

여전히 검을 뻗은 채로 서 있는 청민을 말이다.

“청민아···.”

무엇이 그리 간절한지 두 눈조차 감지 못한 채로 죽어 있는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은 가슴이 미어졌다.

상처만 봐도 청민이 얼마나 악착같이, 처절하게 싸웠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했잖느냐. 근데 어째서, 어째서 먼저 갔느냐. 나보다, 나보다 더 살겠다고 했지 않느냐.”

주르륵.

벽우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 차갑게 굳어버린 청민의 시신만 쓰다듬었다.

동시에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공력을 있는 대로 쏟아부었다.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푸스스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공력을 쏟아부은들 심장이 파괴된 이가, 죽은 이가 되살아날 리는 없었다.

“장문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백이 침중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벽우진을 불렀다.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벽우진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은 보내주어야 했다.

다만 슬픔과 분노, 울분은 가슴과 머리에 각인시켜두고 말이다.

부르르르!

벽우진만큼은 아니지만 설백 역시 그 누구보다 분노한 상태였다.

알고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청민은 그에게 있어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누구보다 곤륜파와 곤륜산을 위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설백은 가까스로 분노를 찍어 눌렀다.

“죄송해요···. 제가 남았어야 했는데···.”

사방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에 현주혜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들을 위해서라지만 어찌됐든 청민을 버려두고 도망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현 문주의 잘못이 아니오. 피할 수 없는 함정에 걸린 것뿐.”

“그렇지만···.”

현주혜가 맞잡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어서였다.

“주혜야.”

“예, 장문인.”

현주혜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벽우진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청민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그녀를 불렀던 것이다.

“누구인지, 혹시 아느냐?”

“저도 직접적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청민 장로와 느끼기로 진명마가주 이상이었습니다.”

“진명마가주 이상이라.”

어느새 눈물을 그친 벽우진이 살벌한 안광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나머지 육대마가의 가주들은 아직 청성산에 있지 않나?”

“밝혀진 바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비밀리에 하산했을 수도 있지. 그만한 실력자라면 혼자 몰래 이동하는 게 쉬울 테니까.”

설백이 미간을 좁혔다.

진명마가주 정도나 되는 거물은 천년마교에도 흔치 않을 터였다.

그런 만큼 아무래도 육대마가의 가주들 중 한 명이 아닐까 예상했다.

육대마가라는 울타리에 있는 만큼 교분이 적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가주 혼자 단독으로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희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명마가주만 하더라도 가솔들을 데려 온 것처럼요.”

“흐음.”

설백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였다.

“육대마가 중에 타격병기를 다루는 가문이 있나?”

“타격병기요?”

청민의 시신을 매의 눈으로 관찰하던 벽우진이 물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청민을 지나 주변을 날카롭게 훑었다.

“확실히 검에 의한 상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벽우진의 말에 무언가를 발견한 듯 설백 역시 눈을 빛냈다.

청민의 죽음에만 온 신경이 쏠려 정작 상처를 살피지 못한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검면에 의한 상처가 아닙니다. 둔탁한 무언가에 맞은 상처입니다. 그렇다고 권장각의 흔적도 아니고요.”

“맞습니다.”

설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방금 전의 벽우진처럼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싸움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고수들의 대결일수록 그 흔적은 더욱더 커졌기에 설백은 주변을 낱낱이 살폈다.

“둘이서 싸운 모양입니다. 제 3자의 흔적은 없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둔기 혹은 타격병기를 사용하는 진명마가주 이상의 고수라.”

설백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드러난 이들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곱씹는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마인이 없었다.

“누가 됐든지 간에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천년마교 역시 마찬가지고요.”

벽우진의 표정이 스산해졌다.

어차피 답은 하나였다.

천년마교를 때려 부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분노를 억누르며 청민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편히, 눈 감거라. 뒤는 나에게 맡기고.”

청민의 눈을 감겨주는 벽우진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현주혜와 설백은 차마 보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청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아서였다.

특히 마지막까지 검을 뻗고 있는 모습이 두 사람의 가슴을 애달프게 만들었다.

우드득!

동시에 설백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청민의 복수는 벽우진이 하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 복수에 힘을 보탤 생각이었다.

‘가만두지 않으리라. 모조리 죽여주마.’

설백의 두 눈에서 형형한 살광이 번뜩였다.

사실 지금까지 그는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그리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곤륜파와 곤륜산을 지키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청민이 죽었기에 설백은 보다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설 생각이었다.

“가시죠.”

“예.”

설백이 분노를 곱씹는 사이 청민을 안아든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품 안 가득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에 다시 한 번 눈물샘이 터질 뻔했지만 벽우진은 참았다.

울더라도 곤륜산에 도착한 후에 울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청민을 데려가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달칵!

회의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뒤이어 벽우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먼저 회의실에 와 있던 당민호와 제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어?”

“오셨습니까.”

“앉아. 무슨 대단한 사람이 왔다고 일어나?”

“대단한 사람 맞지. 살기를 풀풀 날리는데. 너 오는 걸 백 리 밖에서도 느낄 수 있겠더라.”

반사적으로 일어난 당민호가 투덜거렸다.

그 역시 청민의 소식을 들었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아서였다.

“너니까 느끼는 거야. 다른 녀석들은 느끼지도 못해.”

“그래도 적당히 해. 애들이 겁에 질렸어.”

“이 정도로 각오로 달려들어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어. 미리 정신단련 한다고 생각하라고 해.”

“두 번 정신단련 하다가는 실신하겠다.”

당민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기준에서야 정신단련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았다, 자제하마. 놈들이 근처에 있다고 하니까 좀 흥분했어.”

“이해는 하는데, 좀 참아. 곧 마음껏 터트릴 수 있을 테니까.”

“여전히 교주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며?”

“아직까지는.”

벽우진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자 당민호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사천성인데도 정작 확실하게 알아낸 게 없어서였다.

“뒤통수도 맞고.”

“육대마가를 미끼를 쓸 줄 낸들 알았냐. 나도 그 소식 듣고 뒷골 잡았다.”

당민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도 그 말을 들으면 뒷골이 땅겼기에 자연스레 표정이 안 좋아졌다.

“뭐, 나도 할 말은 없다만.”

“···청민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미안하다. 청민의 장례식에 가지 못해서.”

“이해해. 상황이 이런데 네가 자리를 비우는 게 말이 되냐?”

“그래도 가는 게 맞는데, 하아.”

당민호가 복잡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청민의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고 싶었다.

벽우진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못지않게 청민을 아꼈던 사람이 그였다.

또한 봉문을 풀자마자 곤륜산부터 찾아갔던 이 또한 그였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청민이도 이해할 거다.”

“그래도 살기는 좀 자제해. 네가 그러니까 아무도 말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더라.”

“더불어 내 마음도 이해해주고. 내 기억에 있던 둘뿐인 사제 중 한 명이 죽었어.”

청욱을 비롯해서 몇 명의 사제들이 더 돌아왔지만 그 누구도 청민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폐허가 된 곤륜파를 홀로 마지막까지 지키던 이가 청민이었다.

또한 그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반겨주고 알아봐 주었던 이가 청민이었고.

그렇기에 누구도 청민과 비교할 수 없었다.

“알지. 알아서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거 아냐. 네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그럼 이쯤 해. 제갈가주는 이제 총군사라 불러야 하나?”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제갈가주도 저이고 총군사도 저이니까요. 사실 맹주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천년마교와는 지휘부가 많이 다르니까요.”

“특히나 네 눈치를 많이 보지. 지금은 더더욱.”

당민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제갈현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 노력이 통한 것인지 벽우진이 실소를 흘렸다.

“내 눈치를 왜 봐?”

“비공식 천하제일인이 너 아냐? 네가 거절해서 방장이 맹주직에 앉은 거 아냐.”

“다들 알고 있잖아? 나보다는 법무가 더 맹주직에 어울린다는 걸. 아마 투표했으면 나를 찍은 이는 한 명도 없었을 걸?”

벽우진이 장담하듯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당민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친구이지만 솔직히 맹주자리에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자격은 충분하지만 역시 성격이 문제였다.

“한 표는 나왔을 겁니다.”

“대세는 거스를 수 없어.”

“그렇겠지요.”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대답과 조금 달랐다.

만약 벽우진이 맹주직을 받아들였다면 잡음은 좀 있을지 몰라도 대놓고 거절하는 이는 없었을 게 분명했다.

적어도 무위만 본다면 벽우진만큼 맹주직에 어울리는 무인은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겠지.’

< 제 88장. 아아! 청민아….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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