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84화 (284/325)

< 제 88장. 아아! 청민아…. -03 >

청민이 실소를 흘렸다.

죽을 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인데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색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삼 공자와 진명마가주가 죽었으니 최소한 곤륜파의 일 장로의 목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 목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니. 놀랍구려.”

“많이 부족하기는 한데, 그래도 급한 불을 끌 정도는 되지. 게다가 지금은 하나뿐이지만 곧 두 개, 세 개, 여덟 개도 될 수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청민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죽어서라도 곤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릴 작정이었다.

그야 다 늙은 노물이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곤륜파의 미래나 마찬가지였기에 절대 아이들을 곤마에게 넘길 수 없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곤마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등에 교차 되어 있던 두 자루의 몽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디 낡은 몽둥이였는데 흠집이 너무나 많아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두 개의 몽둥이를 곤마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얼굴로 움켜잡았다.

“당신은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오.”

“그리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근데 내가 보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

곤마의 기세가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촌부와도 같이 수더분한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한 명의 전사가 되어 있었다.

은연중에 흘러나왔던 기세가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솟구쳤던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바뀐 곤마의 기세에도 청민은 놀라지 않았다.

‘크흡!’

단순히 갈무리하고 있던 기도를 드러낸 것뿐인데도 청민이 받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직 그에게만 집중된 기세는 감히 그가 튕겨낼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견뎌내야 했다.

‘시간을 벌어야 해.’

무형지기도 아니고 단순한 기세일 뿐인데도 살갗이 베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예리한 기세였기에 청민은 공력을 가일층 끌어 올리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벽우진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치명타만 허용하지 않으면 된다.’

청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곤마는 자신이 죽음을 각오한 상태라고 생각할 터였다.

하지만 그건 반만 맞았다.

죽음을 각오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대호법님이 계신다. 대호법님과 검후라면 승산이 있어.’

곤륜파에서 벽우진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무인이 대호법 설백이었다.

그런 만큼 청민은 설백과 현주혜가 올 때까지 자신이 버틴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곤마를 처치하지는 못하더라도 두 사람이 합세한다면 쫓아낼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파아앗!

거기까지 생각한 청민이 땅을 박찼다.

하수인 자신이 시간을 끌기 위해서는 적어도 흐름 정도는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가뜩이나 무위가 떨어지는 자신이 열세에 빠진다면 얼마 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청민은 먼저 달려들었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청민이 전력을 다해 태청검법을 펼쳤다.

전초전이니 탐색전이니 하는 생각은 일체 하지 않았다.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니고 구마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에게 간을 보는 행위는 죽여 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청민은 처음부터 전심전력으로 공격했다.

우우우웅!

웅혼한 기상이 서린 태청검이 연신 곤마의 사혈을 노렸다.

혼신의 힘이 서린 일검 일검이 집요할 정도로 곤마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간절한 의지로도 격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정말 안타깝게 청민의 검은 빈 허공을 갈랐다.

‘초조해하면 안 된다!’

아슬아슬하다 못해 안타깝게 곤마에게 닿지 못했으나 청민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자신이 초조해하고 조급해할수록 더욱더 불리해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청민은 차분하게 공격에만 집중했다.

맞추지 못해도, 치명타를 입히지 못해도 아직은 괜찮았다.

‘이대로 시간만 끌어도 나에게는 이득이다.’

애초에 자신보다 고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격차가 한두 수라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물론 무공의 고하에 따라 승패가 절대적으로 가려지지는 않는다는 걸 청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험을 하기에는 저울의 한쪽에 올라가 있는 것들이 너무나 무거웠다.

‘아이들의 목숨에 비하면 내 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니야.’

청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자존심을 굽혀서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는 몇 번이고 버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청민은 흔들리지 않았다.

“좋은 검이고 무인이야. 그래서 아쉽구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게.”

곤마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적이지만 청민이 보여주는 기개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존중해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본교에서도 이 정도 기개를 보여주는 이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쌔애액!

하지만 그의 말에도 청민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곤마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력을 다하는 청민에게 그 역시 예의를 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웅웅웅!

이윽고 그의 양손에 쥐어진 낡은 철곤들이 공명음을 토해냈다.

동시에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곤마의 존재감이 일순간 터져 나왔던 것이다.

“큭!”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마기도 마기지만 사방을 밀어버리는 어마어마한 기운의 폭풍에 청민이 순간 움찔거렸다.

태청진기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스르르륵.

두 자루의 철곤이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 선이 청민에게는 사신의 칼날처럼 보였다.

보기에는 뭉툭하기 짝이 없는 철곤인데 느껴지는 예리함은 절세보검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닿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베일 것만 같은 날카로운 기세에 청민이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흘려낸다!’

느리지만 그렇기에 피할 수가 없었다.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그대로 따라올 것만 같은 느낌에 청민은 회피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벽우진과 대련할 때 많이 느꼈던 것이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터엉!

검을 비스듬히 틀어 방향만 살짝 비틀었지만 워낙에 철곤에 실린 힘이 대단해서인지 손목으로 전달되는 충격이 상당했다.

더구나 청민이 막아야 하는 철곤은 아직 하나 더 있었다.

검이 하나뿐인 그와 달리 곤마는 쌍곤을 들고 있었기에 청민은 다급히 좌장을 내밀었다.

태청검법보다는 성취가 낮지만 그래도 맨손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콰앙!

하지만 고작 3성의 옥심장(玉心掌)으로는 역시 무리였다.

청민이 일으킨 장강은 곤마의 철곤과 부딪치기 무섭게 박살이 나며 손바닥뼈를 뭉개버렸다.

낡은 모습과 달리 철곤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끄악!”

손바닥뼈가 산산조각 나는 고통에 청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충돌한 곳은 손바닥이었지만 팔뚝은 물론이고 상완골과 어깨로 이어지는 고통에 청민은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청민은 물러나지 않았다.

“호오. 반격할 여력이 있나?”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청민은 검을 휘둘렀다.

맞닿아 있던 철곤을 흘려내면서 태청검의 절초를 뿌렸던 것이다.

비록 충돌 직후였기에 날카로움은 많이 무뎌진 상태였지만 대신 그만큼 거리가 가까웠기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다만 문제는 곤마의 상태가 청민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었다.

퍼퍽!

가볍게 옆으로 반 보 움직이는 것으로 청민의 공격을 피해낸 곤마가 재차 철곤을 휘둘렀다.

왼손을 아작 낸 철곤으로 청민의 옆구리와 허벅지를 연달아 가격했던 것이다.

“큭!”

반사적으로 호신강기를 일으켰음에도 단숨에 깨부수며 파고드는 강맹한 일격에 청민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옆구리도 옆구리지만 허벅지에 맞은 일격으로 인해 뼈가 부러졌기에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한순간에 승기가 기울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고작 이 정도를 벌어주려고 남은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청민은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좋지 않은 생각이야. 어설픈 공격은 하지 않느니만 못해. 내공소모도 극심하고.”

쩌저저적!

곤마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릇이 깨지는 듯한 소리였는데 그 소리를 들은 청민의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직 서투른 무형지기를 일으킨 것이었는데 역시나 곤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약속하지. 고통 없이 보내주겠네.”

“흐흐!”

허벅지며 왼손이며 말 그대로 왼쪽이 망가진 청민이었다.

서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청민은 웃었다.

고통으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역시 그런가.”

죽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청민의 눈빛에 곤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쌍곤을 고쳐 잡았다.

비록 적장이지만 예우를 다해주는 것이었다.

‘다른 선택지도 있지만, 선택하지 않겠지.’

곤마의 시선이 청민에게로 향했다.

그의 주인이자 교주인 마제는 생포할 수 있으면 생포하라는 지시도 내렸었다.

사제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벽우진이기에 인질로서의 효용성도 상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앞에 서 있는 청민을 보니 죽으면 죽었지 사로잡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중원인들은 천년신교의 사람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천년신교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이 많을 뿐이지 모두가 다 악랄하고 잔혹하지는 않았다.

쉬이익!

또한 그처럼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무인도 있었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 그만 하게.”

곤마는 다가오는 검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자세가 흐트러진 만큼 검극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공력 역시 제대로 주입되지 않았기에 형형했던 검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민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오직 그를 저지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말이다.

퍼석!

비틀거리는 몸으로 힘겹게 다가오는 청민에게 곤마가 철곤을 휘둘렀다.

더 이상 그를 상대하는 건 모욕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번에야말로 끝낼 생각으로 곤마는 머리를 노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철곤이 타격한 곳은 어깨였다.

비틀거리는 자신의 육신을 이용해 가까스로 곤마의 공격을 피해냈던 것이다.

“허! 그 와중에 피했단 말인가.”

“크으읍!”

그뿐만 아니라 청민은 마지막 힘을 모두 쥐어짜내듯이 곤마에게 달려들었다.

옆구리와 허벅지, 어깨에 맞은 공격으로 인해 공력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청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하겠다는 듯이 몸을 날렸던 것이다.

푹!

청민의 몸이 멈췄다.

비록 느릴지라도 계속해서 접근하던 그가 일순 멈춰 섰던 것이다.

동시에 청민의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에 축적된 내상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아직, 아직 죽어서는 안 되는데···. 좀 더···, 좀 더 시간을 벌어 줘야···.”

탁한 눈빛의 청민이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이 멈춰 섰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아니, 심장이 꿰뚫린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만 쉬게나.”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청민을 가만히 바라보던 곤마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청민의 움직임 역시 멎었다.

마지막까지 물러나지 않았던 무인이 끝내 숨을 멎은 것이었다.

< 제 88장. 아아! 청민아….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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